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오토 한
퍽!
살갗을 파고드는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하지만 소리가 들려온 건 엘릭 쪽이 아니었다.
“네… 가… 어떻… 게…?”
녀석이 고개를 돌리자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뒤에 서 있던 소피아가 보였다.
“뭘 어떻게야? 네가 뒤통수쳤으면 너도 똑같이 뒤통수 맞을 각오 정도는 했어야지. 난 분명히 말했어. 안에 들어오면 위험할 것 같다고.”
그 위험할 것 같다는 말이 나름 자신들을 향한 경고였구나.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소피아의 실력이 원래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나 은밀한 접근이라니.
나름대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착각이었던 셈이었다.
물론,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답게 그도 하나쯤 숨겨둔 패가 있기는 했지만.
그저 소피아의 수준이 그가 가진 패를 아득히 초월했을 뿐이다.
자신의 목젖을 뚫고 나온 단검을 보며 뻐끔거리는 사내의 입에 피거품이 부글거렸다.
몸에 힘을 주려 해도 자꾸만 밑 빠진 독처럼 자꾸만 쭉 빠져나가기만 했다.
쿠르륵-
털썩!
사내는 결국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소피아는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면서 시체에서 단검을 거둬들였다.
이렇게 한파가 몰아치고 있건만. 등 뒤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사실 녀석이 가지고 있던 착각과 달리, 소피아는 숨겨둔 수 따윈 거의 없었다.
있던 것도 전부 던전을 빠져나오는 중에 써먹었으니까.
그런데도 기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던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짙은 마력향 때문이었다.
‘이게 감각을 흐리게 만들고 있어…. 심지어 판단력까지도.’
소피아가 두 사내에게 던졌던 경고는 절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엘릭이 깨운 보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절대 그저 그런 물건이 아닌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던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험악하기 짝이 없는 뒷골목에서 살았던 그녀는 언제나 본능에 의지한 채로 살아왔고, 덕분에 번번이 위기가 닥칠 때면 직감적으로 빠져나오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피아는 이번에도 보물이 자꾸만 사고력을 흐리게 만드니 조금만 더 냉정해지고자 했지만… 보물에 눈이 먼 두 사람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먼저 분란을 일으켰고, 결국 멍청하게 소피아에게 뒤를 내어주면서 잡히기까지 했다.
두근!
두근!
소피아는 숨을 크게 골랐다. 지금도 자신을 자꾸만 자극하는 마력향의 유혹을 어떻게든 떨쳐내려 하면서 뒤로 최대한 떨어지고자 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계속 오래 있다간 그리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쉽긴 해도, 어차피 남은 두 놈의 보물까지 내가 독차지하면 그런대로 남은 생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거야. 밖에 있는 던전 가디언도 이 릭이라는 마법사에게 해치우라고 하면 될 거고.’
엘릭과 손을 잡는 것이 당장에는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았다.
그러던 그 순간.
“제법 예리한데?”
소피아는 한순간 등골을 쭈뼛 세워야만 했다.
아직 보물과 씨름 중인 줄로만 알았던 엘릭이 어느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니까.
“다, 당신…?”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고?”
소피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릭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소피아에게는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글쎄. 너희들이 칼 들었을 때부터?”
“…!”
소피아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저 말은 곧,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봤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눈치 빠른 소피아는 그 속에 담긴 무서운 메시지 또한 읽어냈다.
만약 죽은 두 녀석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똑같이 휘말려서 죽었을 거라는 메시지.
‘그러고 보니…!’
그러다 소피아는 뒤늦게 엘릭이 이제는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조금 전까지 엘릭이 보였던 태도가 무뚝뚝하고 정갈한 태도만을 고수했다면, 지금은 자신만만하고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현재의 모습이 제 옷을 입은 것처럼 너무 잘 어울렸으니.
그 말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우리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대체 어디서부터 들킨 걸까. 소피아는 팔뚝을 따라 소름이 저절로 돋았다.
그를 함정으로 빠뜨리려 했지만 사실은 멍청하게도 자신들이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셈이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의 눈에는 얼마나 웃겼을까?
‘일부러 우리가 이곳으로 인도하게끔 만들었던 거야.’
어쩌면 엘릭도 이 던전을 찾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애당초 던전의 주인이 엘릭이었던 것 같았다.
“오. 상황판단력도 제법인 것 같고.”
엘릭은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동굴 표면을 얼어붙게 만들던 한파와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짙었던 마력향도 가라앉았다.
아니, 조금 달랐다.
‘갈무… 리?’
소피아는 던전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마력이 엘릭에게로 흡수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던전 가디언을 다루고, 유령 기사들을 움직이던 마력들이. 아니, 던전을 구성하던 모든 코어(Core)가 그에게 귀속된 게 틀림없었다.
“이것도 느꼈나 보네?”
엘릭은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소피아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마나에 민감한 것도 그렇고… 만약 제대로 훈련을 받았다면 괜찮은 마법사가 됐을 것 같은데 말이지.”
소피아의 귀에 엘릭의 감탄 따윈 들리지 않았다.
털썩!
그녀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에이. 야, 이러지 마라. 누가 들으면 내가 지금 당장 널 죽이려 드는 줄 알겠네.”
엘릭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소피아의 떨림은 더욱더 커졌다.
“살려주세요!”
“너희는 날 죽이려 들어도 되고, 나는 안 되고?”
“무, 무엇이든지 다 할게요! 저 뭐든 다 잘해요, 시켜만 주세요. 시녀 일도 해봤고, 도둑질도 해봤고, 안 해본 게 없으니,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은…!”
소피아는 싹싹 빌었다. 살아야만 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할 때에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아끼지 않았다.
“뭐, 여기서 시체 늘려봤자 치우는 것만 귀찮으니까. 그래. 가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다 엘릭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소피아는 그가 행여 생각을 바꿀까 싶어 재빨리 일어났다.
“아, 너희들이 가져왔던 건 전부 두고 가고. 원래 이 던전에 있던 물건들이었지?”
한순간, 소피아는 움찔거렸지만, 그것도 엘릭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 미련 없이 도망쳤다.
다행히 던전 가디언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 그녀를 막지 않았다.
『미친개처럼 잘도 뛰는군. 근데 저대로 도망치게 놔둘 거냐? 괜히 던전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만 커질 터인데.』
메피스토는 자신이 알던 엘릭이 맞나 싶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여태 자신이 알던 엘릭은 절대 이런 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싹수가 될 만한 것들도 뿌리째 뽑아버리는 악인에 가까웠지.
“어차피 던전 밖으로는 한 걸음도 못 내디딜걸요?”
『…?』
메피스토는 이건 또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있어요. 그런 거.”
엘릭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결국 메피스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릭이 저렇게 말하면 보통 다른 음흉한 계획이 꼭 하나쯤은 숨겨져 있었으니까.
오죽하면 그가 능구렁이라고 부를까?
“그보다 어때 보여요?”
엘릭은 닫았던 마력을 다시 한껏 개방하면서 메피스토 앞에 몸을 보였다.
메피스토의 입술이 한껏 비틀렸다.
『뭔가… 얻었나 보군. 권능인가?』
“빙고.”
『‘겨울’을 완성했군. 오토 한의 완전한 전승자가 되었어.』
흑요석처럼 짙은 메피스토의 동공에 힘이 잔뜩 실렸다. 입술은 잔뜩 비틀려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의 야망을 꺾었던 숙적의 힘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마력회로도 열린 것 같고.』
하지만 메피스토의 관심을 가장 많이 잡아당기는 건 따로 있었으니.
엘릭의 마력 순환을 담당하던 마나 로드가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마력회로(Spell-power Circuit).
그건 아무나 구성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회로’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마력 통로(마나 로드)를 개척해둬야만 했으니. 그 뒤에도 마력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어야 하고, 각 통로의 개폐(開閉) 여부가 단순히 의지만으로도 쉽게 이뤄질 수 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마력회로는 만드는 과정이 아주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노력과 기간을 필요로 했고.
하지만 한 번 완성해두고 나면, 각 마법 학파에 맞는 순환로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만능(萬能)에 가까워지는 지름길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고대에는 꽤 많은 마법사들이 이것에 도전했고, 그 결과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험난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이 시대에는 마력회로와 관련된 전승이 실전된 것 같아 의아하기만 했었건만.
엘릭이 그것을 들고 찾아오니 기분이 묘하게 다가왔다.
마치 봉인되기 전, 천년 전으로 한순간 돌아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짙은 향수가 느껴지기도 했다.
“한 달입니다.”
『…?』
“한 달이나 걸렸다구요. 이거 완전히 숙달되는데.”
『….』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으!”
엘릭은 심상 세계에서 권능을 익히고 이것을 보조하는 마력회로에 대해 배우는 동안, 오토 한에게 굴림을 당해야 했던 시간이 너무 끔찍했던 나머지 몸을 몇 번이나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그럴수록. 메피스토로는 어이없는 나머지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지만.
과연 이놈은 알까?
고대에는 그렇게 모질게 고생을 해서라도 마력회로를 완성하고 싶어 했던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런 것을 한 달 만에 완성하고서 저런 태도라니.
만약 천년 전으로 끌고 갈 수 있다면, 기만죄로 치도곤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메피스토는 엘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놈, 이제는… 정말 군장 급에 거의 다다른 것 같은데.’
워낙에 체내에 담고 있는 게 많아서 그럴까?
엘릭이 그동안 보고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것들이 한창 무르익은 듯한 느낌이었다.
저것이 어떤 일을 계기로 제대로 전부 개화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웬만한 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영력도… 격도 그만큼 높아졌다.’
메피스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엘릭이 마력회로를 얻고 마정석의 용해율을 높인 만큼.
그와 연결된 자신도 더 이상 단순한 부유령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츠츠츠-
파직, 파지직!
활짝 펼친 손바닥 위로, 마나 스파크가 뇌기처럼 몇 번이나 위로 튀어 올랐다.
그럴수록.
그의 두 눈도 깊게 가라앉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