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바일 가문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네.”
“이건 이것대로 좀 짜증 나는데. 욕심이 많아서 마지막 저항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냥 아무것도 못 하는 머저리에 불과했어.”
들썩이는 객석들 사이로.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엘릭과 헤르만이 나누는 대화에 휩쓸려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주 적었지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기자며, 기사들이 힐끔힐끔 훔쳐볼 정도로 그녀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복색은 또 어떤가. 하나같이 허벅지 위쪽까지 트인 치마 사이로 훤히 드러난 다리는 각선미는 물론, 뛰어난 관능미를 자랑했다.
더군다나 붉고 도톰한 입술이며, 눈 아래 찍힌 점은 농염함을 한껏 더해주어 주변의 이목을 단박에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남자들은 쉽사리 그녀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평상시 자신들의 스타일에 자신감이 있던 이들조차도, 그녀들이 은연중에 흘리는 분위기를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저 아름답기만 한 외모만 지니고 있다면 이렇게 남자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그저 추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나, 이에 더해 그런 이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까지도 있었기에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저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몸을 움츠리면서 몰래 훔쳐보는 게 전부였다.
쌍둥이 자매는 그런 주변의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그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남들은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 둘만의 대화를 나눌 뿐.
“이래서야 괜한 발걸음만 하게 된 셈이잖아.”
라피스 라줄리(Lapis-Lazuli). 보석 청금석(靑金石)의 이름을 나눈 자매 중 둘째인 라줄리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지난날, 모든 일을 망치고야 만 힐튼의 목을 치고 파울이 홀로 있을 무렵. 그를 찾았던 마족이 바로 그녀였다.
라줄리가 그에게 제안했던 것은 아주 간단했다.
우리와 손을 잡자.
어차피 당신은 이대로 있다간 추락하고 만다. 승부결에서 헤르만에게 패배하거나, 어찌 운이 좋아 무승부를 이룬다 해도 결국 엘릭이 쳐둔 덫에 물려 죽거나, 혹은 손발이 잘려나가고 말 것이다.
여태 라줄리가 보고 판단한 엘릭은 절대 한 번 적으로 판단한 대상을 그냥 내버려 둘 놈이 아니었다. 대대로 메르빙거라 불렸던 작자들이 모두 그러했듯, 엘릭도 어떻게든 파울을 처치하려 들 게 분명했다.
그래서 라줄리는 파울 바일을 선택했다.
이제 모든 것을 잃게 생긴 그라면 충분히 조직 ‘그리고리’의 장기 말로 부려먹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리는 현재 감찰국에 뒤를 잡히면서 어쩔 수 없이 수면 위로 그 존재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 상태.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전에 제국을 안팎으로 크게 흔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적사자는 위기에 내몰리면서 그리고리와 완전히 손을 잡았으니.
여기에 청사자라는 새로운 패가 더해진다면, 그리고리로서는 아주 커다란 패를 두 개나 얻게 되는 셈이었다.
그만큼 제국 내에서 ‘사자’가 가지는 위상이란 아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멍청한 작자가 그런 좋은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단 말이지.’
라줄리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결과였다.
물론 파울은 당시에도 라줄리의 제안에 별 고민의 기색도 없이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는 했다.
처음 만난 작자를, 그것도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든 마족 따위를 신뢰할 수는 없다나?
하지만 그때야 갑작스럽게 받은 제안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라줄리는 생각이 바뀌게 되면 연무장에서라도 얼마든지 의사를 밝히라고 언질을 주었었다.
승부결이 시작될 때라도 좋으니,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힘은 언제든 찾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라줄리는 당연히 파울이 위기에 내몰리고 나면, 즉각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 뒤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모시는 신께서 힘을 나눠주면서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채,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들어왔던 것인데.
전부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라줄리가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는걸.”
언니 라피스는 동생 라줄리와 달리 입가에 생글생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라줄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해가 된다고?”
“그럼. 인간이란 족속들은, 특히 그중에서도 수컷이란 것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에 제 목숨을 던지기 일쑤잖니. 가문이니, 명예니 하는 것.”
“전혀 쓸데없는 것들이지.”
“그렇지. 쓸모없는 것들이지. 하지만 인간 수컷들은 그런 것에 잘도 목을 매단단 말이지? 파울 바일도 아마 그런 수컷 중 하나였을 거야.”
“우리와 손을 잡으면 가문에 누를 끼치게 되는 거니까?”
“그런 걸 수도 있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명예라도 챙기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아님 둘 다이거나?”
“뭐야, 그게? 멍청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지극히 강한 마족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인간 사회의 문화였다.
물론, 그녀들도 그리고리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는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애당초 충(忠)이니 효(孝)니, 혹은 의(義)니 하는 감정 따윈 그녀들로서는 어리석은 놀음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멍청하지. 아주 멍청하고 말고.”
라피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선혈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두 개의 동공이 각각 엘릭과 헤르만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저곳에 파울 바일만큼이나 멍청한 짓을 저지르려는 두 인간 수컷이 있었으니.
‘저들은 또 어떤 어리석은 짓거리를 해낼지 궁금하단 말이지.’
라피스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대대로 마법학의 선구자이자 마도명문이라 불리던 메르빙거의 가주가 청사자가 된다라?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앞으로 닥칠 제국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작용할는지.
벌써 재미있을 것 같았다.
* * *
“마도명문의 가주가 차대 청사자가 된다!”
“마검사가 등장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엘릭 님이 검을 쥔 건 본 적이 없으니, 마검사가 아니라 마투사(魔鬪士)겠지!”
“이거나 저거나! 하여간 마법사가 청사자라니…!”
바일 가문의 영지는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메르빙거의 영지전이 어떻게 결판이 날지부터 청사자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바일 형제의 골육상잔까지.
황도의 백성들을 궁금케 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법 여유롭다 싶은 사람들은 직접 바일 영지로 몰려들었고, 엉덩이가 무거운 중앙귀족들도 저마다 사람을 붙여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알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엘릭을 추종하며 모여든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현재 엘릭 메르빙거는 황도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이름은 황실이나 사자공가만큼이나 파급효과가 컸다.
소속 인원이 단 두 명밖에 안 되는 메르빙거가, 오래전부터 명성을 떨쳐왔던 파울 바일과 대립하게 된 이야기는 이미 언론을 통해 퍼질 대로 퍼져나가 젊은이들의 웅심에 불을 잔뜩 지펴놓았으니.
특히 엘릭이 라센트 시에서 벌인 활약과 국경수비대에서 4황자 크롬헬을 구하면서 그와 맺은 우정 이야기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 손이라도 힘을 보태겠다며 이곳에 모인 이들이 얼추 기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그저 동네에서나 거들먹거리는 수준인 한량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괜찮은 눈빛을 띠거나 기세를 풍기는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브라이언도 그런 후자에 속한 인원 중 한 명이었다.
비록 바일 가문의 허락을 받지 못해 본가로 입장하지는 못하고, 그저 영지 주변에만 대기하면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엘릭을 응원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크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청사자 제안을 받아? 뭐가 대체 어떻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브라이언은 좀처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해야 했다.
별의별 내용이 다 돌아다니고 있었다.
헤르만과 파울의 승부결.
감찰국에서 직접 황제의 전령을 자처하여 왔으나, 엘릭이 직접 나서서 그것을 대놓고 무시했다는 것.
그러고는 영지전의 대리인으로 헤르만을 선택하면서 파울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 뒤에 갑자기 헤르만이 엘릭에게 차대 청사자 직을 제안했다는 내용까지…!
그냥 듣기만 했다면 단순히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과장 섞인 무용담으로 치부했을 내용이었다.
아니면 어디 저잣거리에 나도는 3류 소설의 줄거리라고 여기거나.
하지만 그저 그런 뜬소문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엘릭이 이겼다는 것!
“어? 어어! 사람 나온다!”
“엘릭 메르빙거다!”
“청사자도 있어!”
브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면서 잘 되었다고 여기던 중에 갑자기 저택 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엘릭과 헤르만이 기사들을 잔뜩 이끌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인파가 그쪽으로 몰렸다. 영지가 단박에 시끄러워졌다.
“어? 어어? 영지전이 이렇게 끝났다고? 벌써?”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냥 해산하는 건 아니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어디까지나 명성을 날리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한편, 브라이언처럼 메르빙거의 전력이 되기를 희망하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그들 대부분이 엘릭을 도와 이름을 날리고, 혹시나 떨어질지도 모르는 콩고물을 노렸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던 것이다.
브라이언도 기세 좋게 차이프 청장 앞에서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가, 이렇게 곧바로 되돌아간다면 꼴이 말이 아니게 되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엘릭의 눈에 띄기도 어렵지 않겠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엘릭이 이쪽으로 나섰다.
그러자 브라이언을 비롯해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와 본 가를 도와주시기 위해 이렇게 먼 길을 와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엘릭은 딱히 목소리에 마력을 싣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들의 귓가에 깊숙하게 파고들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저와 본 가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곳까지 올 수 있었고, 또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릭의 시선이 사람들의 면면을 쭉 훑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응원에 보답하고, 제국과 황실에 충성을 보이고자 이번 적사자가의 반란 진압에 종군(從軍)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빠르게 주고받기 시작했다.
엘릭의 말에 감격한 이들도 있었지만, 더러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보는 이들도 있었다.
엘릭이 파울 바일에게 영지전을 걸었을 때는 그래도 헤르만이라는 커다란 보호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종군을 하게 된다면?
그런 보호 장치가 사라지게 되니,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다칠 우려만 있을 수 있었다.
『잔대가리 굴리는 놈들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어차피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배제하는 게 좋습니다. 관리도 덜 귀찮을 테구요.]
엘릭으로서도 추종자가 있다는 것이 절대 나쁜 일은 아니었다.
타샤 네레스타에게 ‘불새의 홰’가, 크롬헬 황자에게는 기사단이 있었듯이.
자신에게도 그만한 사조직이 있다면 추후 활동하는 데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어쩌면.
이 기회에 여태껏 보았던 네레스타 가나 부족 안트로모프에 버금가는 자신만의 세력을 위한 초석을 일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전에 어중이떠중이는 최대한 배제할 생각이었다.
덩치를 불린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긴. 지금은 다른 것 때문에 생각이 더 미치고 있겠지? 그건 그것 나름대로 너의 명성을 널리 알릴 수도, 오히려 추락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차대 청사자가 되지 않겠냐던 헤르만의 제안.
엘릭은 일단 생각해보겠다며 답변을 보류했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는 묵직하게 남아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