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보라매의 기상
숙영지를 나오는 동안.
청양의 기사들은 저마다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이래서는 청양 단장님의 생각이…!”
“어. 바뀌지 않겠지.”
“정말이지, 저런 성격 때문에 우리가 존경하고 의지하긴 한다지만… 어떨 때는 진짜 속 터진다니까.”
기사들은 하나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면 답답하다 할 수 있는 카나타의 성격 때문에 머리가 많이 아파진 것이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기사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섣불리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 같아서는 카타나를 밀고 싶었지만, 막상 본인의 의지가 저리 확고하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엘릭을 차대 주군으로 모시기에는 찝찝한 면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직 엘릭이 그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이 없지 않은가.
반면에 카나타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우선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그 안에 카나타 님이나 헤르만 님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니. 푸른 매 분들의 의사도 넌지시 물어봐야 할 테고.”
애당초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시위나 파업을 한다는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 전혀 담아두지 않았다.
이미 파울 바일의 사건 때문에 그들의 입지는 한없이 위태로운 상태. 괜히 헤르만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밤새 기사들의 한숨 소리만 커졌다.
* * *
한편, 그 시각.
이사벨은 헤르만과 대면하고 있었다.
헤르만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사벨의 얼굴에는 피로가 잔뜩 묻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인 것 같구나.”
“뭐가요?”
“뭐긴. 엘릭의 일이지. 아무래도 <보라매의 기상>에 좀 더 빨리 접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피곤함이 묻어 있던 이사벨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번졌다.
“그 정도란 말씀이세요?”
헤르만을 비롯해 푸른 매가 <보라매의 기상>을 단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과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무도에 있어서도 엘릭이 그만큼 높은 수준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헤르만 등이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던 건, 6할 이상이 해석을 위해서였다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이해력이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탁월하게 좋아. 근질도 아주 뛰어나고. 원래 메르빙거의 혈통이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뛰어나군.”
과거, 메르빙거의 가문 내에는 혈통에 걸맞은 쟁쟁한 인재들이 워낙 많은 나머지, 일찌감치 마법을 접고 다른 길을 걷는 이들도 많다는 말이 심심찮게 돌고는 했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성씨를 바꾼 뒤, 제국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자들이 적잖게 있었으니.
대부분 뛰어난 모사이거나 학자였지만, 개중에는 무도가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황금사자도 메르빙거처럼 금발이었지?’
그 때문에 타오를 듯한 금발을 가지고 있으면 우성 인자를 타고난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항간에 돌기도 했다.
그만큼 메르빙거가 가지는 입지가 대단하다는 뜻이었고, 그들 가문 내에서만 전해지는 특정 형질이나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은 아직도 학계에서 번번이 제기되는 논제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엘릭은 그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히는 수준인 것 같았다.
헤르만은 이미 라셀과 하만으로부터 엘릭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상태.
그러니 그를 후계자로 점찍은 헤르만으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엘릭이야말로 <보라매의 기상>을 완성해줄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마저도 뛰어넘어 결국 황금사자를 꺾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다들 엘릭, 엘릭… 엘릭 님 노래만 부르니 뿌듯하기도 한데, 조금 속상하기도 하네요. 누구는 하루종일 서류에 파묻혀 있어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말이죠.”
이사벨은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윈즈 변경주와 관련된 사안들을 파악해두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괜히 서운했던 것이다.
“허허. 그럴 리가 있느냐. 다들 네가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다만, 눈에 잘 띄질 않아 말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을 뿐. 그래도 속으로는 모두 고마워하고 있단다.”
“됐네요. 무슨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이거 아무래도 우리 따님의 속이 적잖게 상한 것 같은데…. 그래도 엘릭이 그러더구나. 너를 좀 잘 챙겨주라고 말이다.”
헤르만의 말에 순간 이사벨의 눈이 살짝 빛났다.
“정말요? 엘릭 님이?”
“허! 이것 보게. 이 애비가 달래는 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엘릭이라고 말하니까 태도부터 완전히 달라지는구나?”
헤르만이 헛웃음을 흘리자, 이사벨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에이. 무슨 농담도 못하겠네요.”
“전혀 농담으로 안 보이던데?”
“그보다 정말 엘릭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죠? 하여간 이 땀 냄새 가득 나는 남자들 사이에서 세심한 건 엘릭 님밖에 없다니까….”
“이봐, 이봐. 이젠 아예 대놓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구나?”
헤르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엘릭과 이사벨이 잘 되었으면 하는 건 그도 의형제들과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딸아이가 파혼을 당했을 때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저대로 계속 놔두실 생각이세요?”
“뭘?”
“청양 단장이요.”
“아, 그것 말이더냐.”
“역시. 알고 계셨네요.”
이사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헤르만을 가리켜 정의롭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불굴(不屈) 혹은 의기(義氣).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지닌 존재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런 면만 가지고 있으시지는 않다는 걸.
때로는 능구렁이 같은 면도 있었다.
자신의 지략이 어디서 나왔겠나?
괜히 상가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일단 내버려 두려무나.”
“하지만….”
“불만이라는 건 쳐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결국 언젠가 폭발하고 말지. 그러니 때로는 자연스럽게 흐르게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단다. 이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엘릭과 기사들, 당사자들 간에 해결해야 할 일이지.”
헤르만은 절대 이번 일에 자신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는 또 다른 분란의 씨앗만 만들 뿐이니.
“엘릭이 본 가를 계속 품고 갈지, 아니면 그가 그려나갈 청사자의 청사진에 본 가를 배제할지는 그가 결정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걱정이 되지 않는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떠냐?”
이사벨은 푸근하게 웃는 아버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버지는 못 속이겠네요. 그럼 굳이 건드리지 않고 일단 내버려 둘게요.”
이사벨은 챙겨왔던 서류를 난로 속에다 집어 던졌다. 불이 붙으면서 서류는 단숨에 검은 재가 되었다.
헤르만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했다면, 이전 파울 바일의 사건과 같이 엮어서 가문 내 질서를 크게 정리해볼까 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사벨도 손을 쓰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실 커다란 전투를 앞두고 괜히 가문 내에 소요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만은 않을 거라는 건 알아두세요.”
“말했듯이 이 일에 나는 간섭하지 않을 예정이다만.”
“그거면 충분해요.”
또각, 또각!
이사벨은 구두 소리를 내면서 막사를 벗어났다.
헤르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나면 불만 많은 몇몇은 옷을 벗어야겠군그래.”
딸의 단호한 목소리가 무섭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헤르만은 그런 모습에서 이사벨이 한껏 더 성장한 것이 느껴져 기뻤다.
슬슬 세대교체가 이뤄지려는 모양이었다.
* * *
바일 가문의 영지를 떠난 행군이 윈즈 변경주 근방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동안 엘릭은 헤르만과 푸른 매로부터 기본기를 넘어서 그들의 무술까지 차례대로 익힐 수 있었으니.
비록 오의나 비기를 깨달을 정도는 아니어도, 형체와 초식은 전부 완전히 숙지하는 무시무시한 기염을 토해냈다.
그리고 <보라매의 기상>을 이루는 <부리>와 <발톱> 등도 조금씩 손댈 수 있었으니.
아직은 형태만 숙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그런 걸 완성했다는 사람은 대체 뭘 했던 사람인 거지? 그만한 사람이 여태 무명이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인데.’
역시 세상은 넓다.
엘릭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제국이 탄생한 이래… 아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신이 인류에게 허락한 가장 큰 힘이 빚어진다는 이 시대는 정말이지 괴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더 재미난 거겠지만.’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행군이 어느새 거대한 군영(軍營)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윈즈 변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군영의 위로 제국과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 크게 나부끼고 있었다.
토벌군의 대본영(大本營)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크고 작은 군영들이 놓여 가지각색의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그때쯤 되자, 바일 가문의 행군도 깃발을 펼치기 시작했다.
깃발은 두 개였다.
하나는 바일 가문을 상징하는 청사자의 문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책 위에 내려앉은 부엉이의 형태를 한 문장.
메르빙거의 문장이었다.
책은 지식과 마법을.
부엉이는 진리를 좇는 마법사를 의미했으니.
부엉이가 어두운 밤에 일어나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듯이, 자신들도 미지(未知)와 불합리(不合理)로 대변되는 어둠을 가르고 진리와 합리를 쫓겠다는 의지를 대변하는 문장이었다.
우스던 메르빙거가 눈을 감고, 마도명문이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겪으면서 이제는 대외적으로 잘 보이지 않게 된 문장이건만.
그것이 높게, 그리고 힘차게 펄럭이는 것이다!
“허…!”
“폐하께서 메르빙거에게도 금인칙서를 내리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이었나?”
“그런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깃발을 드러내다니. 자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요즘 한창 저 어린 가주의 이야기로 언론이 들썩이고 있지 않나? 그러니 어깨에 힘이 단단히 들어간 것이지.”
황실의 명령을 쫓아 이미 진즉 토벌군에 합류했던 귀족들이며 장교들은 영 못마땅하다는 투로 메르빙거의 깃발을 바라봤다.
그들 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혀를 끌끌 차며 비웃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최근에 이리저리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깃발을 전면에 내건다는 것은 절대 단순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가문이 지닌 역사와 전통을 앞세운다는 뜻이고, 그들의 영광을 높이 빛내겠다는 의지를 외부로 내비치는 것과 같았다.
즉, 만약 전장에서 패배하거나, 꼴사나운 행동이라도 보인다면 가문의 명예가 바닥에 곤두박질친다는 의미와도 같은데.
아직 제대로 된 전력도 갖추지 못한 메르빙거가 저렇게 나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칫 마도명문의 위신이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테니.
결국 언론이 아무리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줘도,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일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추종자랍시고 행군 뒤에 끌고 다니는 무리가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귀족들의 비웃음이 커지는 사이.
군영의 정문에서 행군을 맞이하는 인파가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청사자.”
황태자 제라이츠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