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162화 (161/405)

162화

보라매의 기상

『저놈 얼굴 좀 봐라, 얼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메피스토는 엘릭의 뛰어난 재능에 한껏 취한 하만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이게 전부 사기극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사기극이라니요.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휘휘휙-

엘릭은 엄숙한 얼굴로 창을 앞으로 한껏 내지르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제 능력입니다만?]

『하여간 메르빙거 놈들, 주둥이질도 마법만큼이나 뛰어나지. 쯧!』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여전히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속삭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좌… 로… 일… 보.」

「우… 측… 대… 각… 선.」

마치 행성이 항성 주변을 돌 듯이.

잿빛 망령이 그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아주 흐릿하게나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권능, 북풍. 그 속에 담겨있던 망자가 엘릭에게 조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발을 내디디면 좋을지.

어떤 각도로 창을 내지르면 좋을지.

파지법(把持法, 무기를 쥐는 방식)은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며, 창을 어떤 식으로 회전시키는 게 가장 위력적인지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아무래도 이 망령은 생전에 창술에 있어서 뛰어난 경지에 올랐던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분명히 어느 정도의 수준은 달성했었을 것이다. 엘릭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과 자아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망령이 이토록 세밀하게 조언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북풍에 이런 기능까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는데.’

처음 엘릭이 북풍의 이런 기능을 알게 된 건, 사흘 전에 헤르만에게서 검술 강론을 들을 무렵이었다.

당시 헤르만도 지금 하만처럼 엘릭에게 꽤 괜찮은 검술을 몰래 가르쳐주려 하고 있었다.

<검치호의 송곳니>. 헤르만이 처음 무도에 입문하면서 익혔던 검술이었다.

비록 <보라매의 기상>이나 <매의 부리>처럼 뛰어난 무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헤르만을 청사자로 만들어줄 만큼 깊이와 전통을 자랑하는 검술이었으니.

헤르만은 <검치호의 송곳니>가 엘릭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것이며, 그를 뛰어난 검의 세계로 이끌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릭 같은 천재는 모든 것을 쉽게 보고 쉽게 익히는 만큼, 그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검술이라면 분명 매료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실제로 <검치호의 송곳니>는 엘릭에게도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는 검술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 ‘이분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하셨군’이었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숙달되다 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 <강체술>을 깊이 있게 익혀온 입장이다 보니 무도에 대한 깨달음도 어느 정도 있었던바. 검술의 원리만 파악할 수 있다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검술을 시연하려는 순간, 갑자기 권능이 작동했다.

엘릭은 설마 자신도 모르게 마력 폭주라도 일어나는 건가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마력회로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망령 중 한 마리가 슬그머니 나타난 것일 뿐.

생전에 검술을 단련했던 망자는 엘릭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던져주었다.

비록 두서없이 단편적으로만 말해서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참고할 만한 게 꽤 많았다.

덕분에 엘릭은 <검치호의 송곳니>를 빠르고도 훨씬 쉽게 숙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오롯이 엘릭의 재능으로만 여긴 헤르만은 연신 감탄사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에 이어진 라셀의 강론 때에도 마찬가지.

라셀은 도(刀)에 대해서 강론을 하면서 <질주하는 폭풍>이라는 무술을 전수해주었다.

그때에는 다른 망령이 불쑥 튀어나와 조언을 던져주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엘릭은 <질주하는 폭풍>도 금세 요체를 파악해낼 수 있었다.

‘메피스토의 말이 맞았어. 오토 한이 남긴 가디언들은 절대 그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야.’

오토 한의 안가를 떠날 때, 메피스토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토 한과 함께 했던 충복들은 당대에 어찌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뿐이었다고.

엘릭은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령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완전’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일단 망령들은 제대로 된 사고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그저 파편적으로만 남아있는 일부 사념에 의존해서 말을 건네는 것일 뿐.

그렇기 때문에 당장 엘릭이 처한 상황에 대해 ‘대응법’을 가르쳐 줄 수는 있어도, 나아가 이것을 해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가령, <검치호의 송곳니>라는 검술을 익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치자.

그렇다면 망령들은 <검치호의 송곳니>에 쉽게 숙련되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도, 그 너머에 있는 오의와 정수를 파악하고 새로운 무술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목적지에 대한 지름길로만 안내할 뿐, 새로운 이정표는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이니.

물론, 이것만 해도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었기에 엘릭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이토록 많은 망령이 앞으로 계속해서 자신에게 새로운 견문을 제시해 주리라 생각하니, 탐구욕과 지식욕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쿠쿠쿠쿠…!

창을 힘껏 앞으로 내지르자, 순간 창대에서 시작된 회전력이 창날에 맺히면서 회오리로 나타났다.

미풍.

<다섯 개의 회오리>에서 첫 번째 초식을 완전히 습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허…!”

역시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하만은 엘릭의 재능이 뛰어나다며 크게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인간, 턱받이나 하나 해줘라. 저러다 침이 질질 새겠구나.』

메피스토는 네레스타의 원로원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완전히 엘릭의 포로가 되어버린 푸른 매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불쌍해 죽겠다는 듯이.

* * *

“단장님, 계속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미 언론에서는 헤르만 님의 후계자로 메르빙거 가주를 완전히 점찍은 모양새입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가 불리해집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자리는 원래 단장님의 것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외부인이 이대로 함부로 계속 활개를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

청양(靑羊).

뿔 달린 산양이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천적이 나타나도 겁을 먹지 않고 달려들 듯이.

그들은 언제나 가문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선봉에 서 있었고, 필요하다면 목숨을 내버리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파울 바일 사건이 있었을 때도, 끝까지 중립을 지키고자 했던 것도 언젠가 헤르만이 돌아올 거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르만이 입마증에서 깨어났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장 먼저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건 그들이 대개 평민이나 노예 등 한미한 출신으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헤르만이 아무런 편견도 없이 그들을 직접 거두고 검을 쥐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평생 제대로 된 부모도 없이 자랐던 그들에게 있어 헤르만은 부모이자, 스승이었으니까.

그래서 헤르만이 내리는 명령이라면, 그 어떤 부당한 것이라도 웃으면서 수행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단원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단장, 카나타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지 말라고.

어떻게든 차대 청사자의 자리를 되찾아야만 한다고.

그럴 때마다 카나타는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단원들에게 경고했었지만.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라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카나타는 파울 바일이 득세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가문 내에서 헤르만의 후계자로 점쳐지던 존재였다.

헤르만이 가신으로 가장 먼저 거둬들였던 게 바로 그였으니까.

또한, 직접 검을 사사하기도 했다.

본인도 여기에 강한 자긍심을 느꼈다. 청양의 수많은 기사 중 유일하게 <검치호의 송곳니>의 오의와 비기를 깨우친 것도 그였다.

그러니 내심 카나타 역시 본인이야말로 헤르만의 적통이며, 수제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엘릭이라는 집채만 한 바위가 굴러들어올 때까지는.

“큰일 났습니다!”

그때, 카나타와 조장들이 있는 숙영지의 문이 활짝 열렸다.

막내 조장이 숨을 헐떡이면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날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하만 님과의 교육이 끝났습니다!”

“뭐?”

“이런…!”

조장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낭패.

“전날에는 라셀 님에게서 도법을 배우지 않았었나?”

“그전에는 주군께 <검치호의 송곳니>를 배웠었지, 아마? 그것도 꽤 잘했다고 들었는데.”

“결과는? 이번 결과는 어떻게 됐지?”

막내 조장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만 님께서도 상당히 흡족한 눈치셨다고 합니다.”

“허…!”

“아무래도 푸른 매의 공동 전인(共同傳人)이 될 거란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

“….”

일순, 깊은 침묵이 흘렀다.

몇몇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사실 청양의 기사들이라고 해서 엘릭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엘릭에게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를 구해준 은인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혼란을 잠재워준 장본인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청랑, 푸른 늑대들을 단신으로 격파했을 때의 위용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으니.

얼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곳에서 망자의 군단을 이끌던 모습은 전율이 일 정도였다.

강자에 대한 존경은 바일 가문의 가풍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헤르만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존경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분위기는 분명 시기와 질투에 가까우리라.

아니, 정확하게는 불안에 가까웠다.

만약 엘릭이 청사자가 된다면, 그 이후 헤르만만을 좇아 여기까지 온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메르빙거가 청사자가(靑獅子家)가 되어버린다면, 자신들은 강 위를 떠도는 오리 알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니 바일 가문이 계속 청사자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공론이었다.

하지만.

“주군께서 내리신 결정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카나타는 이번에도 단원들의 불만과 우려를 잠재우고자 했다.

“나 역시 불안하다. 걱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주군께서 내리신 결정이다. 깊은 복안이 있으시겠지. 이 이상은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오히려 은인께서 더 이상 다른 가솔들한테 배척을 받지 않으시게끔 우리가 배려해드려도 모자랄망정…!”

조장들은 침음을 삼켰다.

“내가 다음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이 엘릭 메르빙거라고 주군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지시하신다면, 나는 응당 그 말에 따를 것이다.”

그래, 이거였다.

청양의 단원들을 비롯해 가문 내 다른 기사들까지 카나타를 진심으로 깊이 따르는 이유.

그는 단단하다.

그리고 충직하다.

그 모습이 젊은 시절에 헤르만과 너무 닮아있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그만이 헤르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겨온 이유이기도 했다.

“모두 흩어져라. 오늘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게야.”

결국 조장들은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 심기와 씁쓸해하는 분위기는 사라지질 않았으니.

결국.

숙영지에는 깊은 침묵만이 흘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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