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패전 혹은 승전
엘릭은 더 이상 항변하기를 포기했다.
여기서 더 뭐라고 해봤자, 어차피 메피스토는 단순히 변명으로 여길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저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어떠하냐?』
그러다 메피스토는 더 이상 엘릭을 자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제야 웃음을 뚝 그쳤다.
물론,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심지어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당연한 말이지만, 사념체에 눈물이 맺힐 리는 없으니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일 게 분명했다.
『저런 강단 있는 여자, 쉽게 보기 힘들 텐데? 너도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저 여자의 마음을 알고 있을 테고.』
[말씀드렸지만 그런 거 신경 쓸 여유 없습니다.]
『생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데 막상 하려니까 두려운 거겠지. 핑계는.』
[…좀 닥쳐줄래요?]
엘릭은 이대로 메피스토와 계속 대화를 나누다가는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펴질 줄 모르는 제라이츠 황태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 뒤에 과연 소문이 어떻게 퍼질까?
그리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엘릭은 내심 그게 궁금했다.
* * *
제라이츠 황태자와 대본영은 군영의 동쪽 지역을 바일 가문의 숙영지로 내주었다.
비교적 윈즈 변경주와 가까워 적의 움직임이 발각되었을 때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였다.
‘이번 전쟁에서 된통 당해보란 뜻이겠지. 너무 노골적이라서 오히려 웃긴단 말이지.’
엘릭은 숙영지가 빠르게 건설되는 것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전부 제라이츠 황태자의 짓이라는 것이 너무 잘 보였으니까.
물론, 이런 사실을 따져봤자, 대본영에서는 자신들의 전략적인 판단하에 그렇게 배치를 했을 뿐이라고 하겠지만… 글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뜻을 모르는 게 이상했다.
이미 군영 내에는 엘릭과 이사벨의 관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스캔들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직접 옛 연인을 만나러 갔다가, 된서리를 맞아 표정 관리조차 하지 못했다는 소문까지도.
뒤늦게 감찰4국에서 나서서 스캔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황태자의 추문이 퍼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오히려 진정시키려 하면 더더욱 크게 활활 타오르는 법이었다.
황태자에게 찍힐 것이 두려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도, 암암리에 스캔들을 접하고 재미있어할 테지. 원래 이런 내용일수록 사람들이 더 흥미를 느끼는 법이니까. 그리고 스캔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제라이츠 황태자의 속에서는 열불이 날 테고.
덕분에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원래는 바일 가문을 대본영 근처에다 두고, 나를 이쪽에다 배치해서 차츰 거리감을 두게 하려는 개수작을 부리려 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는 안 되지?’
이사벨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제라이츠 황태자로서는 조바심을 느낀 나머지 엘릭을 어떻게든 바일 가문에서부터 떨어뜨리려 했겠지만.
엘릭도 이미 그쯤은 예상했기 때문에 이사벨이 이런 스캔들을 제안했을 때 승낙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위험한 전장만 쏙쏙 골라서 계속 그들을 내보내지 않을까?
엘릭은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추하다, 추해. 어떻게 겨우 저런 게 제국의 차대 지도자라고 있는 건지.’
엘릭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봐왔던 바일 가문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가 아주 단단했다. 아무리 위험한 지역으로 내돌린다고 해도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크게 흔들릴 일은 없으리라.
자신은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부터가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손해 볼 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라이츠 황태자의 방해를 계속 꺾으면 꺾을수록 자신의 명성도 계속 올라갈 게 분명했다.
괜히 가문의 기치를 내건 게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인데.’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메르빙거 숙영지 쪽을 봤다.
그곳에는 많은 젊은이가 다 함께 철골을 세우고, 막사를 덮는 등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어어!”
“거기 똑바로 세워! 무너질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여길 이렇게 할까요?”
“줄 세게 잡아당겨! 깃발을 세워둘 여유 공간도 확보하고!”
“야! 뭘 하는 거야!”
마치 시장 한복판에 온 것처럼 시끄럽기만 하다. 익숙하게 숙영지를 건설 중인 바일 가문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위계질서는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군 내내 이탈할 사람은 이탈하고, 주도권을 잡을 사람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저들끼리 벌써 질서를 어느 정도 확립해둔 것이다.
엘릭은 그동안 ‘별의 종군’이라고 불리는 이들 무리에 크게 개입하지도, 딱히 그들과 친분을 다지지도 않았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신비감과 패기 넘치는 행보에 홀려 따라온 이들.
그렇다면 이렇다 할 명확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지금은 아직 그 신비감을 거둬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계속 거리감을 둔다면 너무 멀어지기만 할 것 같아 적절하게 조절은 하고 있었다.
현재 ‘별의 종군’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이 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설치를 해야만 하오. 중앙 기둥이 단단하지 못하면 지붕이 내려앉을 것이고, 막사의 천에다 방염을 해두지 않는다면 기습이 벌어졌을 때 불이 옮겨붙기 쉬우니 당장은 손이 많이 가서 귀찮더라도 해두도록 하시오.”
한 명은 엘릭도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브라이언. 마도사 자격증명시험에서 시험관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 그가 별의 종군에 가입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브라이언도 조금 계면쩍어하면서도 가입한 이유에 대해서 담담한 어투로 술회했다.
평상시 마도명문에 대해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나?
친부가 30여 년 전의 대마전쟁에서 죽을 뻔했던 것을, 별의 마도사께서 직접 구해주신 적이 있어 누누이 친부에게서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다.
브라이언은 젊은 나이에 5급 행정관을 지냈을 정도로 뛰어난 엘리트였기에 별의 종군 내에서도 빠르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조직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절차와 과정보다는 효과와 효율을 따져서 명령의 하달에 있어 불필요한 요소는 거침없이 제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조직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멤버를 대상으로 필요한 것들을 따로 교육까지 해주니, 어느새 별의 종군도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농땡이를 피우면 어떻게 하나? 이럴 거면 그냥 꺼져.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욕과 사기 떨어뜨리지 말고.”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무임승차를 하려던 이들을 콕콕 집어내 크게 혼을 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네가 뭐냐며 따지고 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한 판 붙어볼 생각이라면 붙어보자는 투였다.
이름은 아테.
과거 불행의 신이 직접 저주를 내렸다는 신화 속 인물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그는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풍기는 위압감이 작지 않았다.
브라이언 정도는 되어야 거기에 맞설 수 있을까? 그래서 멤버 중 상당수가 그의 위압감에 주눅이 들어 다녀야만 했다. 덕분에 기강이 빠르게 잡히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참모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는 실질적인 리더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브라이언과 아테 덕분에 별의 종군은 겉보기엔 기강과 체계라고는 전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오합지졸로 보여도 어느 정도 기틀은 잡혀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틀일 뿐.
당장 이들을 데리고 전투에 나서기엔 부족한 면이 많았다.
‘아직 완전히 체제를 갖추지 않았고, 멤버들 사이에 신뢰 같은 것도 없으니까. 이대로 데리고 다녀봤자 피해만 커질 뿐이야.’
빠른 시간 내에 조직을 완전히 갖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이대로 전투를 몇 번 거치게 하는 것이긴 했다.
그렇다 보면 나가떨어질 사람은 알아서 나가떨어질 테고, 남은 사람들끼리는 사선을 넘나들면서 생긴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날 테니까.
하지만 엘릭은 굳이 그런 방식으로 피해자를 내면서까지 이들을 데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엘릭이 깊은 고민에 잠기고 있을 무렵.
‘음?’
엘릭은 숙영지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엘릭 메르빙거, 나의 소중한 친구!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아주 반가우이.”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긴 사내가 몇 안 되는 호위 병력을 데리고 이곳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반가운 듯 크게 인사를 건넨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 순간, 별의 종군 멤버들은 크게 놀라며 좌우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
“저, 저 사람은…?”
“흑사자! 크롬헬 황자님이 나타나셨다!”
“허…! 두 분이 이미 지난 암살미수 사건을 계기로 교분을 나눴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정도일 줄이야!”
멤버들은 모두 선망에 찬 시선으로 크롬헬 황자가 엘릭에게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 대부분이 엘릭을 추종하듯, 크롬헬 황자도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신성(新星)’이란 존재들이 젊은 세대에게 주는 영향력과 파급력이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자네가 원래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황태자 형님 앞에서 직접 그런 골 때리는 짓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 뭔가! 하하하!”
크롬헬 황자는 양팔을 크게 뻗으며 엘릭과 포옹했다. 그는 정말이지 엘릭과 만나게 된 것이 즐거운 듯 보였다.
반면에 엘릭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를 갖추더니 지금은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았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내색하진 않으려 했다. 어쨌거나 그는 현재 황실에서 가장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였으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음? 왜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구나. 낯설군. 우리 친구가 되기로 하지 않았었나?”
‘아. 이래서 말을 놓은 거였군.’
엘릭은 어쩐지 4황자가 아닌 ‘크롬헬’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는 눈이 많잖습니까.”
“그래서 지금 공과 사를 구분하겠다고? 그런 사람이 태자 형님 앞에서는 그렇게 했나? 흐흐.”
아무래도 말로는 그를 당해내지 못할 성 싶었다.
“그런… 가?”
“그럼. 여기는 공식 석상도 아닌데 굳이 예를 갖춰서 뭣하나.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네를 따라서 전장에 온 것이라며? 그럼 자네의 친구라 할 수 있으니, 내게도 친구라 할 수 있겠지.”
크롬헬 황자는 별의 종군을 훑어보면서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리고 친구가 되었으면 즐겁게 인사라도 나눠야 할 테고 말이야.”
짜악!
크롬헬 황자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갑자기 숙영지 안쪽으로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저마다 사람 몸통보다 더 큰 오크통을 하나씩 들고 들어오는 병사들.
멤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크롬헬 황자의 미소가 더 커졌다.
“다들 바쁜 건 알지만, 하던 거 잠시만 멈추고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세.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런 거라도 마셔야 피로가 확 풀리지. 안 그래?”
멤버들은 선망의 대상이 직접 술을 내어준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저마다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크롬헬 황자가 슬쩍 던져온 질문에 엘릭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가 직접 이리 몸소 찾아왔는지, 그리고 과장되게 반가워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엘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격려를 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황태자에게 경고도 할 겸, 자기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려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고맙긴 고마운데?’
이렇게 세세히 신경 써준 마음이 고마운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그만의 용인술(用人術)인지도 몰랐다. 이런 건 배워도 좋을 것 같았다.
엘릭은 크롬헬 황자의 맞은편에 철퍼덕 주저앉아 다들 잠시 쉬었다가 일하자고 말했다.
곧 메르빙거의 숙영지가 떠들썩해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