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바일 가문
폭풍이 한바탕 중앙마도관리청을 휩쓸고 지나간 뒤.
차이프는 브라이언이 자신에게 내민 봉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뭔가, 이건?”
[사직서]
난데없이 사직이라니.
여태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브라이언은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않으며 사과만 할 뿐이었다. 딱딱한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차이프는 사직계와 브라이언을 번갈아 보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메르빙거의 가주가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거군. 맞지?”
“….”
“…맞군.”
차이프는 아무 말도 없는 브라이언을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사실 이런 걸 걱정하긴 했었다.
엘릭이 기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폭탄처럼 던진 선언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영지전이라니. 정말이지 아주 교묘하기 짝이 없는 프레임이었어.’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가문이 지닌 내력과 역사가 가진 힘이 아주 크다. 그만큼 명문(名門)이 가지는 저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명문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만큼 체계화된 체제 덕분에 인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일 뿐. 옛날처럼 어느 특정 가문에 대한 세인들의 존경이나, 대중적 영향력은 아주 많이 사라진 편이었다.
메르빙거만 보더라도 그걸 알 수 있지 않은가. ‘별의 마도사’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내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지만. 30년 넘게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하고 침묵해 있어야만 했던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기에 현시대는 가문이 아닌 영웅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하늘이 인간에게 허락한 힘이 가장 최전성기에 다다랐다고 평가받는 시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반신 취급을 받던 9써클의 대마법사들은 이제 열 명도 넘게 세상을 활보하고 있으며.
초인이라 불렀던 5체인의 슈페리어들도 이제 사자라는 이름으로 여덟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신교 동맹이니 감찰국이니 하는 곳의 절대자들도 있었고, 제국을 벗어나면 자유혁명군 같은 집단의 수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너무 많은 나머지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가히 한 시대의 절대자라 할 만한 자들이 너무 많이 공존(共存)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비운의 영웅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지금은 가문의 내력보다 영웅의 저력에 더 세간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엘릭 메르빙거는 바로 그런 영웅의 시대에 자신도 영웅이라며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진 자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새로운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그가 가문의 내력까지 등에 업은 채로, 정의를 부르짖었으니 그 효과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단 한 사람일 뿐입니다. 가문에는 저와 누이, 단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맞서 싸우려는 존재는 한때 청사자의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고수입니다.
-아마 이대로 부딪친다면 제가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겁니다. 그래도 저는 맞서 싸울 생각입니다.
-그런 저를 응원해주십시오. 별이 스러지지 않게, 어둠에 가려지지 않게, 또 결국 다시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지지가 있는 한, 저는 별이 다시 빛날 때까지 다시 묵묵히 걸어 나갈 것입니다.
‘언론의 관심과 대중의 호의를 아주 잘 이용하지. 프로파간다의 의미를 너무 잘 알아.’
엘릭은 철저하게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탄압받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포장했다. 반면에 파울 바일은 그런 세상을 지배하는 구 체제의 대표격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세인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옛 영웅, 우스던 메르빙거를 꺼내 들었으니.
대마전쟁에서 거센 파도처럼 쏟아지던 마왕군 앞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고 묵묵히 그들을 막아서던 그를 자신에게 투영시켜 세인들의 향수(鄕愁)를 자극한 것이다.
엘릭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기들을 너무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남녀노소,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질지를 너무 잘 알았다.
덕분에 이제 ‘라센트의 영웅’에서 완전히 ‘영웅’이 되고 말았으니.
브라이언 같은 인재들이 동요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평상시 냉철한 사고판단력을 지녔던 그가 저렇게 빤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만한 인재이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지를 잘 안다. 그렇기에 변화되는 세상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 했다.
물론, 이미 반백 년의 나이를 넘은 차이프의 눈에는 그런 모든 게 허상처럼 보일 뿐이었다.
젊은 시절에나 꿈꿀 수 있는 혈기.
젊은이들은 그런 혈기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글쎄?
그 역시 호기롭던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나름대로 천재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마전쟁이라는 격변기를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을 일구고 정착하면서 세월이 주는 풍파에 깎이고 또 깎였기에 이제는 냉소만이 남아있었다.
“자네, 이게 뭘 뜻하는지는 알고 있나?”
그래서 이 사직계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브라이언이 지금 당장 젊은 혈기에 한껏 취해 이상을 좇는다고 한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불에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좌절과 절망. 뭐, 그렇게라도 표현할 수 있다면 오히려 생각보다 더 잘한 것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네는 몰라.”
“아뇨. 잘 알고 있습니다.”
“몰라.”
“알고 있습니다.”
“흠…!”
차이프는 몇 번이나 브라이언의 말꼬리를 잘랐지만, 그때마다 브라이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두 눈은 더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충동이 아닌, 오랫동안 깊은 고민과 성찰로 내린 결론이란 뜻이었다.
이런 건 절대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차이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직계를 단호하게 찢어버렸다.
“청장님…!”
순간, 브라이언의 눈에 분노가 잔뜩 맺혔지만.
“휴직계를 제출한 것으로 처리해두도록 하지.”
“예…?”
차이프의 태연한 대답에 브라이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차이프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휴직계로 처리하겠다고. 기한은 내가 알아서 설정해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그동안 원하는 대로 맘껏 날뛰고 와. 그러다 지루해지거나, 지치거나, 혹은 이게 내 길이 아니겠다 싶을 때 돌아오도록 하고.”
“…!”
“젊은 시절의 방황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 처음부터 확고하게 길을 잡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다 우연히 제대로 된 길을 만나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고.”
“….”
“중앙마도관리청은 그런 ‘왔던 길’이 되어 줄 걸세. 그럼 되지 않겠나?”
브라이언도 그제야 차이프의 깊은 뜻을 알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자세를 갖추면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됐고. 돌아올 때 다치지나 마. 산재 처리하려면 힘드니까.”
차이프는 귀찮다는 투로 손사래를 치며 그만 나가보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덕분에 청장실을 나서는 브라이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기 위한.
그만의 첫걸음이었다.
* * *
[엘릭 메르빙거의 전격 선언!]
[영지전의 부활. 메르빙거와 바일의 대치. 그 끝은?]
[파울 바일, 그는 누구인가?]
[현재 파울 바일의 작위는 자작으로 밝혀져.]
[공작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자작의 몽상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귀족위원회, 이번 사안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시해.]
[마탑, 바일 가문에 항의서한을 보내다.]
[황실, “아직 이렇다 할 성명 발표 계획은 없어.”]
“아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군.”
파울 바일은 침착한 어투로 말했지만, 힐튼은 그 속에 담긴 짙은 분노를 모르지 않았다.
파울은 일반 무도가답게 감정이 격해지면 격해지는 대로 그것을 어떻게든 표출해내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싸늘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분노가 표출해낼 수 있는 범주를 까마득히 넘어섰다는 뜻.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은. 따로 있나?”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힐튼은 떨어뜨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청랑의 전멸만 해도 뼈아픈 실책일진대, 언론이 이렇게 마음대로 떠들어대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바일 가문 내에 그나마 남아있던 파울의 지지자들도 점차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설사 헤르만을 꺾는다고 해도, 온전히 가문을 수습할 수 있을지부터가 걱정이었다.
있다 해도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할 테지.
혹은 쭉정이만 남아있거나.
“그렇다면 죽어야지.”
푸화악!
파울은 주저치 않고 칼을 휘둘러 오랫동안 자신의 오른팔이자 참모였던 자의 머리를 쳤다.
설마 목숨까지 빼앗을 줄 몰랐던 힐튼으로서는 뭐라고 말해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머리통이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구른 뒤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핏자국을 빠르게 닦는 동안, 부관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감찰국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그놈들이? 왜?”
“영지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건지를 묻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것들.”
파울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헤르만이 입마증에 빠졌을 때쯤, 도와주겠다며 자신더러 가문의 주도권을 잡으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상황이 안 좋게 흐르니 발을 빼던 녀석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엘릭 메르빙거가 사건을 훨씬 키워버리고 나자, 그제야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하긴 저들로서는 적사자가의 반란에 이슈를 집중시켜 황실의 위업을 높여도 모자랄 판국에, 메르빙거에 모든 이슈를 빼앗길 판이니 짜증이 날 수밖에.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보라며 닦달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보류… 아니, 아무 대답도 하지 마. 어차피 안달이 난 건 저놈들이니 저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파울로서는 지금 당장 자신의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중요했다.
“다 치웠으면 사라져!”
부관이며 시비들도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공간에서도 그의 일그러진 인상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저희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생기신 모양이네요. 어떠신가요? 그때 드렸던 저희 측 제안은 여전히 유효한데 말이죠.”
그때, 창가에서 엷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파울의 사나운 시선이 그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그곳에는 한쪽 관자놀이에 산양처럼 굽은 뿔을 매단 여인이 서 있었다.
마족이었다.
* * *
헤르만과 파울의 승부결이 이뤄지기로 한 당일.
엘릭은 푸른 매와 함께 움직이던 중에 이사벨을 만날 수 있었다.
“이사벨, 머리가…?”
“좀 잘라봤어요. 어때요?”
이사벨은 허리까지 내려오던 장발 대신에 어깨까지만 오는 단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여태 차분하고 단아해 보이던 인상이, 어딘지 모르게 활기가 더해진 것 같았다.
수동적인 이미지에서 주도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뭔가 미묘하게 이전의 이사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잘 어울…!”
“그런 거 말구요.”
“예쁩니다.”
“그럼 됐어요.”
이사벨이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드디어 원수의 목을 걸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약해 보이면 안 되죠.”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인의 고원에서 보았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때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차게 된 것이리라.
“전부 다 엘릭 덕분이에요. 가문을 대표해서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어요.”
고개를 숙이는 이사벨.
그 순간.
촤촤촤촤-
어디선가 촬영 마도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곳곳에 기자들이 있어 이곳을 취재하고 있단 뜻이었다.
아무래도 청사자와 메르빙거 간의 연대를 외부에 계속 노출하면서 이슈를 더 크게 키우려는 것 같은데….
그만큼 파울 바일이 받게 될 심리적 압박감도 대단할 터였다.
엘릭만큼이나 이사벨도 상황판단력이 뛰어나단 뜻이었다.
‘역시. 군재가 대단해.’
엘릭의 눈이 빛났다.
‘이런 사람이 본 가에 참모로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