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별의 종군
아테는 쓴웃음을 짓다가, 엘릭의 옆에 있던 이사벨을 슬쩍 훔쳐보고는 눈을 밝게 빛냈다.
‘음?’
출전하기 직전.
그는 브라이언과 함께 잠시간 군사(軍師)라면서 참여한 그녀와 잠깐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때 아테는 이사벨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군략에 있어 훨씬 재능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한때, 예비 황태자비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녀에게 그런 능력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테는 그제야 이번 작전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잘 알 것 같았다.
“…이번 작전, 이사벨 님께서 내놓으신 것이로군요.”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저도 동의했구요. 그러니 아테 님은 진군과 지휘에 신경 써주십시오.”
“…무엇을 노리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사벨과 엘릭이 머리를 맞대어 만든 작전이라.
뭔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뭔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주실 것 같으니 기대 하겠습니다.”
아테는 더 이상 작전에 대해서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지 않겠느냐는 신뢰가 묻어났다.
엘릭은 그런 아테의 반응이 고마웠다.
아직까지 전장에서는 이렇다 할 전적을 세우지 못한 자신과 이사벨이 아니던가.
어찌 보면 두 사람 모두 ‘데뷔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미덥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대해서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브라이언이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조금씩 불안해하는 기색은 보여도, 그들은 엘릭이라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낼 것이란 굳은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두고 단지 영웅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해야 할지, 우상에 대한 숭배심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엘릭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거면 족합니다.”
아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편으로는 단독으로 요새를 함락해 보이겠다는 엘릭의 작전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곧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엘릭의 명령이 곳곳에 하달되면서 진군 속도가 더 빨라졌다.
마치 자신들의 움직임을 직접 봐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 * *
“‘클레이모어’의 사그나드는 적사자가를 상징하는 ‘네 개의 발톱’ 중에서도 가장 성정이 포악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행군이 케트라인 요새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사벨은 슬슬 ‘출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엘릭을 보면서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들이 봤을 때는 도무지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려는 데도 불구하고.
엘릭과 이사벨, 둘 모두 긴장하는 기색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전장에서 스스로 뛰어드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기도 해요. 만약 엘릭이 본격적으로 ‘서전’을 시작한다면, 사그나드도 즉각 대응하려 들 거예요.”
엘릭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작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체였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저쪽은 이쪽보다 수십 배는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약점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폭풍처럼 휘몰아쳐야만 한다.
저쪽에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폭풍처럼.
그리고 그런 폭풍이 끝났을 때. 저들이 믿고 있던 수장의 머리가 날아가고, 전세는 온통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럽게 변해있어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저들에게 있어 강점에 해당했던 부분이 단박에 약점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보입니다.”
그때, 찾아온 아테의 보고에 따라,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점박이를 몰아 선두로 나섰다.
점박이는 분명 군마(軍馬)로 키워진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무거운 전장에서도 별달리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걸 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메피는 모를 겁니다. 제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를.]
그리고 그건 점박이만큼이나 엘릭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무리 흑의 설원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고 해도, 전장이 주는 압박감은 다른 법이었다.
오죽하면 마법사 중에 심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은 공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졸도하는 이들까지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건 엘릭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절대 전쟁을 허투루 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엘릭은 전쟁이 주는 참혹함을 잘 알고 있었다.
마도명문이라 불리던 가문이 결국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지 못해 이 꼴이 나지 않았었나.
그런데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드디어 세상에다 가문의 깃발을 높이 세울 수 있다는 것!
그것만 해도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적들로 온통 사방을 둘러싸인 곳에 메르빙거의 깃발이 우뚝 서 있는 것이야말로, 그가 그동안 가장 바라고 바라던. 그리고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엘릭은 바로 그 순간을 조상들이 물려준 ‘겨울’과 함께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청사자로서 배운 것들도 함께!
“【무장】.”
엘릭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별의 종군에서부터 요새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나가면서 언령 마법을 외웠다.
잠들어있던 마력회로가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심안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요새 전체를 뒤덮었다. 요새 위에 있는 병사들의 기척이 하나둘씩 감지되었다.
“저게 뭐야?”
“사람?”
“왜 혼자 오는 거지? 사절? 뭐, 그런 건가?”
“하지만 백기를 들고 있지는 않은데? 보통 사절이면 무슨 신호라도 들고 있기 마련이잖아?”
“자살 희망자인가? 미친놈이로군!”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쓸데없는 짓 못 하게 막아야지. 화살이나 쏴! 그럼 알아서 꺼지겠지.”
아귀감도 한창 예민해졌기 때문일까?
저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마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를 내쫓기 위해 이래저래 어수선하게 굴었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자신에게 손톱만 한 상처도 낼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감각을 좀 더 예민하게 다뤘다.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세밀하게.
그리고 더 깊숙하게 감각을 집중시킨 순간.
‘찾았다.’
안쪽에서 강인한 기파를 간직한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릭은 그가 이사벨이 말한 ‘클레이모어’ 사그나드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전에 따르면 그부터 가장 먼저 처치하거나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기척만 느껴봤을 때는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지도 않지.’
엘릭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개방】.”
콰아아-
휘휘휘!
그 순간, 잠들어있던 강대한 마력 폭풍이 깨어나면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동계의 인장을 획득하고, 마력회로를 생성하며, 오토 한으로부터 두 개의 권능까지 얻은 지금.
그는 푸른 매로부터 <보라매의 기상>과 관련된 기예들을 습득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마력을 다루는 솜씨 역시도 일취월장했기에.
이제 흑의 설원을 나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으니.
쿠쿠쿠쿠…!
단순히 마력을 개방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요새가 위아래로 들썩일 정도였다.
그제야 성벽 위의 병사들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몰아쳐서】, 【부서뜨려라】.”
콰아아아-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겨울 폭풍’이 일어났다.
* * *
케트라인 요새.
중심부, 회의실.
오랫동안 적사자의 왼팔을 자처해왔던 사그나드는 부관이 올린 보고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노골적으로 진군을 하고 있다고?”
“예.”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조금 전, 메르빙거의 깃발을 높이 든 부대가 요새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있었다고 했다.
숫자는 대략 일백 남짓.
도저히 요새를 공략한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적은 숫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정찰이나 수색을 하러 움직인다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너무 노골적이고, 빨랐다.
미끼 부대라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명색이 ‘마도명문’이 되는 곳의 깃발을 든 부대가 미끼가 된다는 건… 제국 측에서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님 양동 작전?”
그러다 사그나드는 생각이 미치는 점이 있어 눈을 차갑게 빛냈다.
“그렇군. 양동 작전이로군. 그런 게 아니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우리의 시선을 메르빙거의 깃발 쪽으로 잡아당기려는 속셈인 게 분명해.”
어찌 보면 사그나드의 생각이 정론이라 할 수 있었다.
일천 명도 안 되는 숫자로 설마 그들과 같은 요새를 공격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더러운 제국 놈들. 내 어떻게든 너희들의 콧대를 짓뭉개 놓고야 말리라…!”
사그나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가 적사자 윈즈 변경백을 주군으로 모신지 어언 20여 년.
그동안 주군이 얼마나 황실에 충성을 바치고 살아왔는지를 잘 알기에. 주어진 의무와 사명을 다하고자 밤낮 가리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를 잘 알기에. 제국에 대한 반감이 아주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차에 토벌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메르빙거의 깃발을 단 소수 부대를 보내는 것으로.
이제 곧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질 게 불에 보듯 뻔한 일.
사그나드는 더더욱 전의를 불살랐다.
“분명히 이 근방에 제국군의 다른 군단이 다른 길목으로 이동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걸 어떻게든 찾아라.”
“복명.”
부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나가는 사이, 이번엔 다른 부관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메르빙거의 깃발이 요새 앞까지 접근해왔습니다.”
“뭐? 벌써?”
사그나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거리도 있을 텐데… 대체 행군하는데 얼마나 속보를 한 건지.
“그런데, 그것이….”
“뭐냐? 다른 무슨 문제라도 있나?”
사그나드는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부관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부관은 사그나드가 보고를 누락시키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해야만 했다.
“저쪽에서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사절? 뭐라고?”
순간, 부관이 눈치를 살피면서 겨우 대답했다.
“항복하라는….”
“뭔 그딴 개 같은 소리를 듣고 있단 말이냐! 설마 사절을 그냥 내보낸 건 아니겠지?”
쾅!
사그나드가 탁상을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청난 기백이 회의실 가득 소용돌이쳤다.
부관은 허리를 쭈뼛 세웠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것인데…! 사그나드는 적사자가의 기사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다혈질로 유명한 사람. 그러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화, 확성 마법으로 한 짓이라 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
사그나드는 당장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적들을 짓밟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주군께서는 그에게 케트라인 요새를 맡기면서 신신당부를 하셨다.
절대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고.
참을성을 기른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적들이 어떤 개수작을 부려도 병사들에게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화아악!
사그나드는 갑자기 등골을 따라 오싹하게 감도는 느낌에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고.
곧 창문 너머로 사람 몸뚱이보다도 훨씬 큰 우박이… 하늘을 빼곡히 물들이며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권능.
한설(寒雪)이었다.
콰콰콰쾅!
우르르르-
쩌적, 쩌저저적-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