172화
금빛 혜성(彗星)
“어떻게… 이런 일이…!”
사그나드의 부관, 페이커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시야를 겨우 붙잡은 뒤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분명하다. 페이커는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조금 전에 있었던 폭음 때문에 고막이 찢어지기라도 한 건지, 여전히 이명(耳鳴)이 귓가를 계속 맴돌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모든 게 엉망이었다.
사람보다도 훨씬 커다란 낙석이 곳곳에 포진해 가뜩이나 좁은 협곡의 회랑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낙석 사이사이로 핏물이 질펀하게 새어 나오고, 누구의 것인지 알기 힘든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매캐한 탄내가 여전히 진동해서 코끝을 마구 쑤셔댔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신음이 들렸다. 하지만 저 소리의 주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절명하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모든 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별의 종군을 쫓아 협곡에 들어섰을 때. 페이커는 뒤늦게 자신들이 위험 지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존경하던 사그나드가 그토록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로 인한 분노가 너무 컸던 나머지, 평상시에는 잘 접근하지도 않았던 구역에 발을 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병사 중 대부분은 이미 분노에 눈이 완전히 멀어 있었으니. 그의 명령 따윈 들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몇몇 장교들은 아예 대놓고 무서워서 그런 것이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신들은 저 제국군의 목을 들고 가지 않으면 사그나드의 영전에 설 자신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결국 사그나드의 영전에 설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협곡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그대로 생매장되고 말았으니까.
진작 대비를 하고 있던 페이커마저 이런 꼴을 당했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궤멸(潰滅).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전투였다.
‘그래도 일단 나가야…!’
페이커는 이를 악물면서 어떻게든 낙석 더미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비록 저들의 농간에 놀아났다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목숨을 구해야만 했다. 그래야 복수를 하든, 검을 꺾든, 뭐든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페, 페이커 부관님? 이봐, 여기 생존자가 있어! 어서 와서 도와줘!”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했던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끼던 부관이 각별하게 생각하던 후배가 분명했다.
페이커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낙석 더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숨이 탁 트였다.
시야를 겨우 붙잡으면서 눈을 똑바로 떴다.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있는 게 보였다. 하나 같이 패잔병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살아계셨군요! 다, 다행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한 명이라도 지휘관이 남았다는 사실이 부대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다.
페이커는 목젖까지 치밀어 오른 피를 겨우 삼키면서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생존자는?”
“…현재 발견된 사람은 스물 남짓입니다.”
“팔백이나 되는 기병이 뒤쫓았는데, 스물이라.”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전과였다.
궤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전멸(全滅)이라는 단어도 무색하지 않을 결과가 아닌가.
“그, 그래도 계속 생존자들을 수색하고 있으니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페이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아직 더 많은 생존자가 바위 아래 깔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생존자일 뿐, 두 번 다시는 전력이 되지 못한다. 사그나드를 따르던 클레이모어 기사단은 더 이상 재기하기 힘들 것이다.
동부 변방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던, 야만인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명망 있는 기사단이 이렇게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단 한 번의 착오로.
그런 사실이, 페이커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 * *
그래도 페이커는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다행히 협곡으로 합류하지 않았던 기병들이 있다. 성을 나오지 않은 병력도 있고. 그들을 규합할 수 있다면…!’
두 번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협곡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페이커는 뒤늦게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들을 쫓는 무리가 없다는 것을.
‘잠깐. 협곡에 우리를 모두 매몰시켜두고서는, 2차 공격은 하지 않았다고?’
저들로서는 함정에 빠져 다 죽어가는 생쥐들을 처치하는 것만큼 맛난 전공(戰功)도 없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자리를 비웠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로 상정할 수 있었다.
하나는 2차 공격을 가하려는데 도중에 다른 변수가 발생했을 경우. 매몰에 휘말리지 않은 부대가 있어서 별의 종군의 측방을 노렸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럴 때는 별의 종군이 다시 도주를 시도하고 있을 테지. 이쪽에 유리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더 큰 전공을 쌓을 자신이 있을 경우…!’
정반대의 시나리오였다.
별의 종군이 말머리를 다시 반대로 돌려 기습에 몰리지 않은 추격대를 공격하는 것.
페이커는 어쩐지 후자일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그나드의 암살에서부터 협곡 유인까지. 하나 같이 군략(軍略)과 병법에 특화된 참모가 아니면 절대 풀어낼 수 없을 작전들이었으니까.
그만한 인재가 있다면 분명히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도 어떤 계획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임을 재촉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페, 페이커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들…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냐?”
그리고 불안한 느낌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요새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아군 모두가 패잔병의 기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듣게 된 내막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허…!”
협곡 매몰 이후. 뒤늦게 합류하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기병들은 재차 별의 종군을 쫓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말머리를 돌린 그들과 충돌했다.
그리고.
완패(完敗)하고 말았다.
“놈들은 신출귀몰, 그 자체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이 봤을 때, 별의 종군은 아직 전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한 부대.
개개인의 기량은 제법 뛰어날지 모르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융화가 어려워서 결국 전투에서는 패배하고야 말 놈들이었다.
반면에 자신들은 아주 오랫동안 동부 변경을 지키면서 손발을 맞춰 온 정예들.
당연히 오합지졸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수치였다. 더군다나 머릿수도 여전히 자신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별의 종군이 부리는 전법이 너무나 귀신놀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전열을 치려 하면 귀신처럼 뒤에서 다른 전열이 나타나고, 그들을 막으려 하면 측방에서 또 다른 전열이 나타났다.
거기다 무슨 스크롤이 그리도 많은 건지, 별의 종군은 필요할 때마다 마법도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그러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다 퇴각하고 났을 때는…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군략 뿐만 아니라, 지휘 능력도 뛰어나다는 건가…?’
불안감이 훨씬 더 커지고 말았다.
어쩌면 당한 건 추격대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을 달래면서 요새 쪽으로 패잔병들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계속 더 많은 병사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신출귀몰한 별의 종군에 움직임에 한껏 농락당해서 이 꼴이 되고 말았노라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말이다.
‘무향화! 청사자의 여식이 여기에 있었구나!’
비록 그 미모에 가려지긴 했어도, 이사벨 바일의 학식과 지모는 사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바. 그래서 그녀가 비록 청사자의 자리는 잇지 못하더라도, 상가였던 가문을 더 번성시킬 수 있겠다는 소문은 뒤따라붙곤 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학식과 지모라는 것이 군략과 병법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참모’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군사(軍師).
갖가지 책략과 수단을 활용해 능히 전장을 제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존재.
수많은 강자와 초고수들이 빛나는 이 시대에 오히려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고 알려진 재목이… 저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페이커의 그런 생각은 요새에 도착한 순간, 확신이 되고 말았다.
망루에 높이 선 깃발이 보였으니까.
책 위에 올라선 부엉이.
바로 메르빙거와 별의 종군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어, 어떻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아! 사그나드 님….”
망연자실한 패잔병들 사이에서, 페이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 * *
엘릭에 대한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자네 그 말 들었나?”
“무슨 말?”
“메르빙거 가주에 대한 소문 말이야.”
“그거, 거짓 아니었나?”
“설마. 목격자도 있다던데?”
일백 남짓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단신으로 케트라인 요새를 함락시켰다는 소문.
처음에는 아무도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엘릭이 최근 들어 명성을 떨치고 있다지만, 최정예도 아닌 그런 병력을 데리고 어떻게 단 하루 만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겠냐며.
상식적으로 그게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본영에서는 병사들까지 이를 헛소문으로 치부해버릴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귀족들도 이때다 싶어 엘릭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찬성공작이 별 되도 않는 짓을 잘도 저질러대는군.”
“그러게나 말이오. 그렇게 자신을 한껏 치장해놓고, 명성도 띄워놨는데 정작 실속 없는 게 드러나 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무리수를 던지는 모양이오.”
“그래봤자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을. 쯧! 어찌 그런 근시안적인 행동을 하는 건지.”
“어려서 그런 게지.”
“마도명문의 마지막 남은 불꽃도 이것으로 꺼지나 보군.”
그들 대부분이 메르빙거의 재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이었던바.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번 다시는 메르빙거가 일어설 수 없도록 자근자근 짓밟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보다 별의 종군을 돕는다던 청사자가도 같이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겠소.”
“가뜩이나 골육상쟁 때문에 집안 관리도 못 한다고 말이 많은 판국이건만.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쯧!”
“그보다… 본인은 이번 일이 4황자께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만 할 뿐이라오.”
“4황자께서 직접 메르빙거 가주더러 친구라고 하셨다던데, 그 말부터 단속할 필요가 있겠소.”
그 때문에 그동안 메르빙거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바일 가문은 물론, 엘릭을 가리켜 ‘친구’라고 칭했던 크롬헬 황자가 악영향에 놓칠 위기에 처했지만.
정작 헤르만과 크롬헬 황자는 전혀 그런 걸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곧 재미난 소식이 들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대본영은 대본영 나름대로 곧 있을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엘릭과 별의 종군이 적사자가의 시선을 끄는 동안, 언제 공격을 개시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재는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생각으로 사나흘이 바쁘게 흘렀을 무렵.
별의 종군에서 보낸 사절이 대본영에 도착했다.
험난한 전장이라도 굴렀다 온 건지, 몰골이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났으니.
사절이 황태자를 위한 엘릭의 선물을 가져왔다고 밝혔을 때, 사람들은 엘릭이 이제 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다고 생각했다.
제라이츠 황태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뇌물이라도 쓰려는 모양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대본영에서 그 ‘뇌물’이 공개되었을 때.
“헙!”
“저, 저것은…?”
“어, 어, 어, 어떻게 저런 것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그나드.
적사자가 그토록 아낀다는 네 개의 발톱 중 하나의 머리가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