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오토 한
예언의 아이.
천 년도 더 전의 시조가 점지한 후손이 바로 자신이라니.
엘릭은 어쩐지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엿 같네.’
절대 기쁨 따위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신격을 달성한 시조가 지목한 만큼 자신이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원하지 않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굴레 속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도 같이 들었던 것이다.
그 길이 힘들 것 같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애초에 마법사의 길을 걷지도, 가주 직을 물려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책임감 강한 누이에게 던져두고 유유자적했으면 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어린 시절부터 누차 다짐해왔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
하지만 엘릭이 바랐던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었지, 누군가가 숙명을 씌워주는 게 절대 아니었다.
“역시. 기뻐하는 얼굴은 아니구나.”
그리고 오토 한은 엘릭의 표정을 읽고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역시 그동안 엘릭을 상대하면서 이 시건방지면서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후손이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엘릭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좋아할 수가 없잖습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지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 일이 결정되었다는데. 전 어디까지나 제 의지로 일어서고 싶은 것뿐입니다.”
“예언이 무조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예언은 예언일 뿐이라는 거다. 시공을 초월한 전지(全知)라는 건 어디에도 없지. 저 위대한 신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는 무수히 많은 선택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엘릭은 쉽게 설명해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너도 그 변화의 일부를 겪어 봤을 텐데?”
순간, 엘릭은 뚝 멈추고 말았다.
머릿속으로 율호왕과 관련된 사건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게 정말…!”
“새롭게 채택된 ‘선택’ 중 하나이지. 그로 인해 변화는 시작되었고, 굴레도 거기에 맞춰서 진행되었음이니.”
엘릭은 이제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안배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과거에 손을 댈 수 있었는지 물어보지 마라. 나 역시 시조가 예언의 아이를 위해 남긴 여러 안배를 그저 실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우스던이 또 도중에 뭔가를 보고 나서 부족분을 개량한 것이고.”
“….”
뭔가를 보았다.
조부님은 언젠가 태어날 자신의 손자에게서 또 무엇을 보셨던 걸까?
아니, 그보다 그분에게는 아무런 안배도 닿지 않았을 텐데, 대체 손자의 운명을 어떻게 아셨던 걸까?
“시조의 뜻이 어떻게 되는지, 그가 보았던 예지가 대체 정확하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그건 다른 3명의 가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신이 될 수 있었지만, 인간으로 남았던 시조의 의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안다.”
오토 한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언이니 뭐니 해도 결국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너의 몫이라는 점이다. 운명을 개척하는 것도, 숙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솔직히 네가 그것들을 전부 걷어차고 나서 안배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제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맞는 말이기에 엘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영 못마땅한 건 여전했다.
“뭐가 됐던 간에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마음대로 하래도.”
“스스로 무슨 일을 할지 하는 결정도 제가 하는 겁니다.”
“그것도 네 마음대로.”
“…너무 순순하게 받아들이니까 재미없는데.”
“허허허허.”
오토 한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래도 안배가 싫다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지?”
“그걸 왜 싫어합니까? 가장 빨리 강해질 수 있는 지름길인데.”
“그래. 좋은 자세로다. 결국 너는 네 의지대로 운명과 숙명의 길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니.”
“젠장.”
엘릭은 어쩐지 이런 의사결정까지 자신의 성격을 ‘예지하고’ 안배를 깔아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의 길이 무의미해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시조가 던진 굴레를 완전히 깨뜨릴 방법이 있긴 하지.’
엘릭의 두 눈이 순간 빛났다.
‘시조를 뛰어넘는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오토 한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라볼 정도였다.
‘그런다면 결국 모든 예언도, 숙명도, 굴레도 벗어난다는 뜻이 될 테니까.’
그러려면 받을 수 있는 건 최대한으로 받고, 챙길 수 있는 것도 최대한 챙겨야겠지.
엘릭은 오토 한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뭘 주실 겁니까?”
“뭘 말이냐?”
“사가로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걸 주려고 그러시는 거 아녔습니까?”
“이렇게 너무 다 안다는 듯이 말하면 재미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뭡니까?”
마치 맡긴 걸 돌려달라는 투.
오토 한이 짓궂게 웃었다.
“이렇게 재촉하다가 내가 변심해서 안 가르쳐주면 어떡하려고?”
“안 그러면 그 예언인지 뭔지를 깨는 것도 시간이 걸리게 되는 거죠, 뭐.”
엘릭은 어쩌겠냐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장 가르침을 주지 않아도, 언젠가 자신이 그 내용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잔뜩 묻어났다.
오토 한도 그걸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동안 이 후손이 밉지 않았던 것도 전부 이런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가르쳐주마.”
순간, 엘릭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동계의 인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분명히 여태껏 배웠던 것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될 테니까.
실전된 가전 마법의 비기(祕技)에 해당할 게 분명했다.
“동계의 인장은 원래 마족으로 치면 군장 급, 나아가 마왕과 대마왕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나의 진명일지니.”
오토 한이 손을 허공에다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배경이 다시 바뀌었다.
그곳에는 오토 한이 홀로 흑의 설원을 거닐면서 ‘겨울’을 몰고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총 두 가지였다.
“동계의 인장은 총 두 가지의 권능을 깨우치는 데서 비롯된다.”
엘릭의 가슴에 한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권능(權能).
마법이 법칙과 진리를 좇으며 그것을 모방하여 세상에 구현해 내는 행위라고 한다면.
권능은 그런 법칙과 진리를 의지만으로 강제로 비트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지만.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내용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으니.
한계선이 명확하게 다르기 때문에 당장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발전할 수 있는 영역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괜히 권능을 가리켜 ‘신의 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권능을 가르쳐 준다?
당연히 엘릭으로서는 눈이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 권능은 각각 ‘북풍(北風)’과 ‘한설(寒雪)’이라 불린다.”
북풍.
북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눈발이 날리며 건조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이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삭막함만이 감도니.
그야말로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가뭄과 흉작을 가리키는 재해의 대명사(代名詞)였고, 목축을 하는 이들에게는 아사와 몰살을 의미하는 공포의 대명사(大名辭)였다.
한설.
차갑게 불어 닥치는 추위와 끝도 없이 쌓이는 눈은 세상만사에 꽃피우던 모든 생명을 앗아가고 죽음을 가져다주기만 하니.
그 속에서 이뤄지는 죽음은 모두 소리 없이 다가온다. 조용한 죽음이야말로 생명체에게는 평온한 안식이면서도, 아무 징조도 없이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았다.
“이것을 모두 갖춘다면 너는 완전한 ‘겨울’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니. 그때, 동계의 인장은 다시 한번 탈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동계의 인장 위에 또 다른 등급의 인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낼 열쇠가 바로 두 권능이었고.
엘릭은 알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구성 요소는 그동안 네가 터득했던 냉혹과 삭풍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엘릭은 가만히 오토 한의 강론에 빠져들었다.
그에게서 사사할 수 있을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 * *
“무,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소피아 일행은 공동을 가로지르려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엘릭이 들어갔던 깊숙한 방에서부터 갑자기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엘릭이 던전 가디언들을 잡느라 펼쳤던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돌풍이었다.
휘휘휘!
파아아-
“저거 설마…?”
“저 새끼, 아무래도 진짜 보물을 하나 깨운 거 같은데?”
“이런 개새끼가!”
소피아 일행은 자신들이 발견한 만큼, 오토 한의 사가에 대한 모든 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엘릭이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을 깨운 것으로만 보였으니.
도와주러 왔으면서 도리어 보물에 눈이 멀어 훔치려 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엘릭을 실컷 부려먹고 처치할 생각만 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화가 단단히 날 수밖에 없었으니.
혹여 저 보물 때문에 엘릭이 더 큰 힘이라도 얻는 때는 정말 처치하기가 힘들어질 테니까.
그러니 오히려 지금이 처치하기에 가장 최적기라고 판단했다. 보물에 눈이 팔린 지금이야말로 가장 방심하고 있을 테니까!
“잠깐, 기다려!”
하지만 그런 판단을 내린 두 사내와 달리 소피아는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뜯어말리고자 했다.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저기엔 아직 유령 기사들이 열 구나 있었다. 저들이 달려들어서 어쩌자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안 도와줄 거면 꺼져!”
하지만 이미 보물에 눈이 완전히 먼 두 사내는 소피아의 제지를 물리치고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눈보라가 아무리 거칠다고 해도 걷는 것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고, 유령 기사들도 어쩐 일인지 부복한 채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엘릭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도 유령 기사들은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니.
엘릭도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 무방비 상태로 보였다.
칼만 휘둘러도 금세 죽을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모습.
두 사내는 슬쩍 서로 간에 눈빛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엘릭을 처치하고 보물을 빼앗아 소피아도 마저 해치우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렇게 한 명이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거, 억울해하지 말라고. 네가 가진 것도 우리가 요긴하게 잘 써줄 테니까 말이지.”
이미 그들은 엘릭이 값진 아티팩트도 한두 개쯤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만한 나이에 이렇게 강할 수가 없을 테니까. 보아하니 귀족가에서 곱게 자란 영식 같은데, 그만한 놈을 미개척지로 보냈으면 상당한 양의 재화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칼을 뽑아 든 놈은 다음 걸음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뒤통수에 단검이 깊숙하게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쿵!
결국 녀석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남은 녀석이 단검을 던졌던 손으로 다른 단검을 꺼내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목표는 엘릭의 미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