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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64화 (163/405)

164화

보라매의 기상

“태자 전하… 께서 직접 이렇게 환대를 해주시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헤르만은 순간 말을 흐릴 뻔했다. 그리고 헛웃음을 흘리면서 제라이츠 황태자를 봐야만 했다.

이번 전쟁은 황태자와 그를 지지하는 감찰4국이 직접 주도한 것. 그들이 그동안 뒤쫓던 마족 잔존 세력의 뒷배경에 적사자가 있다고 지목하면서 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제라이츠 황태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번 전쟁에 참여할 것이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의 소집령에 응한 이상, 언젠가 그를 만날 거란 각오도 하고 있었다.

적잖게 껄끄럽겠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별하자는 생각에 만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처음부터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제라이츠 황태자가 직접 나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청양을 비롯한 기사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푸른 매는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면전에 대고 반발하는 어리석은 짓까지 저지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미워도 결국 황태자는 황태자.

제국 내 공식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굳이 적사자처럼 눈 밖에 날 이유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제라이츠 황태자의 뒤에 자리한 근위 기사단의 눈빛도 제법 매서웠고.

‘이것들 눈빛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지 않수, 형님?’

‘그러게. 확 눈깔을 뽑아버릴 수도 없고.’

‘정말이지 보는 눈만 없으면 확 뒤집어버릴 텐데.’

‘하여간 걸리기만 해봐. 우리 조카 눈에서 눈물 빼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쏙 뽑아버릴 테니까.’

푸른 매는 같이 지낸 세월이 긴 만큼, 따로 대화를 주고받지 않아도 이미 눈빛만으로도 의사를 빠르게 교환하고 있었다.

“이전에 청사자께서 저를 구해주신 은혜가 있지 않았소? 해서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이리 직접 온 것이라오. 부담 느끼지 않아도 좋소. 사실 바일 가문 내에 있었던 지난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격려도 드리고 싶었고 말이오.”

“깊은 배려 감사합니다.”

그런 불편한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제라이츠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두에 선 이들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이사벨이 보이지 않는구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이번엔 일부러 따님을 데려오지 않으신 모양이로군. 잘하시었소. 아녀자가 굳이 이런 위험한 곳까지 함께할 필요는 없지. 그렇지 않소?”

라셀과 하만 같은 이들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제라이츠 황태자의 말투가 한참 아랫사람에게나 쓸법한 하대에 가까웠던 것이다.

청사자는 제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보검이라 할 수 있는바. 아무리 황태자의 신분이 높다고 해도 저런 말투를 써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 리도 없으니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기 싸움이라니.

많은 사람의 이목이 점차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헤르만은 차분했다.

그의 눈에는 유치한 도발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딸아이도 데려왔습니다, 전하.”

“…뭐라고 하였소?”

“제 딸아이 역시 바일 가문의 소속원입니다. 그리고 제 뒤를 이어 작위를 계승을 이을 후계자이기도 하니, 제국의 신하이기도 한 셈이지요. 노블리스 오블리주. 푸른 피를 타고난 귀족으로서 당연히 그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잇는 내내. 헤르만의 눈빛은 고요했다.

“거기에 성별의 구분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 소신의 소견입니다, 전하.”

“….”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이 살짝 빛을 발했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억지 미소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소? 내 생각이 많이 짧았구려. 하면 영애께서는 어디 계시오? 오랜만에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데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께서 찾아오시었으면 응당 직접 나와서 영접하는 게 도리일 텐데…. 이건 제가 딸아이의 교육을 잘못시킨 탓입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메르빙거 가주와 같이 있는 걸 보았었는데.”

“메르… 빙거 가주와…?”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은 이제 불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

‘푸하하핫!’

‘우리 큰형님… 요즘 들어 점점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

‘저저, 황태자 얼굴 봐라. 시뻘겋게 변한 게 꼭 잘 익은 홍당무 같네. 하하핫!’

‘아니, 옛날에 지가 걷어찬 연인한테 미련은 왜 자꾸 가지는 거야? 하여간 추하기는.’

옆에 있던 푸른 매는 몇 번이나 터지려던 웃음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특히 하만은 표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할 정도였다. 귓가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평상시에는 점잖은 척 굴던 큰형이 저런 식으로 황태자에게 아주 큰 엿을 먹이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이만한 볼거리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뭣들 하는 거냐, 이사벨과 메르빙거 가주를 찾아오지 않고!”

“예!”

“보, 복명!”

헤르만은 혹시 아우들이 실수라도 할까 싶어 다그치는 척하면서 다른 곳으로 내보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선두 행렬의 뒤쪽에 있던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엘릭과 이사벨이 황급히 밖으로 나오면서 제라이츠 황태자 쪽으로 예를 갖췄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을 벌였던 건지, 엘릭과 이사벨의 옷매무새는 황급히 정돈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이사벨의 머리는 단단히 묶었어도 정갈하지 못해 살짝 흐트러진 것이 역력하게 보였으니.

“…!”

“…!”

“…!”

황실 측 사람들이며 바일 가의 기사들까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할 말을 잃어야만 했고.

그 순간.

제라이츠 황태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의 목덜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키스 마크가 찍혀 있었으니까.

* * *

‘…이게 무슨 일이냐.’

엘릭은 이쪽으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보면서 계면쩍게 볼을 긁적여야만 했다.

『푸하하핫! 하하핫! 하하하하핫!』

메피스토는 뭐가 그리도 재미난 지, 배꼽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바빴다.

나중에는 그걸로도 모자랐던지, 주먹으로 몇 번이나 지면을 두들기고서야 간신히 웃음을 그쳤다.

『네놈이 이런 식으로 장가를 가게 되었구나!』

[저 가문 일으킬 때까지 연애도 생각 없다니까요?]

『이런 일을 벌이고도? 소문이 장난 아니게 퍼져 나갈 텐데. 특히 이런 추문에 가까운 건 이 시대의 분위기로 봐서는 여자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고. 참 냉정한 놈이로군.』

[젠장.]

처음 제라이츠 황태자가 나타났을 때. 이사벨은 엘릭과 이번 전쟁에 대해 논의를 나누다 말고,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엘릭,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뭡니까?

-다만… 엘릭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어요.

-…?

-황태자 전하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이사벨이 더 이상 제라이츠 황태자와 엮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엘릭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래전에는 약혼을 맺었던 사이이기도 했으나, 당시 이사벨은 그에게 크게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었다. 그저 귀족으로서 의무나 다름없는 정략결혼이니 부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던 정도였을 뿐.

하지만 파혼은 생각보다 그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그녀를 버린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불쌍하다, 가련하다, 안타깝다… 그런 동정 어린 세간의 시선이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었다.

추문은 분명히 제라이츠 황태자에게도 똑같이 전해졌지만, 그의 명예를 더럽히지는 못했다. 황태자라는 신분적 이유만으로.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계속 추문이 따라붙었고, ‘꽃처럼 아름다우나 향기를 품지 못했다’며 뒤에서 손가락질까지 당해야만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교계의 입방아에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나 불쾌했다. 정말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그녀를 자꾸 불쌍하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사벨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일만 묵묵히 잘하다 보면 알아서 소문도 싹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일에 매진해가면서까지 황태자를 잊으려 애쓴다’거나 ‘슬픔을 잊고자 일부러 저런다’는 오명까지 따라붙으니 심중에 화가 잔뜩 쌓였다.

그런데도 이런 일들을 벌인 원흉인 제라이츠 황태자는 정작 사과는커녕 도리어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니.

정녕 자신은 그저 꽃이니 인형이니 하는 장식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그걸 부수고 싶었다.

그냥 더러운 추문과 오명을 잔뜩 뒤집어쓰더라도, 제라이츠 황태자와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놓고 싶었다.

이사벨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런 일을 겪으며 흉중에 쌓인 갑갑한 마음을 엘릭에게 털어놓았었고.

엘릭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도 제라이츠 황태자와 그리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지나가듯이 흘렸던 말을, 이사벨은 용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꺼냈던 것이다.

엘릭으로서는 ‘친구’인 이사벨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리고 제라이츠 황태자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도와주겠다고 대답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분장까지 한 상태로 마차에서 나와버렸으니 이제 소문 한번 거지 같이 나겠군.’

자고로 귀족만큼 아무 생산성 없이 이 말 저 말을 옮기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집단도 없으니까. 오죽하면 사교계가 생겼겠나.

‘그래도 저렇게 망가진 얼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엘릭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제라이츠 황태자의 낯짝을 보고 있노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사실 엘릭도 당황한 나머지 조금 얼이 빠져있는 것일 뿐. 따지자면 이번 일은 그에게도 나름의 이점이 있었다.

요즘 들어 그에게 쓸데없이 날아들던 사교계 초대장이나 정식 청혼서 등을 쳐낼 명분이 될 테니까.

『면상을 보아하니 좋은 쪽으로 계속 생각을 환기하고 있는 것 같다만. 그래도 덥석 목덜미에다 키스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그때 표정이… 이랬었지?』

메피스토는 자신이 봤던 엘릭의 표정을 더욱 과장하여 흉내 내면서 놀리기 바빴다.

얼이 잔뜩 빠진 모습.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멍청해 보일 수 있나 싶었다.

[…안 그랬거든요?]

『안 그러긴. 딱 이랬거늘. 마치 여자에게 안긴 게 이번이 처음인 듯한… 음?』

[….]

『그랬군. 그런 거였군.』

[…아니거든요?]

『그랬던 거였어. 푸하하하!』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잘난 척 떠들어대더니! 메르빙거 가주가 모태솔로라니! 20대 중반이 되도록 여자 손도 못 잡아본 연애 고자였다니! 하하하하핫!』

[아니라구요!]

메피스토는 엘릭이 뭐라고 항의하든 간에 배꼽이 빠져라 더 크게 웃어댔다. 설산왕 때는 그렇게 자신을 비웃어대더니, 저놈은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가 아닌가!

가문을 일으킬 때까지 연애나 결혼은 전혀 관심도 없다더니, 사실은 그럴 엄두조차 못 내던 거였다.

[젠장! 아카데미에서 공부만 죽어라 팠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밥 먹는 시간도 아껴야 하는데! 고향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저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 많았…!]

『푸하하하핫!』

[내 말 들으라고, 이 M자 탈모 마왕아!]

엘릭은 아예 언령을 걸어 메피스토를 굴리기까지 했지만.

메피스토의 경박한 웃음소리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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