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오토 한
‘이들을 정녕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엘릭은 메르빙거와 마족들이 벌이는 전쟁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창세기(創世記)의 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마족은 어둠, 그 자체였다. 대마왕들이 어떤 마법을 발현할 때마다 어둠이 출렁이면서 세상을 강제로 새카만 칠흑으로 물들이려 했고.
메르빙거 측은 그때마다 새하얀 빛을 벼락처럼 떨어뜨리면서 어둠을 몇 번이고 찢어놓고자 했다.
불, 물, 바람, 대지… 흔히 물리 속성의 근간이라 불리는 4대 원소가 재해의 형태로 몇 번이고 대지를 휩쓸어댔다.
때문에 메르빙거가 처음 서 있었던 절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대신에 그아래 보이지 않던 크고 작은 산들이 융기했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엘릭으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격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쩐지 비슷… 하다?’
펼쳐지는 마법의 규모에 압도되어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지만, 자세히 보면 두 진영의 마법은 사뭇 비슷한 곳이 많았다.
메르빙거의 마법은 일반적인 인간 체계의 마법과 성질이 많이 달라 보였고, 네 대마왕의 마법도 일반 마족이 부리는 흑마술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반면에 두 곳의 마법은 상당히 비슷한 모습이 많았으니.
색도 기질도 전혀 다르건만.
심지어 그 속에 담긴 마나 배열이며 결의 흐름도 다른데도, ‘형체’만큼은 비슷하게 보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래. 마치 같은 동류(同流)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각자 전혀 다른 인생을 살다 보니 성격 역시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턴가 더 큰 힘을 갈구한 나머지 마(魔)에 물들며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뒤늦게 그 잘못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마도경식에 내재되어 있던 목소리는 말했었다.
자신들은 속죄(贖罪)를 하고 있노라고.
어쩌면 그 말뜻은….
“맞다. 그 말이.”
그 순간, 엘릭의 생각을 읽고 뒤에서 오토 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오토 한과 비교했을 때보다 훨씬 차분하고 중후한 목소리.
젊은 시절 철부지에 불과했던 그도 세월이 지나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진 듯했다.
엘릭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70대 노인의 모습을 한 오토 한은 어쩐지 안경 너머로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감정도 아주 다양했다.
그리움, 간절함, 슬픔….
안타까워하는 감정들이 격렬하게 소용돌이를 치다가 다시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과거를 보는 그의 감정은 하나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한(悔恨).
“우리는 속죄를 하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마를 먹고, 삼키며, 마시는 형태로. 박멸하고 소멸시켜서 아예 이 땅에서 모든 인외를 지우려 들었지.”
“메르빙거가 원래 인외였던 겁니까?”
엘릭은 언제부턴가 속으로 삭이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질문.
하지만 그동안 이 질문을 묻어두었던 건, 마음 한편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태껏 증오하고 미워하라고 배워왔던 존재들이, 원수라고 들었던 존재들이 사실 원류(原流)라고 한다면 그만큼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으니까.
일부러 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이런 광경도 보았으니 어느 정도 이해도 되었다.
그런데 오토 한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럼…?”
“그보다 더 근본적인 거였지.”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의문.
“우리 메르빙거도, 마라고 통칭되는 인외도 같은 원류에서 비롯된 동전의 양면이란 뜻이란다.”
“…!”
“현재 세간에 널리 알려진 마법의 원류… 그렇게 봐도 되겠지.”
엘릭으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영역의 범주였다.
“그럼 시조와 마신은…?”
“그들 역시 동전의 양면이나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면 된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서로가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대립하고 말았던 이들. 우리 메르빙거는 인외를 이 세상에 풀어둔 것이나 마찬가지인 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했던 것이고.”
엘릭은 기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시조도 역시 마신과 같은 신격의 반열에 오른 존재란 뜻이지 않은가.
신혈(神血)이라니.
엘릭은 전설에서나 듣던 단어를 들으니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 마법의 원류란 대체 무엇입니까?”
순간, 오토 한의 미소가 다시 익숙한 모습을 띠었다. 짓궂은 미소.
“비밀이다.”
“…무슨?”
꼭 의문을 다 풀어줄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여기서도 장난질인가.
“아직 네가 몰라도 되는 부분이다. 그런 정보까지 개방해주면 지금의 너에겐 너무 큰 짐이 될 터이니. 우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차례로 열어줄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려무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엘릭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원류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놓칠 수밖에 없는 것.
“여하튼.”
오토 한은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메르빙거와 인외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서로를 죽이려 안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전쟁은 계속 길어지면서….”
오토 한의 시선이 여전히 발아래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4대 가신과 4명의 대마왕들에게로 향했다. 엘릭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따라갔다.
“우리의 승리로 끝났지.”
쿠쿠쿵!
전황은 4대 가신 쪽으로 기울었다.
가장 먼저 광기의 마왕, 아자젤이 찢긴 채로 소멸했다. 난교의 마왕, 릴리스는 아름답던 날개를 모두 잃은 채로 바닥에 곤두박질쳤고, 파멸의 마왕인 샤이탄은 팔다리가 잘린 채로 분통을 터뜨리다가 크리스티나가 날린 칼에 머리가 날아갔다.
원죄의 마왕, 메피스토는 혼란을 틈타 대부분의 힘을 잃은 채 겨우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저렇게 잃은 힘을 메우고자 보석룡을 노렸다가 봉인 당했던 걸까?’
대마왕들을 둘러싸던 어둠도 결국 빛의 창에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완전히 씻겨 사라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빛과 어둠의 전쟁에서 빛의 진영이 승리를 거둔다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정말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신교 동맹에서 동시에 채택하고 있다는 창세기가 정말 이걸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들이 이 생각을 듣는다면 이교도라며 반발할 게 분명했지만. 엘릭은 당분간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뒤 구절의 내용은 이러했다.
「세상을 뒤엎던 어둠이 사라지고, 빛의 은총이 온 누리에 퍼지나니.」
「어둠은 미지(未知)요 불신(不信)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때부터 빛은 문명을 가져다주었도다.」
「그 문명의 씨앗에서 인간은 발전하고 또 발전하여 번성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무거운 말투.
엘릭은 미간을 좁혔다.
전부 다 잘 끝난 것 같은데. 무슨 실수라도 있었나?
“문제라고 하시면?”
“전쟁은 이겼어도 전투는 졌다는 점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엘릭은 순간 불길함이 들어 두 눈을 크게 뜨다가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시조와 마신이 한창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불러들인 건지, 하늘에서는 용이 불길을 내뿜고 대지에서는 거인들이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면서 마신이 부리는 권속들을 베고 또 베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마신이 밀려나고 있는 상황.
이제 제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별안간 마신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무언가를 시조 쪽으로 겨누는 게 아닌가?
번쩍.
정말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어둠으로 된 섬광이 반짝인다 싶더니, 용과 거인들이 줄줄이 피를 쏟아내면서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림자로 된 저주가 용과 거인들의 상처에 짙게 배면서 그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시조도 마찬가지였으니.
가뜩이나 마신을 상대하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많이 입었던 터라, 그는 한바탕 각혈을 해야만 했다.
여태껏 웃음기 넘치던 모습을 보이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를 정도로 중상을 입은 모습.
『그대도 인간이긴 했나 보군. 결국 그 길을 선택한 건가?』
마신은 그런 시조를 보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녀석의 형체는 흐릿해지고 있었다. 분명 싸움은 시조가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승자는 그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내뱉은 말은… 엘릭이 이곳에 접속하기 전에 메피스토가 오토 한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선택이 결국 너의 죽음을 자초한 것이니. 나는 사라져도 결국 어딘가에 남을 것이나, 너는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
마신은 그런 말을 던지더니 확 하고 사라졌다.
뒤로 젖혀진 로브 아래로 살짝 드러난 시조의 입가는 쓴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엘릭은 그제야 오토 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 졌다는 말씀은 시조께서 마신에게 졌다는 뜻인 겁니까?”
“그래. 결국 이때 입은 상처… 아니, 저주로 인해 그는 결국 죽고 말았으니까. 반면에 마신은 어디서든지 부활할 가능성이 있지. 인외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불가사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특이 현상들은 인외가 태어나는 근간이 된다.
인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마신이 어떻게 부활한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
소멸한 줄로만 알았던 아자젤이 다시 재림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시조는 눈을 감기 전에 몇 가지 예언을 던졌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인외가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마신은 결국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엘릭은 이미 30여 년 전에 마족들이 크게 한바탕 소란을 부렸다고 말하려 했다.
대마전쟁. 수없이 많은 왕국이 무너지고, 제국조차 몰락할 뻔했던 끔찍한 전쟁은… 결국 메르빙거의 손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니… 다.’
엘릭은 한순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대마전쟁은 전초전(前哨戰)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 가는 한 번 몰락을 겪었다가 다시 기적처럼 소생하게 될 것이니. 그 앞에 한 명의 후손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엘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언.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남아있는 우리더러 그 후손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유훈을 남겼고 말이다.”
엘릭을 둘러싼 세계가 빨리감기 되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시조가 눈을 감았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4명의 가신이 일제히 눈물을 터뜨렸다.
오토 한이 나서서 말했다. 우선 무너질 것 같은 가문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니, 가장 어린 자신이 일단 맡겠다고.
대신에 다른 세 명은 시조의 유훈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달라고 말이다.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세 명의 가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각자 다른 준비를 위해 흩어지고, 새로이 가주 직에 오른 오토 한은 가솔을 다독이면서 가문을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준비였다.
시조의 유훈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
천 년도 넘게 가문을 존속시키려면 기반이 단단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곳곳에 ‘겨울’을 위한 다른 안배도 마련해두기도 했다.
설산왕의 무덤.
흑의 설원.
꽃의 신전.
곳곳에 그의 손길이 묻어났고, 여기에 대한 전승이 가문에 남았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오토 한은 엘릭이 평상시 보았던 40대의 모습이 되었다가, 서서히 60대의 모습으로 접어들었다. 눈가에 주름이 지고, 동공이 깊어졌다. 철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문을 이끄는 위엄 넘치는 대현자의 모습만 남았다.
그가 원했다면 세월을 거스를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이 찾아오길 바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오토 한은 70대로 접어들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시조를 떠나보내고 난 이후, 시끌벅적하고 요란법석이었던 그의 세상은 모든 게 뒤바뀌어 쓸쓸하고 고독하기만 했으니.
그것은 마치 그를 상징하는 ‘겨울’처럼 외롭고 또 외로운 길이었다.
오죽하면 사랑하는 연인과 이뤄지지도 못했을까?
엄동설한(嚴冬雪寒).
눈 내리는 깊은 겨울, 대지를 휩쓰는 추위는 그렇게 쌀쌀할 수가 없었으니.
사람들은 오토 한이 한평생 시조의 유훈을 지키기 위해 살았다고들 했지만, 그로서는 젊은 시절 찰나의 즐거웠던 추억을 붙잡아보려 발버둥 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유지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외롭게 젊은 시절을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
드디어 시조가 말하던 후손을 만났고, 그의 모든 것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네가 바로 그 ‘예언의 아이’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