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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56화 (155/405)

156화

바일 가문

엘릭이 이사벨에게 가지는 감정은 남녀 간의 호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의리로 맺어진 사이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푸른 매가 장난으로 조카사위라고 불러댄다지만, 아직까지 엘릭은 당장 가문을 일구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깊게 생각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의 능력과 성품만큼은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탐 나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사벨이 앞으로 바일 가문을 물려받을 유일한 후계자라는 사실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릭과 이사벨 등은 바일 가의 저택 내에 마련되어 있는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이사벨의 지시대로 영지는 이미 외부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던 상태.

덕분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그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엘릭은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눈빛들이 하나 같이 살벌하군.’

그 때문에 엘릭은 곳곳에서 쏟아지는 경계 어린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개중에는 파울을 지지하던 이들뿐만 아니라, 그냥 바일 가문에 소속되어 있기만 한 평기사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들로서는 최대한 조용히 내분을 끝내고 싶었을 텐데, 엘릭이 도리어 그것을 끄집어 내버린 셈이니.

실제로 영지전을 운운하면서부터 여러 언론에서 이번 일의 계기가 된 바일 가문의 내분에 대해 집중 취재를 한창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덕분에 헤르만이 입마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파울이 어떻게 가문 내 권력을 틀어쥐려 했는지, 그 과정에서 이사벨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충성을 맹세한 가문 내 기사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이사벨의 고초를 모른 척했던 것이 사실이었던바.

그로 인해 그동안 공명정대하고 정의롭기로 유명했던 바일 가 기사단의 이미지는 이제 ‘간 보기에 바쁜 이들’이라는 쪽으로 바뀌어버린 상태였다.

고결하길 바랐던 긍지에 상처가 난 셈이니, 엘릭에게 화를 품을 수밖에.

하지만 엘릭은 전혀 그런 걸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헤르만과 이사벨도 그런 그를 두둔하면서 아무도 여기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별말은 못 하면서 눈꼬리만 치켜뜬 게 짖기만 잘하는 개새끼를 보는 것 같군.』

메피스토가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사자를 배출한 가문이라 그런가. 전력은 꽤 괜찮아 보이네요.]

그러면서도 엘릭은 심안을 열어두며 바일 가의 전력을 빠르게 체크하고 있었다.

앞으로 협력 관계를 긴밀하게 구축할 곳이니만큼 내실을 파악해두려는 것인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전체적인 전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청랑과 부딪치고, 청마와 청양을 만나면서 얼추 짐작은 했었다지만.

그에 준하는 기사단이 두어 개는 더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사벨과 푸른 매가 지날 때마다 갖추는 예의도 대단했다.

눈빛은 단단하고, 동작에는 절도가 있었다. 평상시 군기가 얼마나 잘 잡혀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분이 생긴 지 1년이 조금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면 가문이 어느 정도 흔들리는 게 보일 법한 데도 전혀 그런 기색이 없군. 그만큼 기반이 단단하게 잡혀있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단 뜻이겠지.’

엘릭은 여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많은 걸 배우는 느낌이었다.

네레스타 가에 방문했을 때에도 그러했지만, ‘명문’이라 평가받는 가문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안배에서 만났던 율호왕도 마찬가지.

부족 안트로모프는 바일 가문과는 전혀 다르게 자유분방한 색이 강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깨질 수 없는 단단한 신뢰와 연대감이 있었다.

‘내게도 이런 세력이 있다면….’

날개가 되어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엘릭이라는 사람이 맘껏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 메르빙거라는 가문이 맘껏 활개 펼 수 있는 날개가.

‘여기서 내가 어떤 성과를 보일 수 있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엘릭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엘릭과 이사벨은 연무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앉아있었다.

청마와 청양 등 다섯 기사단이며 식솔과 가신들까지 전부, 바일 가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원이 연무장에 몰려 있었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가에서도 사람을 보냈나?’

엘릭은 객석을 슬쩍 훑어보면서 바일 가문이 자랑하는 특유의 기질과 전혀 다른 기질을 가진 이들을 몇몇 골라낼 수 있었다.

기사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마법사나 신관들도 있었다. 저마다 신분을 속이고 있지만, 목적은 똑같을 터였다.

바일 가문의 수장이 누가 될지 파악하는 것.

그리고 만약 그것이 헤르만이 된다면, 입마증에서 벗어났다고 알려진 그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

‘저 중에 파울 바일이 심어둔 인사가 있을 수도 있고. 전부 다 조심해야겠지.’

엘릭이 눈을 빛내는 동안, 연무장에는 헤르만과 파울이 올라서고 있었다.

“하아! 결국 이런 식으로 부딪치게 되는구나.”

헤르만은 파울을 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피로가 역력했다.

그만큼 그는 친동생과의 충돌에 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때로는 딸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 것에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또 때로는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된 동생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형제간에 골육상잔의 비극을 벌일 바에는 차라리 덧없기만 한 가주 직을 던져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파울은 그런 헤르만의 시선이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두껍기만 한 위선, 이제 그만 벗는 것이 어떻소?”

“위선이라니. 아우야, 난…!”

“어차피 형님은 승자고, 난 패자요. 옛날에도 그러했고, 오늘도 아마 그러할 테지. 그 뒤에도 계속 그러할 테고.”

패배.

파울은 아직 대련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단어를 입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납기만 한 파울의 두 눈은 도저히 패배자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난 그것이 싫었소. 형님만 잘났다는 듯이 뭐든지 승리하고, 쟁취하고, 독차지하는 것이. 그중 어디에도 내 것은 없었으니까.”

당대에 들어와서 바일 가문이 무가가 되었다지만, 그들의 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바일 가문은 원래 상가였다.

제국, 아니,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상단을 운영하는 상가.

돈이 많던 전대 가주는 금력(金力)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거대한 무력(武力)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두 아들에게 검을 쥐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헤르만의 재능은 천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기에 전대 가주는 항상 흡족해했다.

그리고 그 총애는 나아가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재산까지 헤르만에게 증여되도록 만들었다.

아들이 둘이라지만, 금력까지 둘로 쪼개서는 원래의 그만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금력과 무력. 전대 가주는 둘 모두를 같이 보유한 위대한 가문을 남기고 싶어 했다.

실제로 헤르만은 상재에도 나쁘지 않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 상단을 망가뜨릴 우려도 없었다.

그것이 파울에게는 크나큰 상처로만 남았다.

열등감에 불을 잔뜩 지핀 것이다.

“그래서 뺏고 싶었소. 거기엔 분명히 내 것도 있었을 텐데, 정작 내 손에 잡힌 것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나라는 존재도 형님의 형제가 아닌 일개 가신으로 남기를, 충복으로 자라기를 바라셨지.”

파울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래서 보여줄 것이오. 이 세상 모든 것이 형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태 형님이 다 가졌으니, 이제는 내가 다 가져야겠소.”

차아아앙!

파울은 검을 뽑았다. 바스타드 소드에 맺힌 예기는 그의 눈빛과 달리 시리기만 했다.

헤르만도 똑같이 검을 뽑았다.

굳이 아우가 내뱉은 비난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입술을 꾹 다물고만 있을 뿐.

그도 아우가 이렇게 비뚤어진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정 결핍 증세를 보이며 자신을 봐달라고 발버둥 치던 파울과 다르게, 자신은 언제나 하고 싶던 것을 다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것이 이제 오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헤르만은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모두가 그렇게 악인으로 자라는 건 아니라는 것.

파아앗-

그래서 헤르만은 이 승부를 최대한 빨리 볼 생각이었다.

질질 끌어봤자 서로에게 상처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승부결.

이걸로 모든 결정을 내리자고 말했던 건,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파울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오러를 뽑아내면서 부딪쳐 나갔다.

쐐애액!

그렇게 사자와 늑대, 두 짐승의 발톱이 부딪치려던 그때.

쿵!

두 사람 사이로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자칫 휩쓸렸다간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위력.

그 때문에 헤르만과 파울은 동시에 투로를 옆으로 빗겨내면서 충돌 지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누구냐!”

“감히…!”

헤르만과 파울은 자세를 바로 갖추면서 승부결을 방해한 작자를 똑같이 동시에 노려봤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인이었다.

두 형제의 살기를 동시에 받고도 전혀 일말의 흐트러지는 기색도 없었다.

아니, 여유롭게 흘려보내다 못해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는 기세마저 품고 있었다.

“본인은 감찰 제1국의 국장, 트라이탄이라 하오.”

“…!”

“…!”

헤르만과 파울의 두 눈이 커졌다.

감찰국. 그것도 제1국이라면 황제 직할(直轄)이었다.

그런 곳의 수장이 움직였다는 뜻은 단 하나.

황제가 전언을 보냈다는 의미였다.

황실이 아닌, 황제가 직접!

“폐하께서 본인에게 직접 말씀하시었소. 동쪽의 변경에 제국의 은총을 받고도 감히 모반을 꿈꾸는 작자가 있음이니. 제국의 신민이라면 응당 모두가 한 몸과 한 마음이 되어 그런 작지를 징벌하지는 못할지언정 저들끼리 부딪치기나 하고 있으니, 이를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으시다고 말이오.”

그러면서 트라이탄의 시선이 저절로 객석으로 향했다.

순간, 객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취재진은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바일 가문의 기사들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아무리 제국이 황제의 ‘소유물’로 인식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가문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국법에도 명백히 황실과 귀족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이건 명백한 내정 간섭이었다.

‘날 두고 한 경고로군.’

엘릭은 이쪽으로 향하는 트라이탄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저 말의 표적에는 단순히 겉보기와 달리 메르빙거도 해당한다는 것쯤은 이미 등장했을 때부터 눈치챘던 사실이었다.

영지전을 운운하면서 황실의 행사가 줄 파급 효과를 크게 깎아 먹어서 뿔이라도 난 모양인데.

‘여기서 그냥 끝나지는 않을 것 같고. 뭘 하려는 거지?’

그냥 단순히 구두로만 경고의 말을 전하러 온 것이라면, 헤르만과 파울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번 승부결은 제아무리 황제와 감찰국이라고 해도 개입할 수 있는 절대적인 법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서야 괜히 황제의 체면만 깎일 수 있으니, 감찰1국에서 어떤 수를 쓸 건 분명했다.

헤르만은 그러기 전에 내정 간섭에 대해 따지려 들었다. 제아무리 그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라고 해도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적사자가를 징벌하는 임무는 이것과는 전혀 별개였다.

하지만 헤르만 보다 먼저 파울이 광소를 터뜨렸다.

“파하하! 폐하께서 사자들의 팔다리를 자르시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시군. 적사자의 머리를 치시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청사자의 팔다리도 묶어두고 싶으신가 보오?”

트라이탄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히 제국의 신민이 되어 황상의 뜻을 함부로 재단하려 드는가?”

살벌한 기세가 흘렀지만, 파울은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폐하께서는 신민의 뜻을 함부로 평가하시면서 신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요?”

“감히…!”

“됐고. 우리의 행사를 무슨 근거로 막으실 건지 묻고 싶소만.”

트라이탄의 두 눈이 순간 불을 뿜었지만, 여기 어디에도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충신이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반역자들 같으니…!’

트라이탄에게 있어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저들끼리 이합집산하기 바쁜 무도가니 마법사니 하는 족속들은 죄다 잠재적인 반역 도당에 불과했으니.

저들을 언젠가 전부 징치하기 위해서는 당장은 화를 삭이고, 황령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숭고한 사명밖에 가슴에 남아있질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입에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객석에서, 그동안 예의주시해야 할 인물로 분류해두었던 메르빙거의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을 실었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찬성공작의 권한으로, 폐하의 말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거부의 뜻을 밝히겠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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