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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57화 (156/405)

157화

바일 가문

많은 사람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쏠렸다.

특히 트라이탄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본인은 아직 폐하의 전언을 올리지도 않았…!”

“그 전언, 정식으로 비서감(秘書監)의 승인을 받으셨습니까?”

비서감은 황제의 직속 기관으로, 일종의 비서 기구라고 할 수 있었다. 내탕금을 관리하고,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정부와 각 부서에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황령은 이 비서감을 정식으로 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감찰국도 이 비서감을 통하지 않고서는 황제와 직접 소통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형식상으로는.

문제는 엘릭이 바로 이것을 지적한 데에 있었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엄연히 법령에 기술되어 있는 정식적 절차였고, 이것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효력이 발생하지 못했다.

“역시 못 받으신 모양이십니다.”

엘릭은 이제 자신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트라이탄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폐하의 명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자식인 신민으로서 응당 따라야 할…!”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헤르만 바일 님과 파울 바일 간의 승부결도 여기서 중단되어야 하는 것이 맞을 테지요.”

“…?”

“…?”

황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다시 따르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엘릭의 의중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이어지는 말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해당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까?”

“…!”

트라이탄은 이를 악물었다.

메르빙거 가문은 제국이 세워지기도 이전부터 존속했던 곳.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미 마도명문이라 불렸던 가문이었다.

그러는 만큼 초대 황제는 제국을 세울 적에 메르빙거 가문을 제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많은 이점을 내주었다.

반란에 준하는 죄를 짓는 게 아니라면, 절대 불간섭을 보장하는 자율성.

금인칙서를 동원한 명령이 아닐 경우, 메르빙거를 강제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의 권위.

지금은 비록 대마전쟁 이후 메르빙거가 급속도로 몰락을 겪으면서 기억하는 이들도 드문 조약(條約)이었지만.

효력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엘릭이 다시 유명세를 띠게 되자, 황실이 이를 견제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엘릭이 이런 조약의 일부를 들먹이는 것만으로도, 트라이던은 메르빙거에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가 없었다.

“승부결은 여기서 중단될지언정 메르빙거의 영지전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것을 여기서 집행하겠습니다.”

그냥 단순한 구두 경고가 아니었어? 사람들이 이제 단순히 호기심이 아니라 어수선해지는 가운데.

엘릭의 시선은 트라이던에게서 헤르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본 가의 대리인은 청사자 헤르만 바일을 내세우겠습니다.”

헤르만은 엘릭의 꼼수를 눈치채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일 가문이 받을 정치적 압박은 메르빙거가 대신 흘려주면서 실질적인 이득은 전부 다 챙기겠단 뜻이 아닌가.

이런 것을 거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응하겠소.”

“그럼 메르빙거의 대리인 헤르만 바일은 지금부터 파울 바일을 응징해주십시오.”

“그러겠소.”

“잠…!”

트라이던이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헤르만은 검을 세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빠르게 사선을 내리긋고 있었다.

단순한 일합에 불과해 트라이던은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 들었지만.

‘무슨…?’

트라이던은 순간 본능을 울리는 경종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한평생 음지에서만 살아왔기에 그는 무엇보다 본능에 가장 잘 의지하는 편이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그 속에 섬뜩함을 주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부리와 같다고 해야 할까?

일합에 담긴 힘이 대단했다.

거기에 바로 맞대응하게 되면 자신도 부상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아앙!

파울 바일은 단순해 보이던 헤르만의 공격을 쉽게 막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절대 간단하지 못했다.

헤르만의 검이 파울의 검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그대로 녀석의 오른쪽 어깨까지 깊숙하게 베어버렸으니까.

촤아악!

“크아아악!”

검을 든 팔이 허공으로 튀었다. 피 분수가 쏟아지면서 파울의 비명이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헤르만의 검이 스쳐 지나간 자리.

그곳에는 공간을 가를 정도로 엄청난 마찰열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날에도 검은 그을음이 남아있었으니!

‘매의 부리…!’

당연한 말이지만, 감찰국은 오랫동안 마탑의 육망성과 사자공가의 팔사자에 대해서 뒷조사를 하면서 그들 개개인의 전력과 목표, 성격 따위를 모두 소상히 파악해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트라이던은 그것이 헤르만이 오랫동안 추구해왔으며 완성하기를 바랐던 기술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설마 완성한 것이었나?’

하지만 그 비기가 헤르만을 입마증으로 몰고 갈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동안 무시를 해왔던 것이건만.

설마 북방에 가 있는 동안 그것을 완성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트라이던이 파악하기로 ‘매의 부리’는 헤르만과 그의 의형제가 젊은 시절에 우연히 입수하여 완성하고자 하는 검술, <보라매의 기상>을 구성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매의 부리’를 완성한 이상, 남은 부분이라고 알려진 ‘발톱’이나 ‘날개’ 등도 머지않아 곧 깨우칠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사자가 더 강해진다니. 감찰국으로서는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순간 이 자리에서 억지를 부려 바일 가문도 똑같이 적사자가처럼 반란으로 묶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으니.

적사자가 하나만 하더라도 감찰국으로서는 이미 상당한 정치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데다가, 그 배후에 있을 사자공가와 황금사자를 더 이상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청사자가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

아직 입마증의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알고 있었던 헤르만이 어느덧 완치된 것처럼 보였으니!

헤르만의 검 주변으로 둥실둥실 떠 있는 청색 구체가 그를 충격으로 빠뜨렸다.

오러 스피어(Aura Sphere).

달리 검환(劍丸)이라고도 불린다는 5체인 슈페리어의 상징물이었다.

검의 형상을 띠기 시작한 오러 블레이드를 초고밀도로 압축시켜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기예. 하나하나가 오러 블레이드 수십 개를 담은 것만큼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만 꺼내더라도 대적할 수 있는 자를 찾기가 힘들다고 알려져 있건만.

트라이던도 고작 3개를 완성하는 것이 고작인 오러 스피어를, 헤르만은 이미 4개나 완성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가 완성했던 오러 스피어가 3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미 원래의 실력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뛰어넘었다는 뜻이었으니…!

트라이던은 이 순간 머릿속에 들어 있던 헤르만의 전력을 대폭 수정, 아니, 격상시켜야만 했다.

‘1급 주의 인물’에서 ‘1급 요주 인물’로.

네레스타 가의 가이와 오거스틴 같은 인물을 제외하면 몇 없는 최고 부분에 그가 올라간 것이다!

촤촤촤-

헤르만은 트라이던을 신경 쓰지 않고, 파울의 전력을 완전히 꺾기 위해 계속 검을 빠르게 휘몰아쳤다.

이미 검을 잃어버린 파울은 여기에 저항할 수단 따윈 없었고.

“안…!”

화아아아!

“…돼…!”

격하게 떨리는 파울의 시야에 이쪽으로 날아오는 헤르만의 검이 보였다.

그것이, 날개를 접고 하강하는 매처럼 보였다.

“…거의 다 잡았… 는데…!”

스걱!

파울의 목젖 위로 붉은 혈선이 쭉 그어졌다가, 그대로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지막까지도 파울의 두 눈은 여전히 탐욕과 분노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털썩!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고요하던 연무장에 울렸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귀에는 분명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졌다.

그것이 가진 의미가 절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사자의 화려한 부활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메르빙거의 승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으니!

헤르만은 핏물이 잔뜩 배인 검을 바닥에다 내리꽂았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눈물이 흐르려던 눈가를 빠르게 훔치면서 위풍당당하게 기사단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동생을 이렇게 베어야만 했단 사실이 여전히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절대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일일이 헤르만의 시야에 담겼다.

환희에 젖은 청마와 청양을 비롯해 망연자실하고 만 파울의 인사들, 빠르게 기삿거리를 써 내려가는 기자들이며 웃고 있는 이사벨과 의형제들, 그리고 엘릭까지.

그들을 보며 헤르만은 목소리에 잔뜩 마력을 담아서 외쳤다.

“지난 혼란스럽던 시기 동안에 있었던 일과 죄는 모두 묻어두겠다. 하지만 다시는 지금처럼 사자의 권위에, 매의 기상에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나?”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

절대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바일 가문의 기사들은 하나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집에 담긴 검을 높이 들었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바일 가문만의 의식이었다.

“충!”

* * *

바일 가문 내에 있었던 모든 소란이 수습된 뒤.

괜히 바일 가문을 건드리려다가 본전도 못 건지게 된 트라이던은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조용히 사라졌다.

물론, 그냥 사라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엘릭 메르빙거. 당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을 것이오. 오늘 이 일, 후회할 것이오.]

일을 그르치게 만든 엘릭에게 경고를 남긴 것이다.

물론, 엘릭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다.

『곳곳에 너를 싫어하는 이들이 아주 많구나.』

[마음대로 하라 그러십시오. 어차피 황실과의 대립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찰국으로서는 분명 메르빙거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나서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엘릭의 생각이었다.

‘어디 감찰국이 잠재적인 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을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나한테만 일일이 신경 쓰기는 힘들겠지.’

저쪽도 인력이 그렇게 남아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도 대응책을 마련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헤르만이 이쪽으로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게 자네 덕분이었네. 다시 가문을 대표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네.”

엘릭은 고개를 저었다.

“헤르만 님은 어차피 제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다시 딛고 일어서셨을 겁니다.”

“그럴 리가. 내 딸을 위기에서 직접 구해주고, 내 입마증을 치료해준 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을. 그리고 그 뒤로도 틈틈이 내 몸을 봐주면서 내려준 처방전 덕분에 회복이 더 빨라질 수 있었다네.”

촤촤촤촤-

기자들은 엘릭과 헤르만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이 나누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바일 가문과 메르빙거의 연대에 어떤 뒷이야기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작자, 평소와 다르게 잔수도 쓰는군.』

메피스토는 그것이 이번 사건을 더욱더 큰 이슈로 만들기 위한 헤르만의 연출이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무인인 줄로만 알았건만. 이런 여우 같은 짓도 하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엘릭이 슬쩍 헤르만 옆에 있던 이사벨을 곁눈질하자, 이사벨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 모든 게 그녀의 솜씨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제안하고 싶네.”

촤촤촤-

“내가 비록 다시 청사자 직을 되찾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변고가 생겨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이런 비극이 빚어진 건 전부 내가 후계자를 따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엘릭은 순간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이것도 이사벨이 주도한 건가 싶어 황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사벨도 두 눈을 크게 뜬 것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헤르만의 독단이란 뜻이었다.

“저…!”

그래서 엘릭은 어떻게든 헤르만의 ‘부탁’이라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헤르만은 이미 짓궂게 웃으면서 ‘부탁’을 꺼낸 뒤였다.

“다음 대 청사자가 되어주게.”

“…!”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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