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별의 종군
콰콰콰쾅!
우르르-
우박이 집중적으로 떨어진 자리는 케트라인 요새에서도 가장 높게 서 있는 첨탑이었다.
그곳에서 사그나드로 짐작되는 존재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엘릭의 짐작은 여러모로 맞은 것 같았다.
“이, 이런…!”
“클레이모어 님께서 계신 곳이 당했다!”
“놈이 저쪽으로 간다!”
“막아!”
“기, 길이 얼어붙어서 갈 수 없습니다! 시야도 확보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가! 막으란 말이다!”
아래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가뜩이나 요새 위를 뒤덮을 정도로 불어닥친 막강한 겨울 폭풍 때문에 시야 확보가 힘든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들의 수장이 있는 곳이 피격당하고 말았으니 놀랄 수밖에. 거기다 첨탑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사그나드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까지 들 정도였다.
“【날아라】.”
엘릭은 그런 녀석들의 머리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빨리 목표물을 해치워야만 했다. 아직 사그나드의 기척은 꺼지지 않았다.
“궁병, 전체 대기!”
“쏴!”
슈슈슈슉-
개중에 상황 판단이 빠른 부관들은 재빨리 궁병들을 독려해 화살을 이쪽으로 쏟아지게 했지만.
휘이이잉!
요새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강풍이 크게 회오리를 치면서 화살은 엘릭에게 닿기는커녕 몽땅 하늘 높이로 치솟아버렸다.
거기다 병사들은 더 이상 엘릭 쪽에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어느새 하늘에는 새로운 마법들이 생성되고 있었으니까.
콰콰쾅!
콰콰콰-
콰르르, 콰르릉-
“마법이다!”
“또 다른 마법사가 있다!”
“공성 마법이 이어진다! 전부 방패 들어!”
“막아아아!”
“계속 노출되어서는 안 돼!”
갖가지 공격 마법들이 줄지어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면서 성벽을 강타했다.
병사들이 허겁지겁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그나마 실력 있는 기사들이 나서서 어떻게든 마법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그들만으로는 손발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접근전과 일대일 결전에 있어서 마법사가 기사와 무도가를 이길 방법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집단전, 특히 범위가 넓은 공성전에서는 당연히 마법사가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넓은 영역’을 대상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으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마법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면 상대에게는 공포를 부를 수밖에 없으니.
그야말로 폭격(爆擊)이라고도 해도 될 수준의 마법 세례에 성벽이 연거푸 흔들렸다.
탄내가 진동하고, 매연이 풀풀 날렸다.
“대체! 대체 왜 방어 마법진이 가동되지 않는 거지? 내부에 간자라도 있었던 건가…? 젠장! 마법사! 마법사를 당장 불러와!”
특히 요새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큰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그동안 케트라인 요새를 온갖 마법과 저주로부터 보호해주었던 결계가 전혀 작동하질 않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들은 모르겠지. 이 빌어먹을 권능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푸하하하!』
메피스토는 그런 광경들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엘릭이 겨울 폭풍을 일으킨 건 단순히 요새 위에 혼란만 일으키려는 목적만이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면, 굳이 탈진 위험이 있는 권능을 사용할 필요 없이 언령을 몇 개씩 연달아 사용하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그런데도 한설을 고집한 이유.
그건 요새를 뒤덮고 있는 결계의 ‘결’을 가르기 위해서였다.
결계가 구성될 수 없도록 겨울 폭풍이 쉴 새 없이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결계를 완전히 파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려면 압도적인 물리적 타격이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엘릭은 그만한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게 아니면 근원이 되는 마법진을 부숴야 하는데, 당장 그러기도 여의치 않았다.
아마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고작 5분 남짓.
겨울 폭풍이 끝나면… 권능이 끝나면 끝날 터였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떻게든 사그나드를 해치운다.’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테지만, 최소한 시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콰콰쾅!
콰콰콰-
‘다행히 이사벨은 부탁한 대로 적절하게 움직여주는 것 같고.’
현재 요새를 뒤흔들고 있는 공성 마법은 엘릭이 자체 제작한 스크롤로 빚어지는 것.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작업한 결과물들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덕분에 혼란을 더 키워주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어디냐?’
엘릭은 무너진 첨탑에 도착하고서 아귀감을 바짝 세웠다. 매몰된 사그나드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였다.
『‘한설’은 사용했고. 그럼 ‘북풍’도 같이 쓸 셈이냐?』
[미쳤습니까? 흑마법사로 낙인찍히게 딱 좋게?]
엘릭은 메피스토의 질문에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한설과 달리, 북풍은 어디까지나 정말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놔야만 한다.
죽은 영혼을 다루는 것만큼 현시대에서 금기시되는 것도 또 없었으니까.
『그럼?』
[어디까지나.]
츠츠츠-
엘릭의 손끝에 마력이 뭉쳤다가 잿빛으로 색이 바뀌었다. 그것이 기괴한 형태로 일렁이면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망령이었다.
오토 한의 사가에서 거둬들였던 언데드.
[보조용으로 써야죠.]
파아아!
북풍을 사용하기가 영 꺼림칙하다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엘릭은 이미 망령의 사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었다.
망령들에 남아있는 사념을 활용해 지식으로 삼는 건, 이미 푸른 매에게서 무술의 기본기를 배우면서 써봤던 상태.
다른 활용법은 이렇게 몰래 망령들을 곳곳에다 뿌려 수색용으로 부리는 것이다.
망령들의 탐색 범위는 아귀감보다 넓다. 그리고 녀석들이 감지해낸 정보는 실시간으로 주인인 엘릭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덕분에.
‘찾았다.’
엘릭은 무너진 건물 더미로 파고든 망령에게서 사그나드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터…!”
그래서 그곳에다 마법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으려는 그 순간.
콰아아앙!
갑자기 매장된 화약이 터진 것처럼 낙석 더미가 갑자기 폭발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2미터쯤 되는 덩치를 가진 거한이 일어나 이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족히 몇 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대검(大劍). 클레이모어였다.
“…흡!”
엘릭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아귀감이 울부짖고 있었다.
저걸 억지로 막으려 들다간 피떡이 되고 말 것이라고!
쾅!
아니나 다를까.
클레이모어는 엘릭이 있던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는 지반에 틀어박혔다.
그러자 바닥에 엄청난 너비의 크레이터가 파이면서 위로 돌가루와 파편이 우수수 튀어 올랐다.
흩날리는 먼지구름 속에서.
사그나드로 보이는 남자는 마치 밤 중에 눈을 밝히는 맹수처럼 두 눈에 불길을 틔우고 있었다.
“워메이지인가? 마법사 주제에 몸놀림이 제법 기민하구나. 하지만 감히 내 앞에 직접 나타나다니… 죽여주마!”
콰콰콰콰-
사그나드는 지반을 으스러져라 밟으면서 포탄처럼 단숨에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재빠르고 기민한 움직임.
절대 낙석 더미에 깔려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엘릭은 심안과 아귀감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현재 사그나드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평상시와 비교했을 때 절반 정도의 실력밖에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녀석을 빠르게 해치우고 달아나기에는!
강체술.
백호출동 – 경(勁).
엘릭은 거기서 곧바로 마력 순환 경로를 단번에 바꿨다. 딸칵. 마치 체내에서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다른 스위치를 누른 듯한 소리.
동시에 그를 둘러싸던 기질이 전혀 확 달라졌으니.
마법사가 아닌 무도가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강한 패기를 물씬 풍기면서 순식간에 엘릭의 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콰아앙!
클레이모어와 주먹이 맞부딪쳤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포탄이 떨어지는 듯한 그런 소리가 났다.
사그나드가 뒤로 튕겨 나면서 처음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힘만 따지자면 적사자가 내에서는 물론, 주군인 변경백께서도 찬탄할 정도로 대단한 자신이었건만.
고작 이런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마법사에게 가로막혀?
워메이지라는 건 진즉에 눈치를 챘지만, 아무래도 단순히 ‘마법사’라는 범주로 치부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콰콰콰콰-
그때부터 엘릭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권격이 휘몰아치면서 날카로운 칼바람도 똑같이 몰아쳤다. 사그나드의 손발도 어지러워졌다.
쾅!
휘휘휘휘!
하지만 사그나드는 처음에만 당황할 뿐, 곧 역전의 용사답게 금세 이성을 되찾아 침착하게 맞대응을 해나갔다.
엘릭의 권격을 옆으로 쳐내고,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고 드는 마법이 있으면 힘으로 부숴버렸다.
철벽.
엘릭에게 있어 사그나드는 그렇게 느껴졌다.
비록 수도 없이 흠집을 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철벽.
‘이건 상정치 못했던 건데.’
4체인의 실력자라더니.
엘릭은 사그나드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래서는 암살만 하고 도망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여기! 여기에 사그나드 님이 계신다!”
“마법사가 사그나드 님을 노리고 있다! 어서 놈을 막아!”
“기사단, 전진!”
“놈을 포위하라!”
“에워싸서 빠져나갈 수 없게 퇴로를 막아!”
‘이런…!’
문제는 설상가상으로 겨울 폭풍에서 길을 찾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해진 병사와 기사들이 빠르게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단 점이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3분. 탈출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2분도 안 남은 셈인데. 어떻게 할 셈이냐?』
메피스토가 히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
그리고 그런 메피스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그나드의 두 눈에 맺힌 안광도 거칠게 일렁였다.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감히 내가 지키고 있는 요새를 노리려 들어? 네놈의 머리를 효수하여, 제국 놈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리라.”
쿠쿠쿠쿠-
『남은 시간 2분.』
여기서 엘릭은 결국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건 최대한 나중에 써먹으려 했던 거지만.’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순간, 그를 둘러싼 기질이 다시 한번 더 바뀌었다.
마법사에서 무도가로 바뀌었을 때처럼.
사그나드는 그가 또 뭔가를 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재빨리 오러 블레이드를 꼿꼿하게 세워 엘릭의 허리를 쓸어나갔다.
엘릭의 손날이 빳빳하게 섰다. 마력회로가 순식간에 과열되면서 마력을 단번에 허용치 이상으로 쏟아냈다.
그리고 심안이 비춰내는 아주 미세한 결을 따라 손날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동시에.
“【내려앉아라】.”
언령이 발동되면서 순간 권능, 북풍이 일부 전개되었다.
마력회로에 잠들어있던 망령 중 일부가 육체에 빙의(憑依) 한 것이다.
화아악!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엘릭은 한순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확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아직 당장 이해하기 힘든 무론(武論)의 일부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보라매의 기상.’
그렇기에 엘릭은 언젠가 푸른 매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보라매의 기상>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모방하고자 했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펼칠 수 없을 테지만, 지금이라면 일부나마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푸른 매가 보여주었던 진짜 <보라매의 기상>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매의 날개.’
그중 첫 번째가 발동되었다.
촤아아악!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