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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66화 (165/405)

166화

별의 종군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니까?”

“오오!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뭘 어떡하긴…! 당연히!”

“당연히?”

“도망쳤지! 젠장! 거기서 그런 놈을 어떻게 이겨? 괜히 내 머리만 깨지지.”

“난 또 뭐라고. 푸하핫! 술이나 한잔 더 마시라고!”

술은 때로 이성을 마비시켜 사고를 일으키는 원흉이기도 하지만, 서먹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이완시키는 마법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러했다.

밤새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엘릭은 처음으로 ‘별의 종군’에 속한 멤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씩 알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저마다 가슴 속에 다양한 사연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강한 야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공작 전하. 제가 한 잔 따라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시겠습니까?”

엘릭은 얼큰하게 취해 비틀대면서도 눈빛만큼은 또렷한 브라이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언은 활짝 웃더니 엘릭이 내민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랐다.

“이거, 저희 고향에서만 담그는 술입니다. 햇볕이 워낙에 따가운 고향이라, 포도도 아주 상품이어서 맛이 무척 깊을 겁니다. 원래는 따로 보관하던 것인데, 날이 날이니만큼 따봤습니다.”

또르륵-

글라스에 채워지는 와인의 색이 제법 진해 보였다.

엘릭은 가볍게 향을 맡다가 글라스에 입을 가져갔다. 눈이 절로 번뜩 뜨였다. 맛있었다.

“흐흐. 괜찮지 않습니까?”

“술은 잘 모르지만, 이건 맛있네요.”

엘릭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크롬헬 황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주당인 그는 벌써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나도 한 잔 줄 수 있겠소?”

“제, 제가 전하께… 어찌 감히…!”

“음! 이곳에 있으면서 다들 친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

“아, 아닙니다! 드리겠습니다!”

관료 사회에 있었던 브라이언에게 황족은 일반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지만, 크롬헬 황자는 그런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황자들 중에서도 가장 소탈한 성격을 자랑한다더니. 그게 무슨 뜻인지를 잘 알 것 같았다.

“오! 정말 맛있군. 산아티고의 포도요?”

“그, 그렇습니다!”

“그것도 21년대에 담근 것이로군. 그해에 비가 적게 내려서 다른 농작물은 흉년이었는데, 포도만큼은 당도가 아주 높았다고 들었지. 아주 맛이 훌륭했소. 고맙소.”

브라이언은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고향을 짚어낼 뿐만 아니라, 빈티지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크롬헬 황자의 깊은 지식과 교양에 탄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황자의 고맙다는 말만으로도 이미 모든 보상을 받은 것처럼 크게 기뻐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동료들을 불러 모으는 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엘릭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크롬헬 황자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기꾼.”

“음? 어찌 그렇게 말하나? 나의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그런….”

“병 밑에 붙어 있는 라벨 봤지?”

“흠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라벨에 아예 대놓고 ‘San’이라고 적혀있던데. 브라이언은 취해서 그걸 눈치 못 챈 모양이고.”

“후후.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려는 황자의 노력이라고 해두지.”

엘릭은 크롬헬 황자를 어이없다는 투로 보면서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크롬헬 황자가 이렇게 분위기를 만들어준 덕분에 자신도 멤버들과 급속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이를 계기로 굳이 신비감 같은 무언가가 없이도 충분히 사람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어쩐지 사람의 ‘그릇’이라는 게 무엇인지 보이는 것도 같았다.

‘태어나길 황자라 그런가. 타인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해. 아니면 그쪽으로 그릇이 넓은 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비슷한 나이대라도 그에게서 배울 게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보다.”

그러다 크롬헬 황자가 나무 기둥에 등을 뗀 채로 슬쩍 운을 뗐다.

여전히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달랐다.

그런 생각에 엘릭은 여전히 시선은 떠들썩한 멤버들에게 두면서도, 정신만큼은 또렷하게 날을 세웠다.

마력을 살짝 돌리니 취기가 확 달아났다.

“이제 어쩔 텐가? 도와줄까?”

크롬헬 황자는 어느새 글라스에서 맥주잔으로 잔을 바꾸면서 물었다.

주어나 목적어를 모두 생략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앞으로 엘릭에 대한 제라이츠 황태자의 적의는 계속 날을 드러낼 터. 위험한 곳으로만 그를 내돌리려 할지도 몰랐다.

원한다면 자신이 그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크롬헬 황자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가가 제라이츠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다지만, 크롬헬 황자의 세력도 절대 그에 못지않으니까.

아마 크롬헬 황자가 직접 나서준다면 제라이츠 황태자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니.”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딘가에 묶이는 건 싫어서.”

크롬헬 황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결국 공식적으로 그의 진영에 들어간다는 뜻.

이미 지금쯤 제라이츠 황태자를 비롯해 여러 중앙 귀족들이 엘릭과 크롬헬 황자 간의 친분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히 친(親) 4황자 파로 분류되는 것과, 완전히 가신이 되는 것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엘릭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 얽매여 살았던 건 여태껏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황실의 시끄러운 분쟁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친구하자며? 친구는 어디까지나 서로 도울 수 있는,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지, 한쪽이 종속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크롬헬 황자라는 골 때리면서도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다행히 크롬헬 황자는 엘릭의 거절이 그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

탁!

크롬헬 황자는 거의 다 비다시피한 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은 집요하네. 그리고 욕심이 많지. 속이 아주 좁은 게 흠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건 얻고 싫은 건 내쳐.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유리하게 포장하는 솜씨가 아주 기가 막히지.”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제라이츠 황태자를 놀려먹기는 했어도, 후궁 소생인 그가 지금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엄청난 수완가란 뜻이었다.

“앞으로 많이 위험해질 거라네. 건승을 기원하지. 물론, 나 역시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도울 테지만.”

“나 역시.”

크롬헬 황자는 주먹을 내밀었고, 엘릭도 거기에 주먹을 맞부딪쳤다.

서로의 승리를 기원하는 친구 간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대본영에서 메르빙거 숙영지로 정식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서가.

* * *

“이런 미친 것들이…! 아직 여독을 풀지도 못했는데 이딴 짓을!”

이튿날, 헤르만은 엘릭을 부른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친동생인 파울 바일과 대립할 때에도 최대한 침착한 면모를 잃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으니까.

메르빙거 앞으로 진군 명령서가 하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고작 수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전력이 대치하는 상황이라, 한창 전운이 감돌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격적인 개전(開戰)이 이루어진 것은 아직 아니었다.

토벌군의 소집이 아직 덜 끝난 데다가, 어째서인지 윈즈 변경주에서도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르만은 그동안 아직 오합지졸에 불과한 별의 종군을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군대로 변모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군이라니!

그들이 아주 먼 거리를 행군한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열흘 이상은 휴식 기간을 내어줘야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첫 전투를 별의 종군에게 떠맡으라는 것은 나가뒈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아니면.

‘미끼로 삼거나…!’

문제는 대본영이 헤르만에게도 따로 명령서를 내려 별의 종군을 도와줄 수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곧 제라이츠 황태자가 윈즈 변경주의 남방을 정찰할 예정이니, 그것을 호종하라는….

누가 봐도 명백히 그들을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엘릭의 의견을 취합하여 항의라도 하러 갈 생각이었지만.

“아뇨. 명령서에 따를 생각입니다.”

“뭐? 자네, 제정신인가?”

헤르만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옆에 있던 이사벨과 라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엘릭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황태자도 제가 이 명령에 따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명령 거부를 기다리는 것일 겁니다. 그럼 그걸 거둬들이는 척하면서 다른 명령을 내리겠죠.”

명령 거부를 두 번 하기에는 엘릭도 정치적 부담감이 적잖을 테니까.

헤르만도 그제야 흥분을 멈추고, 눈빛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네를 부릴 거라는 거군?”

“예.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겉보기와 달리 정말 위험한 지역일 겁니다. 따로 함정을 파뒀을 수도 있구요.”

“그 뜻은 알겠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얼토당토않은 명령에 따르겠다고?”

“그거야말로 황태자의 허점을 찌르는 게 될 테니까요.”

“허!”

“아예 처음부터 황태자의 행패나 다름없는 명령에 제가 희생되는 듯한 이미지를 계속 쌓아놔야 앞으로 판세가 저에게 유리해집니다.”

헤르만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명령서 하나만으로 벌써 먼 미래의 일까지 그려놨던 것인가. 그저 엘릭의 머릿속이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헤르만도 머릿속이 조금씩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저와 별의 종군이 메르빙거의 깃발을 들고 화려하게 승리로 장식한다면… 그만한 선전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피식!

헤르만은 이제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자신은 있고?”

“잊으셨나 본데, 저 제국에도 단 4명밖에 없는 공작 중 한 명입니다.”

그래. 이거였다.

자신이 엘릭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이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보여도, 그 속은 아주 단단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언제나 행동으로 지켜내 보였다.

이사벨과 라셀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헤르만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넌지시 물었다.

“우리가 도와줄 건?”

“이사벨을 제게 주십시오.”

“흐! 청혼을 갑자기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이사벨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아빠!”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안다네. 당연히 농담이지. 모사로 쓸만한 머리가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황태자의 눈 밖으로 떼어놓을 필요도 있고.”

아마 전투에서 맹활약은 엘릭이 벌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엘릭을 대신해서 별의 종군을 지휘할 만한 부관이 필요했다. 이사벨만 한 사람이 없었다.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헤르만의 미소가 커졌다.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어제에 이어 오늘 또 엿을 드시게 생겼군. 그것도 큼지막하게, 두 개나 말이지.”

헤르만에게 황태자를 호종하라는 말은 이사벨을 곁에 두겠다는 뜻이었을 테지만, 엘릭과 헤르만은 전혀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사벨도 엘릭을 따라가는 것에 크게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머리가 있어도 팔다리가 제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말짱 꽝인 법. 중간급 장교나 부사관들도 같이 붙여주지.”

“감사합니다.”

엘릭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이런 배려는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고맙긴.”

헤르만은 손사래를 쳤다.

“자네가 본 가에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차대 청사자가 되겠다면, 패배란 있을 수 없지 않겠나?”

말을 꺼내는 내내.

헤르만의 두 눈은 사자처럼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엘릭도 마찬가지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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