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북풍(北風)과 한설(寒雪)
“이, 이게…?”
타난트는 순간 자신이 헛것이라도 봤나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말이 안 되었으니까.
‘그래. 이것은 환술이다! 엘릭 메르빙거, 이놈은 빙계 마법보다 환술에더 특화되어 있던 것이야!’
청랑 2조와 3조가 녀석에게 당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도사가 될 만큼 성장했다는 것도 이미 숙지해두었다. 그래서 청랑의 대부분을 끌고 온 것이고.
하지만…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되었다.
청랑이 아무리 바일 가문 내에서 기사단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출신이 좋지 않고 맡은 임무가 더럽기에 그런 것일 뿐.
전력은 다른 기사단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이들이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기도 했다.
어느 기사단과도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많은 실전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하들이 모두 얼어붙은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 불어 닥친 얼음 폭풍 때문에.
그러니 타난트가 그걸 두고 엘릭이 부린 환술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인 것들이 많았다.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절대영도의 온도는 과연 감각을 속이는 것만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다.
“어, 어, 어…!”
“살려… 줘…!”
그러다 겨우 목숨만 부지한 수하들까지 입을 뗀 순간, 타난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이건 절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한순간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확 끄집어내진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츠츠츠-
타난트의 생각을 무시하듯, 벽면 곳곳에서부터 유령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벤시 리퍼를 비롯한 유령들은 하나 같이 한 손에 커다란 대낫이나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
키아아아!
키키키키-
새로운 주인의 명령을 받은 던전 가디언들이 귀곡성을 내뱉으면서 빠르게 청랑의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이미 대부분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목숨을 거두는 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살려…!”
“커커컥!”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
대낫을 비롯한 무기들도 영체(靈體)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얼음 같은 물리적 한계도 그냥 쉽게 통과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갑주도 별 소용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개중에는 비교적 ‘한설’에 휘말리지 않아 운신이 자유로운 녀석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절대영도에 맞춰진 온도는 쉴 새 없이 성에와 서리를 만들어내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기만 했고.
던전 가디언들은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났다.
아니, 번번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가를 때도 많았다.
유령종 몬스터가 위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촤르륵, 촤르륵!
거기다 쉴 새 없이 빙판을 뚫고 튀어나오는 얼음 사슬은 왜 이리도 손발을 어지럽게 만드는지.
후퇴하려 해도, 어느새 후방도 이미 던전 가디언들이 빼곡 들어서고 있어서 나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청랑들은 고립무원이 되어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채로 힘을 잔뜩 빼면서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으니.
“헉, 헉…!”
“왜 이렇게 안 사라져…!”
“제기라아알!”
시간이 한창 지났을 무렵에는 서 있는 자들도 거의 없게 되어버렸다.
스걱, 스걱-
영혼을 베고, 또 베고.
마치 농부가 가을철에 수확이라도 하듯이 섬뜩한 소리만 울려 퍼지자, 타난트의 얼굴은 점차 새하얗게 변해갔다.
경악에서 충격으로, 그리고 공포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의 모습은 옆에서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사실 타난트도 움직이기가 버겁기는 똑같았다.
상반신은 이미 성에로 뒤덮였고, 하반신도 절반 이상이 빙판에 달라붙어 도저히 꿈쩍도 하질 않았다.
조금 전부터 어떻게든 빙판에서부터 떨어지려 해도, 마력이 좀처럼 쉽게 유동하질 않았다.
뭐랄까, 마력과 오러까지 얼어붙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마치 던전을 뒤덮은 추위가 살갗을 파고들어 오러홀까지 건드린 느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애당초 이런 광경부터가 납득이 가기 힘든 것이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순간에서부터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
그러다 벤시 리퍼 중에서 유독 강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녀석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끼이? 키키킥!
녀석은 한참이나 타난트를 바라보더니,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차 다가오자, 타난트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한 발.
또 한 발.
어떻게든 손발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아무리 유령이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러를 씌워서 공격한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오러를 작동시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쩌적, 쩌저적-
‘조금만… 조금만 더…!’
벤시 리퍼가 대낫을 높이 들어 올렸다. 희뿌옇게 빛나는 낫의 날이 더 두렵게 다가왔다.
‘제바아아알!’
퍼어엉!
그러다 드디어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고, 얼음이 깨지는 순간 타난트의 눈가에도 이채가 돌았다.
‘됐…!’
타난트는 재빨리 검을 위로 뽑아 벤시 리퍼의 낫질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대낫은 너무나 허망하게 검을 통과하고, 그대로 타난트의 정수리를 가르고 지나갔으니.
촤악!
마치 종이를 찢는 듯한 그런 소리가 났다.
영혼이 크게 잘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챙그랑!
타난트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면서 검이 힘을 잃고 애꿎은 바닥을 두들겼다.
바일 가문의 그림자를 자처하며 파울 바일의 수족이 되어주던 흉측한 늑대들이 허망하게 전멸하는 순간이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예로부터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바람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 속에는 수많은 망자의 한과 원념이 담겨 산 자들의 영혼을 앗아간다.
그것이 바로 북풍(北風).
엘릭이 오토 한에게서 전수받은 두 번째 권능이었다.
* * *
“와… 이거 웬만해서는 쓸 엄두도 못 내겠네.”
엘릭은 청랑을 뜻하던 붉은 점이 전부 사라지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이 한순간 다 소모되면서 탈진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엘릭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리 권능이라고 해도, 그가 여태 터득한 용해율은 거의 3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그 정도 수치라고 한다면 너무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대마왕과 용왕, 두 존재의 마력이 합쳐진 마정석의 30%였다.
이미 엘릭은 사용할 수 있는 마력량만 따진다면 이미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망성에서도 찾기가 힘들 거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끽해야 오거스틴이 비교나 할 수 있을까?
거기다.
오토 한의 사념을 흡수하면서 완성된 마력회로는 어떤가?
수많은 망(網)을 통해 마력을 운용하는 만큼 효율성은 딱히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탈진하고 만 것이다.
단 두 번만에.
물론, 그만한 위력을 보이기는 했다.
인위적으로 일정 영역 안에 절대영도의 온도를 만들어내는 ‘한설’ 앞에서는 청랑도 모두 얼어붙고 말았고.
죽음을 몰고 다니는 ‘북풍’은 실제로 망자인 유령들을 대거 끌어들여 저들의 영혼을 거둬갔으니까.
실로 권능이라고 할 만한 힘인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낭비가 너무 심해. 마력량이 더 늘어나기 전에는 정말 위험에 빠졌을 때 말고는 쓰지 못하겠는데.’
심상 세계에서 오토 한에게서 배울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심상 세계에서는 빨리 숙달될 수 있게 마력 소진에 대한 점을 넘어갔던 모양인데… 이걸 육체로 완전히 체화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엘릭은 기뻤다.
이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비장의 무기를 두 개나 갖게 된 셈이었으니까.
『북풍과 한설이라. 비기(祕技)까지 완전히 넘겨준 걸 보니, 너를 이제 완전히 ‘겨울’의 전승자로 인정했나 보구나.』
메피스토의 눈빛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토 한이 남긴 사체를 보면서도 격하게 감정을 터뜨렸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에 오토 한을 떠올리게 하는 힘까지 보게 되니 감정이 다시 뒤숭숭해진 것 같았다.
『겨울이라, 겨울…. 그럼 이 뒤는 ‘봄’인가?』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 세계를 떠나기 전에 오토 한이 했던 말이 있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겨울’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는 앞으로 사계를 모두 모아야만 한다.
-이것만 해도 엄청 강한데, 더 필요합니까?
-당연한 말을. 계절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더 크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계는 모두 시조에게서 비롯되었다. 시조가 가진 힘이 너무 턱없이 강한 나머지 전승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것을 4개로 쪼갠 것이 바로 ‘사계’였지.
엘릭으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4대 가신을 키운 스승이나 다름없는 게 시조였다니.
그것도 너무 방대한 나머지 쪼개서 가르쳐주었다?
헛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말이었지만.
반대로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본다면 다른 결론이 나왔다.
-그럼 그걸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그래. 시조의 마법이 열리게 된다.
-…!
-메르빙거의 ‘시초(始初)’라 할 수 있는 마법. 아니, 메르빙거와 인외가 있게끔 만든 ‘원시(原始)’의 마법이 네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원시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엘릭에게는 아주 깊숙하게 와 닿았다.
거기에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니,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줄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것을 전부 모으는 과정은 그리 쉽지는 않을 테지만.
엘릭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그곳이 어디냐고.
그리고 들렸던 대답은….
‘…어디였지?’
순간, 엘릭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생하고 긴 꿈을 꾼다고 해도, 깨고 나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오토 한이 말해주었던 내용에 마치 덧칠이라도 된 것처럼 잘 기억나질 않았다.
엘릭은 한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이건 절대 오토 한이 저지른 장난이나 어떤 이유를 목적으로 놔둔 장치 같은 게 아니었다.
오토 한은 정말 엘릭이 다음 안배 장소로 가길 원했고, 사계를 완성해달라는 말을 하며 ‘봄’을 얻을 수 있는 위치를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그 부분만 거짓말처럼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직접 ‘개입’했다는 뜻이었으니.
‘누구지?’
엘릭의 두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