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보라매의 기상
덜커덩-
바일 가문을 상징하는 청색 사자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청양과 청마 기사단이 호종했다.
반란이 일어난 윈즈 변경주로의 소집령에 따라, 내부 정비를 마친 바일 가문이 드디어 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사자의 부활을 알리는 행군(行軍).
그들이 마을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행군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숫자도 계속 불어났다.
백성들 사이에서 헤르만의 명성이 워낙 두텁기도 했거니와, 청사자의 행군에 함께한다고 알려진 엘릭 메르빙거를 구경 나온 이들도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메르빙거와 바일 가문의 연합은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단연 사람들의 이목을 산 것은 따로 있었으니.
“와…! 행군 하나는 정말이지 거창하구만.”
“그러게. 청사자가 이번에 치욕을 씻으려고 이를 단단히 갈았다던데. 그래서 그런가벼.”
“그런데 기사단은 그렇다 치고. 저 뒤에 있는 건 또 뭐지?”
“그러게. 해 다니는 꼴은 꼭 거렁뱅이 같아가지고… 무슨 순례라도 뛰나?”
행군의 뒤쪽에는 바일 가문과 전혀 무관한 듯한 행렬이 따로 따라붙고 있었다.
저마다 외양이나 복색도 천차만별인 사람들.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말을 타고 움직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삼삼오오 모여 마차를 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조용히 뒤에서 묵묵히 걷는 중이었으니.
그 숫자가 대략 200명 안팎으로 보여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아니, 자네 그 말 못 들었나?”
“뭘?”
“‘별의 종군(從軍)’ 말일세.”
“별의… 뭐?”
“허! 하여간 사람도 참. 무식하기는.”
“아, 시건방 그만 떨고 좀 제대로 말해봐! 그게 대체 뭔데?”
“헛험! 별의 종군이라는 건 말일세. 새로운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메르빙거 가주한테 홀딱 반해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말하는 것일세.”
“으음?”
“메르빙거 가주의 조부인 ‘별의 마도사’에서 따온 별에 그를 따라다니는 군단이라고 해서 종군. 그래서 별의 종군인 거지.”
“호오!”
엘릭은 현재 3신성과 비교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이 평가를 받는 상태.
여태 보인 행보들 자체도 파격적이었는데,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조차 워낙에 신비로운 게 많다 보니 언론도 최근에는 그만을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 기세를 빌어 그를 동경하는 사람도 많아졌을뿐더러, 마도명문이 다시 한번 도약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추종자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들 모두를 통틀어 ‘별의 종군’이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불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별명은 절대 희화화하려는 의도로 붙인 게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긍정과 기대, 환호와 찬사가 가득한 별명인 바.
그래서 실제로 엘릭의 추종자들 중에서는 그런 이름을 자긍심으로 삼는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뭐라더라? 메르빙거 가주가 제국에 충성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직접 종군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하기도 했고. 그러니 그 뜻에 감복한 이들이 저렇게 많은 게지.”
“그렇군. 역시 별의 마도사의 손자라 그런가 생각이 깊어.”
“괜히 천년도 넘게 마도명문으로 불렸겠나? 망했어도 명문은 명문이란 거지.”
“암! 저런 게 명문이지! 매번 황도에서 저들끼리 잇속 챙기기 바쁜 것들이 무슨 명문이라고. 칵, 퉤! 우리네들 인생은 버러지로만 취급하는 것들!”
엘릭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호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 속에 섞여 있던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사라진 것을.
* * *
“시건방진…!”
감찰국의 1국장, 트라이던은 인파를 헤치고 나오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엘릭 메르빙거를 향해 충신이니 명문이니 운운한 이들을 싹 다 잡아다가 감옥에 처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겠지. 제길!’
하지만 그래도 트라이던은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엘릭이 교묘한 방식으로 언론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을 한껏 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장에 복무하는 건 어디까지나 황실의 금인칙서가 내려졌기 때문이지만.
겉보기에는 마치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갸륵한 마음에 스스로 전장에 뛰어든 것으로 보이니.
언제부턴가 황실의 후광은 거둬지고, 메르빙거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회자되는 것 같았다.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바일 가문에서 저지른 것도 그리 좋은 의도는 되지 못했었지.’
역시 피는 어디 가질 않는 걸까.
역적의 씨를 품은 것들은 계속 그런 모양이었다.
별의 종군이니 뭐니 하면서 사병(私兵), 아니, 불온 집단을 만들려는 것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4국장부터 만나야겠군.”
트라이던은 웬만하면 그리 보고 싶지 않았던 정적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보라매의 기상.
헤르만은 자신과 의형제들의 숙원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했다.
다만, 여기에 덧붙인 설명은 전혀 뜻밖이었다.
“자네, 황금사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황금사자라면… 사자공가의 주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재미난 주제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군.』
여태 엘릭이 헤르만에게서 가르침을 받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던 메피스토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예전부터 ‘황금사자’에 대해서 유별나게 깊은 관심을 보이곤 했다.
아마도 현 시대의 최강자라는 엘릭의 설명 때문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그는 호승심은 여전히 짙어 보였으니까.
“사실 아는 바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더한다면 당대에 조부님과 유일하게 견줄만한 존재였다는 것 정도입니다만.”
헤르만은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마도사라… 확실히 그분이라면 그와 유일하게 견줄만하긴 하겠군. 다만, 나는 젊은 시절에 그분을 뵌 적이 없어서 뭐라고 설명을 덧붙이기는 어렵겠어.”
헤르만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황금사자, 그는 괴물이라는 거네.”
괴물.
엘릭은 어쩐지 자신의 스승인 오거스틴이 떠올랐다.
“아니. 지금 자네가 떠올린 분과 비교해도 그는 단연 압도적으로 괴물이야. 내 장담하지. 하얀 밤께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신다면 격노하실 테지만…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라네.”
“…!”
『뭐? 그 영감보다?』
엘릭과 마찬가지로 메피스토도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만큼 충격을 받았다는 뜻일 테지.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엘릭이 봤던 오거스틴은 절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황금사자가 그를 능가한다고?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나와 의제들이 황금사자를 본 것은 아주 젊은 시절이었다네. 그때도 협의니 정의니 하면서 세상천지가 다 내 세상인 양 돌아다니던 중이었지.”
헤르만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이 아닌, 아주 머나먼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헤르만은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리고 현재의 엘릭과 마찬가지로 한창 높은 명성을 자랑하고 있기도 했다.
집안도 부유하고 가진 바 재능도 뛰어났지만, 그보다 의제들과 함께 벌인 협객 놀이가 유명세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의를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이들이 있으면 어떻게든 들어주려 노력했고, 탐관오리가 발견된다면 손쓰기를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헤르만과 푸른 매의 손속이 잔인한 나머지 수십이나 되는 탐관오리들이 떼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때문에 탐관오리가 소속된 가문과 영지전을 치를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내면서 헤르만은 역전의 용사로 통하기도 했다.
현재 청사자와 바일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정의로운 이미지는 대부분은 당시에 구축된 것이었다.
아마 그날도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우연히 들렸던 산골 마을에서 헤르만과 푸른 매는 인근 숲에 근거지를 마련한 도적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놈들의 술수가 얼마나 악랄하던지, 말을 듣지 않은 마을은 학살을 자행하거나 불을 질러 쑥대밭으로 만드는 등,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공물을 요구하고 여자를 잡아가는 등,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도적단이 가진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인근의 영주들이 도적단을 토벌하고자 직접 사병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도리어 패주를 해야만 했다던가?
그 때문에 도적단의 활동 반경만 더 넓어져 이제는 영주들의 영지까지 고통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헤르만과 푸른 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도적단을 퇴치하고자 움직였으니.
문제는 바로 이때 터지고 말았다.
도적단의 전력이 헤르만과 의형제들이 예상했던 것은커녕, 외려 그들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도적단은 겉보기에만 도적 집단으로 보일 뿐. 실제로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군대의 특수부대였다.
임무에 실패해 이대로 귀환했다가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탈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적단의 수괴는 이미 제국 내에서도 보기 드문 4체인의 실력자였고, 당시 헤르만이 이룩한 경지는 3체인밖에 되지 못했으니.
결국 헤르만과 푸른 매는 계속되는 도적단의 공세를 이기지 못해 수세에 내몰리고 말았고.
죽을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지. 그 괴물이 나타난 건.”
헤르만은 당시에 자신이 보았던 게 황금색 섬광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수괴를 비롯한 도적단이 죄다 쓸려나가는 데는.
-뭐야? 이게 끝이야?
두 동강 난 시체가 즐비한 곳에서. 피 웅덩이 위에 올라선 거구의 금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2미터도 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그는 금발도 사자 갈기처럼 헝클어뜨리고 있어서 누가 봐도 ‘황금사자’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번에는 정말 날 죽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든 모양인가 보군. 제기랄. 또 헛수고야.
금발의 사내는 뭔가 탐탁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꿍얼대는 혼잣말도 무슨 뜻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들 투성이었다.
-잠깐만!
-음?
-잠깐만, 기다리시오.
-뭐냐? 구해줬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짜그라져 있을 것이지. 뭣 하러 와? 왜? 너도 저렇게 만들어주랴?
당시 헤르만은 금발의 사내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그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우들은 뒤늦게 왜 그러느냐며, 저 괴인이 허튼짓을 저지르면 어쩔 거냐는 투로 다그쳤지만. 헤르만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목 언저리까지 치밀어 오른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당신의 이름! 이름을 말씀해주시오.
-이름? 음! 나한테 그런 게 있던가? 있기도 했었는데. 뭐, 너무 오래돼서 잊어먹었어. 어차피 기억하는 놈들도 없고.
금발의 사내는 가당치도 않은 말을 잘도 지껄여댔다. 푸른 매는 세기도 센 놈이 미치기까지 했다면서 중얼거렸지만, 헤르만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그럼…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오?
-황금사자.
역시.
헤르만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국의 기둥으로 존재해왔던 사자공가의 주인이라면. 이런 괴물인 것도 말이 되었다. 외양만 보더라도 그보다 더 잘 어울릴 단어도 없을 테니.
-그럼 하나만 더 묻겠소.
-짧게 끝내. 슬슬 귀찮아지니까.
-당신을.
헤르만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잔뜩 긴장한 어투로 물었다.
-당신을 이길 만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