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바일 가문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바로 그 파울 바일인가 하는 인간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씀이시죠?”
“그렇다네.”
황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
혹여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해 청마와 청양의 보호를 받으며 움직이는 내내, 엘릭은 라셀과 푸른 매로부터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들을 수가 있었다.
어쩐지 헤르만과 이사벨이 가문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분명 들었건만 여태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파울 바일이 그동안 그딴 짓을 저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사실 엘릭으로서는 파울 바일에게 시비만 걸었을 뿐, 그 뒤로 북방으로 가버려 그동안 녀석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황도로 돌아올 때쯤에는 슬슬 녀석과 결착을 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헤르만과 이사벨이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사벨이 나섰다면 궁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겠지.’
그동안 엘릭도 이사벨이 얼마나 명석한지를 지켜보았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군재(軍才, 군대와 군비 및 군무와 같은 군사軍事에 대한 재능)는 날이 갈수록 만개를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파울 바일이 여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 불똥이 엄한 자신에게 튀었다고 하니, 아무 위협이 되지 못했다고는 해도 엘릭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라센트 시에서 벌였던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여전히 인간쓰레기로 지내고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났으니.
엘릭으로서는 도저히 좌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잡것들이 나타났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었는데 진짜라니까 좀 짜증 나네.”
엘릭은 마도사 자격증이 나오는 즉시 전장으로 움직여야겠다던 계획을 잠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찝찝한 걸 내버려 두고 다른 일을 하러 간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파울 바일의 목이 장대에 걸리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차라리 이번이 메르빙거의 이름을 알릴 적기일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아도 단순히 전장으로 가게 되면 실력을 증명할 때까지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해서 명성을 쌓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건만.
파울 바일의 머리라면 그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았다. 라센트의 영웅이라는 별칭이 가진 무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테니.
‘그럼 적당히 빌드 업을 해둬야겠지?’
엘릭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또 한놈이 죽어나가겠군.』
메피스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엘릭이 라셀을 돌아봤다.
“그럼 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조카사위의 부탁이라면 뭔들 들어주지 못하겠나.”
엘릭은 네레스타의 원로들만큼이나 자신을 보는 내내 눈빛에 탐욕이 가득한 라셀의 눈을 보면서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럴수록.
라셀의 눈이 재미난다는 듯이 점점 곡선을 그렸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었다.
* * *
5급 시험관 브라이언은 수시로 창가 쪽을 보면서 몇 번씩이나 식은땀을 흘렸다.
“자네, 갑자기 아까 전부터 왜 그렇게 바짝 긴장해 있나? 안절부절못하는 게 영락없이 소변 참는 강아지 꼴이 따로 없구만.”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관리청장 차이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이프가 브라이언으로 하여금 여러 관직을 두루 경험하게 한 뒤, 따로 발탁할 계획을 세웠을 만큼 그는 뛰어난 인재였다.
언제나 돌발적인 일이 터져도 늘 냉철한 모습을 보였건만. 최근 들어 매사에 집중을 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상시보다 더 그런 모습이 강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늘?”
차이프는 브라이언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혹시 메르빙거의 가주 말인가?”
“예.”
차이프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투로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아무리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고 해도, 단 사흘 만에 퀘스트를 끝낸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엘릭이 선택한 ‘붉은 유령의 숲’은 황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마차를 타고서도 꼬박 하루를 가야만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왕복하는데 이틀이 걸릴 테고, 실질적으로 3차 시험을 치르는데 단 하루만 소요되었다는 건데… 그건 상식상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유령의 숲을 배회하는 유령 계통 몬스터가 그리 쉬운 게 아닌 데다가, 퀘스트가 필요로 하는 정수(精髓)도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열 마리를 꼬박 잡아야 겨우 하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상당한 시간과 노고, 그리고 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2차 시험까지 그럭저럭 통과한 자들도 결국 여기서 고배를 마시곤 했다.
마법사들 중에 평상시 체력관리에까지 힘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장시간에 걸쳐서 마력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도 있으니, 그런 과정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도사’라는 칭호를 획득한다는 건 그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사흘을 운운하니 기가 찰 수밖에.
아무리 그가 엘릭을 시험하면서 받은 충격이 아주 컸고, 그동안 엘릭의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고 해도, 차이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판단이었다.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냉철하고 번뜩이던 재지까지 잃어버린 건가 싶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본청 앞에 취재진이 너무 많이 몰려 있습니다.”
그래도 브라이언은 도저히 그런 자신의 생각을 거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차이프는 손에 쥐고 있던 밀크티의 따뜻한 차향을 맡으면서 슬쩍 커튼 너머를 곁눈질했다.
“흠! 그렇긴 그렇구만.”
확실히 중앙마도관리청 앞은 평상시보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엘릭에 대한 소문은 이미 황도 전체에 퍼진 상태. 언제 퀘스트를 마치고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취재해 보겠답시고 많은 기자들이 저렇게나 많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그에게서 영험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아보겠다는 고시생들이나, 심심풀이로 서 있는 시민들까지, 저마다 사연도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특종 한 번 잡아보겠답시고 저기 앉아있는 기자들이 어디 한둘도 아니고. 그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거야 당연하지 않나?”
이미 차이프도 친한 기자들로부터 엘릭이 등장할 것 같으면 미리 귀띔해달라는 청탁을 여러 번 받은 상태.
그러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건데.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평상시와 다르게 기자들이 주위를 계속 관찰하는 게 뭔가 언질을 듣고 온 것 같아서요.”
“음?”
차이프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던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제로 기자 중에는 각 신문사 데스크에서 제법 높은 직급에 있는 이들도 더러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건 이미 끝난 지 한참 되었거나, 한번 만나보려면 차이프도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양반들이 왜…?
그러던 그때. 갑자기 마도관리청 쪽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바일 가문을 상징하는 청사자의 인장이 새겨진 팔륜 마차였다.
그 순간, 취재진이 저마다 웅성대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와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3신성이나 황실의 유명 인사들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비출 때와 비슷한 광경.
청사자가 최근 세간의 이목을 주목받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인기를 끄는 정도는 아니었다.
차이프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수하들에게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고! 다들 서둘러 움직여!”
3, 4급 사무관이며 시험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브라이언은 그보다 더 먼저 즉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때마침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촤촤촤촤!
찰칵, 찰칵, 찰칵-
순식간에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이를 촬영하기 위해 각 신문사의 마도구들이 바쁘게 돌아갔다.
엘릭 메르빙거.
최근 들어 세간의 이목과 집중을 받고 있는 인사의 등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네이처 트리뷴’의 알렉산더 기자입니다! 엘릭 메르빙거 님, 요즘 많은 제국민들이 엘릭 메르빙거 님의 행보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더 체이서’의 제이튠 입니다! 과거 조부님이셨던 우스던 메르빙거 님의 점수는 물론, 3신성인 타샤 네레스타 님의 점수도 꺾고 신기록을 달성하셨는데요. 이렇게 뛰어난 점수를 기록하실 수 있으셨던 비법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최근 3신성이 아닌 사신성(四新星)으로 분류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과거 마도명문이었던 메르빙거의 명성을 다시 일구고 계시는 중인데요. 여기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라센트의 영웅이 되시면서 갈등을 겪은 적이 있던 파울 바일이 일으킨 소란에 대해…!”
“저희는…!”
“저희도…!”
기자들이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댔지만, 엘릭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중앙마도관리청의 정문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특히 청사자가를 대표하는 청마와 청양이 쉽게 엘릭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인의 장막을 치자, 기자들은 더욱 안달이 나고 말았다.
“마도사 자격증을 가지러 온 것 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지…?”
“무슨 일이 있나?”
“퀘스트를 실패한 건 아닐까?”
“그럴 리가. 그럼 이렇게 서둘러서 올 리가 없지.”
“다른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기자들은 직감적으로 퀘스트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그들 모두가 여기로 오기 전부터 각 본사의 데스크로부터 엘릭이 중앙마도관리청에 곧 도착해 마도사 자격증을 취득할 것이고, 이 뒤에 다른 큰 발표를 할 것이란 언질을 들어둔 상태.
그것이 최근 들어 조금씩 사람들 사이에서도 들썩이고 있는 바일 가문과 관련된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시각, 엘릭은 자신의 시험을 감독했던 브라이언으로부터 완전한 마도사 자격증을 받고 있었다.
이제부터 제국과 황실 및 정부가 공인한 손꼽히는 마도사가 되었다는 의미였지만.
여전히 엘릭의 표정은 이전에 증명시험을 치르러 왔을 때와는 다르게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때문에 브라이언은 엘릭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괄시한 것 같아 미안하며, 앞으로 그의 행보를 응원하겠다는 말을.
그저 엘릭이 퀘스트를 치르면서 별일이 없었기를 바랐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겉으로는 엘릭이 크게 다치거나 한 곳은 없어 보였다.
“찬성공작 님,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이후에 저희 측 청장님과 식사라도…!”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엘릭은 고맙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이후, 자신에게 스리슬쩍 다가오던 이들을 모두 옆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그와 친분을 다져보려던 차이프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도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 어어? 나온다!”
“엘릭 메르빙거 님, 한 마디만 부탁드리겠습니다!”
“30여 년 만에 마도명문에서 마도사가 나왔는데, 어떤 기분이십니까?”
촤촤촤촤!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오자, 촬영 마도구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엘릭은 수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앞에서도 조금도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뗐다.
“소감을 말하기 전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엄숙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
기자들은 저것이 엘릭이 발표하려 한다는 ‘큰 발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전 사실 퀘스트를 치르는 지난 사흘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로부터 기습을 받았고, 생사의 기로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
“…!”
기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형 특종이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마도명문의 가주가 대낮에 암살 위협을 받았다?
특히 얼마 전에 4황자 크롬헬이 위문차 국경수비대에 방문했다가 암살 위협을 받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대서특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보다시피 저는 다행히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도와주러 온 바일 가문의 도움 덕택에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만… 밤새 고민 끝에 절대 이 수모를 참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촤촤촤촤!
“그래서 영지전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순간, 기자들은 기함하고 말았다.
영지전.
지금은 비록 황실의 세력이 커지면서 귀족들 간의 분쟁이 많이 줄어든 편이었지만, 과거 귀족들의 권세가 드높았을 때에는 가문의 명예와 영지의 실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때에는 반드시 한쪽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거나, 멸망해야만 겨우 끝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소속 인원이라고는 단둘밖에 없는 메르빙거가 영지전을 선포하다니!
당연히 우려와 걱정, 기대 등 다양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고.
엘릭은 그 모든 시선을 받아들이면서 차갑게 말했다.
“대상은 파울 바일. 바일 가문의 역적입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