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오토 한
“결국 가버렸군.”
오토 한은 가만히 엘릭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면서 뒷짐을 지다가 천천히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주름이 져 있었다.
분명히 엘릭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피부가 너무 깨끗해서 노신사의 이미지가 강했건만.
한순간 수십 년의 세월이 주는 풍파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피부에는 검버섯이 가득하고, 눈에 초점도 잘 잡히질 않고 있었다. 허리도 굽어 쉽게 펴지질 않았다.
엘릭은 모를 테지만, 그는 이 세상에 남겨뒀던 마지막 마력까지 엘릭에게 넘긴 상태였으니.
아무리 엘릭이 재능이 넘쳐나더라도 그렇게 빨리 마력회로가 완성될 수 있었던 건 그의 숨겨진 노고가 있었던 덕택이었다.
과연 저 시건방진 후손은 선조가 이만큼 고생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는지.
알더라도 과연 고맙다는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오토 한은 엘릭을 원망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애당초 가문을 그만큼 중흥시키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이런 안배를 남겼던 것부터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자기만족에 가까운 작업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작업이 끝난 지금.
오토 한은 드디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안식을 맞이할 수 있단 사실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저쪽 세계에서 과연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끝까지 쫓아가 다시 받아 들여달라 간청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르르-
오토 한의 잔상은 조용히 백색 세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음 녀석이 참 고생이 많겠어.”
그가 남긴 혼잣말만이 메아리처럼 작게 울렸다.
* * *
“헉, 헉, 헉!”
소피아는 엘릭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다르게 먹을까 싶어 도망치듯 나와야만 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러다 던전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쯤에.
“하아…!”
그녀는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엘릭이 설사 쫓아온다고 해도 어떻게든 도망칠 구석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소피아는 한순간 살아남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던전에 남아있는 것들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중에 조금이라도 갖고 나왔다면….’
제국법상으로도 원래 던전의 소유권은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있지 않던가?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 던전의 소유권도 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지금은 쫓기듯이 도망쳐 나왔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입장에서 엘릭은 던전을 강탈한 강도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 소송이라도 걸어서 확 뺏어버릴까?’
엘릭의 분노를 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던전에 대한 미련과 욕심도 완전히 버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자신이 이곳의 발견자라는 증거는 몇 가지 남겨둔 상태.
다행히 재판부 쪽에 평상시 갖고 놀던 애인이 있기도 했으니… 어떻게 손을 쓰면 완전한 소유권까지 주장할 수는 없어도, 합의금 명목으로 일부 정도는 뜯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물에 빠졌을 때와 건져졌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그녀가 딱 그 꼴이었지만.
어쩌겠나. 원래 그렇게 배우고 자란 것을.
그리고 소피아는 세상만사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즐기기를 좋아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소피아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눈빛을 달리하면서 일단 숲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그때.
“…뭐지?”
소피아는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허리를 쭈뼛 세워야만 했다.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벌레 소리 하나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동굴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서는 순간 죽는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울렸다.
여기서 나가야만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감이 제법 좋은 계집이로군.”
문제는 아주 잠깐의 그 머뭇거림이 그녀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점이었다.
소피아는 어느새 동굴 입구까지 빠르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하나 같이 살벌한 기세를 자랑하는 기사… 아니, 투견(鬪犬)들.
기사를 상징하는 갑주와 투구를 입었지만, 명예와 긍지를 위해 검을 드는 이들과는 풍기는 기질부터가 전혀 달랐다.
오로지 욕망과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싸움꾼들.
그녀와 마찬가지로 음지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이들만이 풍기는 특유의 음습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들이 두른 망토에 그려진 푸른 늑대를 본 순간… 소피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청랑…!’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청사자가(靑獅子家)에서도 유일하게 그림자에서 활동하며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는 청소부들.
그들이 왜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마법사인 릭이 대체 이들과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는데….
‘릭…? 엘릭 메르빙거였어! 라센트의 영웅! 청랑을 무찔렀던…!’
음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라센트 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파울 바일의 명령을 받은 청랑 2, 3조가 이사벨의 뒤를 쫓았고, 그 과정에 엘릭 메르빙거와 엮이면서 벌어졌던 분란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이사벨을 거의 다 잡았다가 놓치게 된 파울 바일의 분노가 엄청났다던가?
엘릭 메르빙거의 뒤도 열심히 쫓았지만, 결국 그가 메르빙거의 가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중에 추적을 중단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사이에 다시 칼을 빼 들기로 마음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소피아, 그녀는 재수 없게 그 과정에 휘말리고 만 것이고.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엘릭의 소재지와 던전의 구조를 말해주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뭐라도 말을 하려 했지만.
스걱!
이미 그보다 먼저 청랑의 날카로운 이빨이 그녀의 명줄을 물어뜯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생존자는 한 명도 남겨두지 말라는 명령을 받아서 말이지.”
청랑 1조의 조장, 타난트는 차갑게 미소를 흘리면서 소피아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았다.
철퍼덕!
쓰러진 시체에서부터 피가 줄줄 새어 나오면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안으로 돌입한다.”
타난트의 명령에 따라 1조를 비롯한 청랑의 모든 인원이 일제히 던전에 투입되었다.
* * *
“엘릭 메르빙거의 목, 이번에는 들고 올 수 있을 테지?”
파울 바일의 두 눈에 광기와 분노가 일렁였다.
그럴수록 모사꾼 힐튼의 머리는 더더욱 깊게 조아려졌다.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런 애매한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요즘 힐튼, 자네가 하는 일이 영 신통찮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힐튼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한다고 한들, 주군에게는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군은 언제나 성공한 결과를 바랄 뿐이지, 실패나 변명 따윈 절대 용납하지 않는 주의였다.
그나마 그가 여태 숨이 붙어있는 것도 그동안 그의 입지를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워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엘릭 메르빙거의 머리는… 나로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엘릭 메르빙거가 라센트의 영웅이 되고, 이사벨이 ‘가주 직을 탐내는 숙부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당한’ 피해자 포지션이 되었을 때부터.
파울 바일을 둘러싼 악명은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가고 말았다.
그 때문에 가문 내에서도 파울 쪽으로 지지 의사를 보이던 이들도 일제히 지지를 거둬들이고 말았으니.
그동안 헤르만의 활약 덕분에 바일 가문에 씌워진 ‘공명정대한 가문’이라는 인식을 자긍심으로 삼고 있던 기사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추문(醜聞)이었던 것이다.
사자란 강하기도 강해야 하지만, 그만큼 명예롭게 움직여야 하는 법.
하지만 파울은 그것을 해내지 못했으니. 늑대의 우두머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자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무 능력도 없는 이사벨이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는 한, 언젠가 기사들의 지지도 파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던 중에 헤르만이 입마증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는 소문이 퍼졌단 점이었다.
거기다 헤르만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청사자가의 ‘장로’ 직을 지내고 있던 푸른 매도 이사벨의 편에 섰으니.
당연히 기사들은 소문의 진실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파울은 어떻게든 사실 여부를 알아내려는 한편, 헤르만에 대한 음해 공작을 펼쳐야만 했다.
헤르만이 일어난 것이 사실일지는 몰라도, 결국 두 번 다시는 검을 쥘 수는 없을 거라는 음해를.
그사이에 가문의 주도권을 휘어잡아야만 한다는 것이 파울과 힐튼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두 사람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과를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헤르만이 파울이 보낸 자객들을 따돌리고 회복을 위해 엘릭을 따라 흑의 설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파울은 가문의 주요 요직을 대부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는 데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파울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실행하려던 계획이 전부 이사벨의 손바닥 위에 있었으며 거기에 대응하기 위한 계획도 이미 물밑에서부터 따로 이뤄지고 있었단 사실을.
헤르만과 이사벨은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차마 이사벨을 지지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헤르만의 충복이라 불렸던 이들에게 비밀리에 접선하는 것을 시작으로.
몇몇 무력 부대에 있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파울에게 거짓 충성을 맹세해도 좋다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자신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호응하며 나서 달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헤르만이 푸른 매와 이사벨을 대동한 채로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바일 가문은 크게 들썩이고 말았다.
이미 헤르만과 접선했던 인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전향을 맹세했다. 기사들도 대거 헤르만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으니.
그로 인해 바일 가문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다시 대권을 차지하려는 헤르만과 어떻게든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파울. 두 사람의 세가 상당히 비슷했던 것이다.
아니, 명분은 헤르만이 쥐고 있었으니 오히려 대세는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쭉정이만 가져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결국 파울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만 했으니.
“형님과 엘릭 메르빙거, 그 둘의 관계가 아주 각별하다고 들었다. 형님의 심기는 어떻게든 한 번쯤 흔들어놔야만 한다.”
파울은 헤르만이 겉보기에는 온전해 보여도, 그를 다시 목도한 순간 그가 실상 아직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승부결(勝負結)을 맺자는 제안을 던졌다.
1주일 뒤, 정오. 만인이 볼 수 있는 황도의 중앙 광장에서 대련을 벌이자고.
거기서 승리하는 사람이 바일 가문의 가주가 되자고 말이다.
결국 누가 뭐라 해도 결국 사자가 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은 ‘실력’이었으니.
헤르만도 원하던 바라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의 수족들을 데리고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파울은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청사자인 헤르만은 무섭지만,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한 그는 충분히 넘어볼 수 있을 만하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파울도 그동안 훈련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무작정 정정당당하게 승부에 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바.
힐튼에게 일러 엘릭의 머리를 들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헤르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놓기 위해서.
이미 한 차례 입마증을 겪었던 양반이니만큼, 다시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입으면 집중하기 어려울 거란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파울은 시건방지게도 자신에게 경고장을 날렸던 엘릭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비록 찬성공작이라는 작위를 함부로 해쳤다가 돌아올 파장이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미개척지로 들어가 버렸으니, ‘불행한 사고’로 죽는다 한들 누가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인가?
헤르만과 이사벨은 분명 눈치를 챌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심증만으로는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할 수 없을 터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