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북풍(北風)과 한설(寒雪)
“뭐? 청랑이 대거 황도를 벗어나?”
헤르만은 갑자기 딸 이사벨이 가져온 소식에 눈을 뜨고 말았다.
파울과의 대련이 며칠 남지 않은 지금.
한창 회복에만 몰두하다 있다 말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셈이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숙부… 아니, 파울 바일의 근처에 심어두었던 눈이 해주신 말씀이니 사실일 거예요.”
“말해준 건 누구지?”
“둘째 숙부님이요.”
“아!”
이미 파울 바일을 감시하고 있었던 푸른 매의 말만큼 정확한 것도 없겠지.
헤르만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내가… 내가 알던 동생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거구나.”
어렸을 때부터 파울이 욕심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거기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당시 가문은 거대 상단을 일구고 있던 상가(商家)였고, 자신은 그와 달리 검을 쫓기로 하였으니 가문의 업은 파울이 물려받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필요하다면 가주 직이나 작위를 그에게 주겠다는 의지를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애당초 그릇된 판단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애당초 파울이 욕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헤르만이 가진 전부였으니까.
헤르만의 명예, 명성, 실력, 그의 인맥이며 지지도까지 전부.
언제나 시기가 많았던 녀석은 아버지와 세간의 관심을 독차지한 헤르만을 못마땅해했다.
상단을 가지라던 헤르만의 말?
그런 건 파울에게 있어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헤르만이 검을 쫓는다면, 그 역시 검을 쫓아서 그 자리를 빼앗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 덕분에 유서 깊은 상가였던 바일 가문은 단 한 세대에 뛰어난 검사를 둘씩이나 배출하여 단박에 무가(武家)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그만큼 형제간의 갈등은 점차 골이 깊어졌다.
그러다 헤르만이 실력을 인정받아 청사자가 되었을 때. 파울의 목표도 다음 대 청사자가 되었다.
대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욕심을 부리는 걸까?
언제 한 번은 형제간의 술자리를 가지고 속마음을 들어보고도 싶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더냐?”
헤르만은 흔들리려던 마음을 붙잡았다.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
이사벨은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눈치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사람에게 있어서 한없이 무른 분이야. 그걸… 어떻게든 내가 단단히 굳혀드려야만 해.’
이사벨은 이미 파울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풀리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리라.
그동안 이사벨이 파울을 잡기 위해 쳐둔 덫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난날 그에게 쫓기며 죽음의 위기를 겪고 난 뒤, 이사벨의 가슴에 내려앉은 한은 그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우선 숙부님들께 되도록 개입하지 않고 뒤를 밟아달라고 말씀드렸어요.”
헤르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청랑을 이끄는 힐튼과 타난트는 절대 쉽게 볼 것들이 아니다. 아우들이 나서면 길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크게 다칠 거다. 힐튼은 파울의 곁을 떠나질 않으니… 타난트가 나섰겠군.”
따지자면 타난트는 파울의 왼팔이자 칼이라고 할 수 있는 자.
원래는 가진 실력이 꽤 괜찮아 가문 내에서도 중용되었지만, 그의 심성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헤르만이 멀리하면서 파울 쪽으로 전향했었다.
“대신에 첸에게 청마(靑馬)와 청양(靑羊)을 이끌고 뒤를 쫓으라고 명령해두었어요.”
“그래. 잘했다.”
청마와 청양, 둘 모두 헤르만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단.
청랑이 가진 전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두 곳이 나섰다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헤르만은 자신보다도 훨씬 인사 관리를 빈틈없이 철저하게 하는 이사벨을 묘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한평생 검에만 미쳐있던 투박한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서 이렇게 아름답고 명석한 딸이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비록 검에 재능이 없어 청사자의 이름을 물려받을 수는 없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이 험난한 세상을 꿋꿋이 헤쳐나갈 수 있는 굳은 심기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헤르만이 검에만 정신이 팔린 동안, 대신해서 가문을 경영하기도 했었다.
‘아예 이참에 모든 교통정리를 해두는 것도 괜찮겠군.’
헤르만은 원래 눈을 뜬 직후부터 가문의 대소사를 천천히 이사벨에게 넘겨주면서 그녀가 작위와 상단을 계승하도록 만들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시기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당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과의 일이 끝나면 그러도록 하자.
그리고 자신은 청사자로서의 의무에만 집중하고, 나아가 엘릭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데에만 전념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 * *
엘릭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메피스토의 시선도 던전 복도 쪽으로 홱 돌아갔다.
『말했던 게 이거였군?』
던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소피아를 이대로 풀어주어도 되나 싶었던 의문이 풀렸다.
설마 던전 쪽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을 줄이야.
음험한 놈.
메피스토는 엘릭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피 냄새가 공기를 타고 벌써 여기까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예. 누가 제 뒤를 밟고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이리 터질 거라고 생각은 했었죠.”
『대체 언제부터 안 거냐?』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처음부터였군?』
“당연하죠. 이 정도 대비도 없이 뒤통수를 내어줄 순 없잖아요?”
엘릭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잔바리들 치워봤자 별 효과도 없을 테고, 본체가 나오게 놔뒀죠.”
정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음험한 게 아니라 음흉한 수준이었다.
『훌륭하군.』
“엥? 뭐가요?”
『마왕으로서의 자질 말이다. 역시 너는 우리 계통인 게 틀림없다.』
“죄송하지만, 저 메르빙거거든요?”
엘릭은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면서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지만.
『이미 오토 한에게서 너희 가문의 비밀에 대해서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데?』
평소처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엘릭과 다르게, 메피스토의 두 눈은 여전히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엘릭도 메피스토의 기질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표정을 굳히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냐?』
“역시 메피는 알고 있던 거네요? 본 가의 비밀.”
『어쩌면 네놈이 아는 것보다도 더?』
평생을 싸워온 숙적에 대해서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할 테지.
엘릭은 말의 행간에 섞인 의미를 읽고 더 깊이 쌓인 의문을 물어볼까 했지만, 그대로 삭였다.
기다려라. 그럼 알게 될 것이다.
오토 한의 당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건, 어쩌면 이걸 두고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괜히 이런 식으로 찔러보지 마시죠?”
『이런. 들켰나?』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엘릭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고개를 다시 입구 쪽으로 돌렸다.
평소에 메피스토와 같이 붙어있고, 그를 골려 먹고는 있다지만 절대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지금처럼 계속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릭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휘이이!
손바닥 위로 입체적 형상을 띤 던전의 지도가 떠올랐다.
엘릭이 지나온 길부터 미처 파악하지 못한 구석구석까지. 심지어 던전 가디언들의 위치며 움직이는 동선까지 전부 보이는 조감도(鳥瞰圖)였다.
오토 한의 사념을 흡수한 이후, ‘겨울’에 대한 계승을 완전히 마치면서 던전의 소유권까지 전부 획득한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던전의 조감도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디언의 통제권까지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던전 입구에서부터 붉은색으로 색칠된 점들이 대거 안으로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적으로 인식된 청랑이었다.
『뭘 어떻게 하려고?』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면서 엘릭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배운 게 있으면 어떻게든 써 먹어봐야죠. 안 그래요?”
엘릭은 차갑게 웃으면서 마침 입구 쪽에 있던 가디언을 뜻하는 푸른 점 세 개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이것들을 상대하는데 굳이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서 오토 한이 가르쳐준 권능을 하나하나씩 써볼 생각이었다.
* * *
“잠깐. 정지.”
타난트는 던전으로 들어가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복도를 따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청랑들은 명령에 따라 일제히 정지했다. 여차하면 즉각 움직일 수 있게 대기했다.
‘어디지?’
그사이 타난트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분명히 던전을 따라 흐르던 마력향의 성질이 바뀐 건 확실한데… 어떤 식으로 작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릭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기습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던전 가디언이 침입자를 읽고 가드 시스템을 작동시킨 건지도 빨리 파악해야만 했다.
거기에 따라 대응 방식도 달리해야만 했으니까.
던전이라는 지형은 목표물의 퇴로를 끊어 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때때로 가디언 같은 방해꾼들이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순간.
쩌적-
어디선가 갑자기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동굴 안에서 고드름이라도 떨어졌나 싶었을 테지만.
타난트는 절대 그렇게 안일하게 넘기지 않았다.
엘릭 메르빙거가 빙계 마법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자라는 건 이미 모든 파악이 끝난 상태였으니까!
‘전자다! 눈치를 챘다!’
그렇다면 녀석이 공격해올 방향은…?
“밑을 조심해라!”
타난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바닥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면서 빙판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청랑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제자리에서 떨어지려 했다.
그 순간.
촤르륵, 촤륵!
얼음 결정으로 이뤄진 사슬이 대거 튀어나오면서 청랑들의 하체를 집요하게 노렸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차차차창!
따다다당-
그들의 동체 시력으로는 날아오는 화살조차도 피할 수 있었으니, 이런 사슬 따위쯤이야 하는 콧방귀만 나올 뿐이었다.
오히려 얼음 사슬을 부수고 안으로 전진하려 했지만.
“무슨…?”
“젠장!”
얼음 사슬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내구도가 대단했다.
부서지기는커녕 흠집도 나지 않은 채로 달려드는 통에 그들은 황급히 검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오러를 끌어올려야 했다.
퍼퍼퍼펑!
그제야 얼음 사슬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가고, 파편이 우수수 쏟아지면서 가루가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휘이잉-
별안간 돌풍이 불어닥치면서 얼음 가루를 사방으로 비산시켰다. 청랑의 시야가 순식간에 순백색으로 물들고, 기온이 절대영도(絶對零度)로 확 가라앉았다.
일정 범위의 영역을 순식간에 툰드라 지대처럼 만들어버리는 권능.
한설(寒雪).
그것이 처음으로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그렇게 순식간에 얼음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로, 타난트가 다시 눈을 뜬 채로 보게 된 것은.
절반에 가까운 수하들이 꽁꽁 얼어붙은 채로 서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