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별의 종군
『정말 그런 일을 벌이다니. 푸하하핫!』
메피스토는 당장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엘릭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엘릭은 죽을 맛일 것이다.
언제나 넘쳐흐르던 마력을 5분 만에 소진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억지로 몸을 극한까지 쥐어짠 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다음 작전을 위해 쉬지도 못하고 마력을 다시 복구하는 데에 전념해야 하니 오죽 답답할까.
『하긴 이러니 본 왕이 계속 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메피스토는 엘릭을 보는 자신의 관점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던 대상이었지만.
증오로 얼룩진 존재의 후예였기에 언젠가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옆에 붙어 있다 보니 미운 정이라도 들었던지, 엘릭이 하는 일에 조금씩 응원이라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메르빙거를 다시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줄 마음이 들었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미래에 마주할 대적(大敵)의 성장을 지켜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자신이 전성기 시절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메피스토였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 자신을 대립할 적이라면 이 정도 수준의 재능은 지녀야 한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메피스토는 최근 들어 자신이 하루가 다르게 ‘옛날’로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이번에 ‘그리고리’와의 전쟁이 끝나고 난다면.
아자젤의 그림자를 잡고 난다면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까지 갖고 있었다.
엘릭과의 관계는 그때 가서 다시 정립해도 늦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엘릭이 벌이는 사건사고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완전한 ‘겨울’을 완성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권능을 응용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괴물인 건 확실하지.』
북풍과 한설.
그 두 가지는 분명 그리고리에서도 탐냈을 게 분명하다.
아니, 탐내던 게 확실했다.
겨울 현자가 당대에 일으키던 힘은 ‘이적(異蹟)’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지막지하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적’은 ‘미지’라고도 단어로 치환할 수도 있음이니.
북풍과 한설은 달리 보자면 단순히 마법의 영역이 아니라, 인외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셈이다.
그런데 엘릭은 그런 걸 너무나 순조롭게 다뤘다.
아니, 나아가 거기서 필요에 따라 비틀기도 하고, 때로는 무술과 섞어서 다채롭게 변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케트라인 요새를 뒤덮던 결계를 잠깐이나마 권능으로 중단시켰을 때는 오죽 놀랐던가!
뒤이어 북풍을 활용해 망령을 제 몸에 빙의시켜 부족한 무론(武論)을 보충하고, <보라매의 기상>을 풀어냈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었다.
이 아이의 성장 속도는… 무섭다.
이전에도 무섭다는 생각을 했지만, 권능까지 손에 넣은 지금은 그 속도에 탄력까지 붙었다.
그리고리를 해치우고 났을 때쯤에는.
아니,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났을 때쯤에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닿아있을지 모르겠다고 판단한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직 사계 중에서 3개나 남아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메르빙거의 ‘옛 힘’까지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메피스토는 가만히 엘릭을 지켜보았다.
이 괴물 같은 녀석은 정말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이런 괴물의 성장을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엘릭이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평온한 눈빛.
분명히 명상에 잠기기 전까지만 해도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던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변화였다.
눈은 마음의 창일지니.
메피스토는 엘릭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피로를 어느 정도 쫓아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드나?』
“아 씨, 깜짝이야.”
그러다 메피스토가 던진 질문에 엘릭이 놀라서는 황급히 뒤로 움찔 물러섰다.
메피스토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무례하군.』
“그럼 눈 뜨자마자 남자 면상이 바로 보이는데 안 놀랍니까?”
『…그도 그렇군. 그건 본 왕이 사과하지.』
메피스토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내심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뜨니 엘릭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먹부터 날리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음?”
『왜?』
“뭐가 좀 이상해서요.”
『…?』
“아저씨, 메피 맞죠?”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아니. 내가 알고 있는 메피는 이렇게 순순히 긍정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자기 말이 맞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말지.”
이놈에게 자신은 대체 어떤 이미지로 찍혀있는 걸까.
메피스토는 엘릭을 ‘인정’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만나면 면상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나 계속할 거면 잠이나 계속 쳐자던가!』
“명색이 대마왕이라던 사람이 쳐잔다가 뭡니까, 쳐잔다가? 좀 더 고상한 표현도 많구만. 하여간 신분이랑 교양은 전혀 별개라니까.”
『뭐 이 새꺄?』
엘릭은 길길이 날뛰는 메피스토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사그나드를 암살하면서 근육을 극한까지 쥐어짰던 몸에는 피로가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계속 마력을 복구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풀리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뻐근한 근육 때문에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력회로를 쉴 새 없이 돌리다 보니 어느 정도 정신이 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더욱더 예민해졌어. 근육도 더 잘 통제가 되고.’
하지만 엘릭은 현재 그런 자신의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한 번 확장된 무론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억지로나마 끌어올린 상승의 묘리를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무(武)에 대한 상승 묘리들이 이제는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 육체의 움직임과 근육의 미세한 조절, 마력의 순환까지 더 많은 것들을 조절할 수 있었으니.
비록 빙의가 풀리면서 상승 묘리도 같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것이 남긴 여파는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권능에 대한 이해도도 한층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엘릭은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그나드 같은 존재가 또 있다면 상대하기가 힘들겠지만.
그게 아닌 수하들이라면… 얼마든지 내쫓을 수 있을 테니까.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어 전장을 빠르게 살폈다.
케트라인 요새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군가가 침입해오는 건 전혀 걱정하지 않는 투.
‘아니, 그보다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표현이 옳겠지. 한창 정신이 없을 테니까.’
엘릭은 아귀감의 영역을 활짝 펼쳤다.
이전보다 무론에 대한 깊이가 높아져서 그런지 더 넓게, 그리고 더 넓고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상당히 많은 숫자의 병사들이 요새에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사벨과 별의 종군을 쫓으러 간 모양이었다.
‘역시 잘하고 있나 보군.’
엘릭은 이사벨 쪽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충분히 추격대를 따돌릴 뿐만 아니라, 적들에 큰 피해까지 입혀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병사들은 요새와 그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히 장교진이 무척 바빠 보였다.
아마 혼란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수장이 암살당한 것에 관해 어서 본진에다 보고도 올려야 할 테고, 병사들의 사기도 수습해야 할 테고.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럼.’
엘릭은 차갑게 웃으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름을 더 실컷 부으러 가볼까?’
주요 병력이 대거 빠져나간 지금이야말로.
케트라인 요새에 메르빙거의 깃발을 꽂을 기회였다.
엘릭은 따로 챙겨뒀던 봇짐을 풀어 그 안에 든 깃발과 깃대를 꺼냈다. 아테가 가르쳐준 대로 조립을 하고 나니 3미터 길이의 가문기(家門旗)가 만들어졌다.
마도명문 메르빙거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깃발.
바람에 실려 힘차게 나부끼는 가문기를 오른손에 쥐고, 은신을 해제시켰다.
“무…!”
때마침 엘릭 앞으로 지나치던 병사가 손날에 목젖을 가격당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주변을 수색 중이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어둠을 헤치면서 나타나는 금발과 녹안의 사내. 그리고 거대한 가문기.
“서, 서, 서, 설마…?”
“마법사다! 조금 전 그 마법사다아!”
“메르빙거가 다시 나타났다아!”
병사들은 혹시 후퇴하는 별의 종군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낙오병인가 싶었지만, 금세 엘릭이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특히 사그나드를 암살하던 엘릭의 얼굴을 직접 보았던 병사가 있었으니.
비록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엘릭의 이목구비를 정확하게 본 건 아니었지만, 금발과 녹안이라는 독특한 외모는 절대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엘릭이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늦었어.”
콰아아앙!
엘릭은 다시 마법 무장을 전개하면서 요새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거대한 화살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허겁지겁 그 앞을 막아보려 했지만,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엘릭을 따라 감도는 돌풍에 휩쓸려 도리어 튕겨나야만 했다.
엘릭이 노리는 건 성벽의 정문이었다.
위쪽에 설치된 결계는 권능을 일으킬 수 없는 지금 당장은 공략하기가 요원했다. 하지만 저렇게 언제든 들어오라며 활짝 열린 정문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뭐지?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저기 뭐가 있는 것 같… 헉!”
“깃발이…!”
“메, 메르빙거가 다시 나타났다!”
“무,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병들이 쫓고 있던 거 아녔어? 왜 남아있는 놈이…!”
“성문 닫아! 어서!”
“놈이 요새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아귀감을 통해 요새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뒤늦게 엘릭을 발견하고, 아니, 정확하게는 엘릭이 흔들고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 대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들로서는 다시 조금 전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놈은 혼자다! 거기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할 게 분명하다! 잡을 수 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개중에는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재빠른 지휘관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활을 이쪽으로 겨누긴 했지만, 엘릭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요원했다. 화살들은 애꿎은 지면만 때리기 일쑤였다.
그그그긍!
때마침 도개교도 올라가고 있었다. 엘릭이 들어올 수 없도록 성문을 닫아걸려는 것 같았지만, 느리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어서 서둘러서 도르래를 당기라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츠츠츠-
엘릭은 그것을 보면서 그림자를 높이 끌어올렸다. 간만에 흉성의 인장이 빛을 발했다. 육체에 부족했던 파괴력이 다시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닫히기 직전인 성문에 다다랐을 때. 엘릭은 그대로 돌파를 시도했다.
콰아아앙!
마치 포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성문이 그대로 박살 났다. 수없이 많은 파편이 튀어 오르고,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탁!
엘릭은 외성에 이어 내성 깊숙한 곳까지 직진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휘휘휘휘!
그가 몰고 온 돌풍이 사방으로 불어닥치면서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마치 이곳은 이제부터 메르빙거의 소유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엘릭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과 불신에 가득 찬 병사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마력을 잔뜩 실어서 소리쳤다.
“마도명문 메르빙거의 가주, 나 찬성공작 엘릭 메르빙거가 그대들에게 투항할 것을 권고한다. 투항하는 자는 제국법의 포로 규약에 따라 정중히 대우할 것이되, 저항하는 자는 즉결 처분을 할 것이다.”
엘릭의 내뿜는 존재감이 요새 전체로 뻗어 나갔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