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북풍(北風)과 한설(寒雪)
‘설마, 메피가…?’
엘릭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메피스토가 혹시 이번 일에 개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엘릭은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아냐. 메피에겐 당장 그럴 능력이 없어. 있다고 해도 동기도 없고.’
물론, 이제 메피스토의 격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건 사실이었다.
굳이 심안을 열지 않아도, 단지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렇다 할 물리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있다고 해도 당장 벤시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상태일 텐데, 당장 엘릭에게 그만한 금제(禁制)를 가할 수 있다는 건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걸 다 떠나서라도.
메피스토는 당장 엘릭이 보다 빨리 성장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판국이니.
그가 원하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리고리를 박살 내기 위해서라도 엘릭의 성장은 그에게 꼭 필요했다.
‘그럼… 대체 뭐지?’
엘릭은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금제를 가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자가 있다면, 자신이 안배를 치르고 있는 동안 충분히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스승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 * *
“형님, 어떻게 해야 하우?”
푸른 매의 둘째, 라셀은 아우들이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그들은 붉은 유령의 숲 입구에서 대기하다, 청마와 청양이 합류하자 즉각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 청랑은 이미 던전에 거의 다다라 있던 상태.
그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청랑을 붙잡기 위해서 발길을 더욱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나 던전에 도착한 순간, 그들은 잠시간 발걸음이 얼어붙어야만 했다.
입구에서부터 이미 격전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
곳곳에 맺힌 고드름이며 빙판은 엘릭의 마법이 이미 거칠게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셀도 절대 엘릭이 쉽게 뒤를 내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 정도 저항쯤은 당연히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푸른 매를 비롯한 청마와 청양을 충격으로 내몬 건, 그 결과물이었다.
청랑이… 전멸해 있었다.
하나 같이 얼음 속에 갇혀 있거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 널브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으니.
특히 하나 같이 공포에 잔뜩 질린 채로 죽어있는 모습은 일견 두렵기까지 했다.
마치 옛날 전설에서나 볼 법한 빙한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타난트… 저놈이 저런 꼴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특히 라셀은 죽어있는 사체 중에 청랑의 단장이 있단 사실을 알고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녀석은 그로서도 쉽게 꺾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기 힘든 실력자.
그런 녀석조차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로 죽어버린 듯하니,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무엇보다도.
여전히 입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유령들은 마치 사신처럼 서슬 퍼런 대낫을 들고 있어서, 푸른 매 등이 침입한다면 즉각 달려들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정황상 엘릭이 이 가디언들을 부려 이런 일을 벌인 건 확실하다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일행들이 라셀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참상을 저지른 게 엘릭이 아닌 던전 가디언의 솜씨라면.
그보다 먼저 입장했던 엘릭은 어떻게 되었는가?
만약 그도 위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든 반드시 구해야만 했다.
그것이 푸른 매와 청마, 청양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일단, 진입한다.”
라셀은 일말의 확률까지도 고려해야 했기에 진군을 결정했다.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던 청마와 청양도 곧 눈빛을 굳혔다. 청랑은 제거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임무는 던전 점령으로 바뀐 셈이었다.
키에에?
키에에엑!
캬아아아-
유령들은 푸른 매 등이 던전으로 침입을 시도하려 하자, 하나 같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면서 기괴한 소리를 냈다.
대낫이 흉흉하게 들리면서 서슬 퍼렇게 빛났다.
공기가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격에 특화된 청양이 앞으로 나서고, 기동력이 강한 청마가 두 개의 분대로 갈라져 좌우에 각각 배치되면서 언제든 적진의 뒤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다시 전투가 재개되려는 순간.
“그만.”
안쪽에서부터 울린 외침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유령들의 움직임도 뚝 그쳤다.
푸른 매 등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라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벅.
저벅.
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유령들은 일제히 대낫을 다시 목에 걸고 하나둘씩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왕을 알현하려는 듯한 신하들을 보는 것 같은 모습. 청마와 청양에 속한 모든 이들의 눈이 저절로 커지는 가운데.
엘릭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진짜 희생자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는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신호를 확인해보다가, 그 침입자들이 익숙한 얼굴들인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뛰어온 상태였다.
자칫 불필요한 피해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라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잖나. 그럼 된 거지.”
놀라울 정도로 명쾌한 대답에 엘릭은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 * *
엘릭은 더 이상 회수할 것이 없는 던전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폐쇄(閉鎖)】.”
간단하게 시동어를 외우자, 던전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입구가 와르르 무너지고 던전 전체가 깊게 가라앉으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 이렇게 해도 되나?”
라셀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법에는 문외한인 그의 눈에도 엄청나 보였으니 실제로는 진정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이리 쉽게 무너뜨려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엘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무너뜨린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다시 원래의 자리에 묻어둔 것일 뿐이니까요.”
“묻어놔?”
“예. 원래 지하 던전이었거든요.”
천 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았던 오토 한의 던전이 소피아 일행에게 발각되었던 건, 어디까지나 엘릭이 안배를 깨우면서 봉인이 해제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일 뿐.
하지만 거기서 필요한 안배를 모두 거둬들였으니 다시 봉인 마법을 가동한 것일 뿐이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해제도 할 수 있을 테고.
앞으로는 가문의 안가이자 성지(聖地)로서 놔둘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한 건 전부 바로 이것 때문이고.’
마도경식.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이 목걸이의 진짜 정체를, 엘릭은 이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열쇠였다.
가문이 간직하고 있는 모든 비밀을 풀고 잠글 수 있는 만능열쇠.
“그래도 가디언들은 아쉽지 않나? 딱 봐도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쓸모가 많아 보일 것 같았는데.”
라셀은 청마와 청양도 긴장하게 했던 유령들을 밖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그만한 전력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보통 던전 가디언들은 던전의 ‘부품’과도 같아서 함부로 꺼내기 힘들고, 꺼낸다고 해도 작동시키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닐…!
“당연히 가져가야죠.”
“응?”
라셀은 당연하지 않냐는 엘릭의 말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귀속(歸屬)】.”
엘릭이 던전에 남아있던 두 번째 시동어를 읊은 순간, 던전이 가라앉은 자리로 지진이 크게 일어나더니 회색을 띤 그림자들이 줄줄이 튀어나와 엘릭에게로 쏟아졌다.
끼아아아-
츠츠츠!
일견 족히 백여 마리는 될 것 같은 유령들이 엘릭에게 들러붙을 때마다, 그의 체내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걸리는 소리가 났다.
찰칵.
찰칵.
유령들을 강제로 던전에 묶고 있던 속박인(束縛印)이 고스란히 엘릭에게로 위치가 옮겨지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허!”
라셀은 그걸 보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더 괴물이 되고 말았군.’
가뜩이나 흑의 설원에서 본 엘릭도 말도 안 되는 성장세를 보였는데, 이제는 얼마나 강해졌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라셀과 푸른 매는 마음 한편에서 불이 자꾸만 지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역시 이 아이가…!’
‘우리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인재다.’
‘조카사위가 될 자격이 충분하단 말이지.’
각 귀족 가문에 병력 차출과 관련된 황실의 공문이 떨어진 건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렇다면 아마 엘릭도 조만간에 윈즈 변경주로 이동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엘릭이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드는 혹한을 몰고 다니며 유령 군단을 대거 뿌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절로 어깨가 들썩을 정도였다.
‘물론, 그만큼 조심해야겠지만.’
다만, 어느 정도 유의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유령은 흔히 흑마술로도 분류되는바.
그 분야를 세세하게 파고들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그렇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마탑이 흑마술을 배척하고 있는 한, 그런 우려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건 처음부터 미리 배척해두는 게 옳았다.
‘일단 청마와 청양에게는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둬야겠군.’
엘릭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 처신하겠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도와줄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한편.
『오토 한, 그놈이 잘도 터무니없는 걸 쥐여 주었군.』
메피스토는 던전 가디언이 완전히 엘릭에게 귀속된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북풍’이 휘몰아치게 되면 나타날 저것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엘릭으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아요?]
엘릭도 던전 가디언들이 전부 강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메피스토가 ‘경계’할 정도일까 싶을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앞으로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정도?
아니면 가신도 가병도 없는 전장에서 좀 편해지겠다 싶은 정도?
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메피스토의 태도만 봐서는 그런 정도로 끝날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넌 모를 것이다. 오토 한이 ‘겨울’을 일으키면서 몰고 다니던 ‘유령군(幽靈軍)’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그는 이제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까지 뀌기까지 했다.
『오토 한은 초령(招靈, 특정 영혼을 부르는 주술)과 강령(降靈, 특정 영혼을 몸에 빙의시켜 초월적인 힘을 뽑아내는 주술)에 아주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네가 갖게 된 유령들의 원본도 하나 같이… 아니다. 되었다.』
순간, 엘릭의 눈이 살짝 빛났다.
얼추 메피스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토 한이 남긴 유령들이 하나 같이 살아생전에는 대단했던 인물들이라는 거지, 이거?’
메피스토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그리고 당대에 메르빙거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오토 한이 선택한 인물들이라면, 과히 영웅이라고 지칭해도 될 터.
그것들을 활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이로써 오토 한의 모든 유산을 계승한 건 끝난 셈이니.
이제부터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겨울’이 천년 만에 다시 이 땅에 내려앉았음을.
그리고 메르빙거가 다시 기지개를 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릴 때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