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오토 한
‘안배에서는 중년이더니… 여기서는 영감님이시잖아.’
엘릭은 오토 한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오토 한은 항상 겉으로는 중후한 모습이면서도 속은 말썽꾸러기 같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깐깐한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눈을 꼭 감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책을 들여다볼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으면 버럭 성을 내면서 세상만사를 못마땅해하는 눈으로 볼 것 같기도 했고.
나이를 먹어도 오토 한은 오토 한이었다. 이렇게 점잖게 나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잠깐. 그럼 대체 여기서 몇 년을 이렇게 있었던 거지?’
엘릭은 문득 든 생각에 오토 한이 메르빙거를 다스렸을 때가 언제였었는지 정확하게 계산해 보려 했다.
그런데.
『하.』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메피스토가 갑자기 실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나 싶어 엘릭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는데, 메피스토가 파안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메피스토는 엘릭의 의문에 찬 시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댔다.
엘릭도 순간 그에게 아무 말도 걸 수 없었다.
어쩐지 그의 웃음소리에는 후련함과 씁쓸함 같은 모순된 감정들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오토 한이여, 오토 한이여!』
오토 한을 내려다보는 메피스토의 눈가에는 어느새 광기가 맺혀 있었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결국 그대도 인간이긴 인간이었구나! 영원히 우리를 괴롭힐 줄 알았던 그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굴던, 그토록 괴물 같았던 그대도 인간이었어!』
메피스토는 언젠가 자신들의 걸음을 막아서던 옛 숙적을 보면서 여러 감정이 혼재된 감회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니 오히려 억울하구나. 서글프도다. 그대들 때문에 꿇게 된 무릎이었으니, 언젠가 다시 일어서게 되면 반드시 본 왕의 손으로 그대와 그대를 따르던 이들에게 복수할 것이라 몇 번이고 다짐했었건만…. 결국 그런 건 덧없고 헛된 다짐에 불과했을지니. 하하. 하하하.』
용의 둥지에서 메피스토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분명히 엘릭에게 말했었다.
그는 몇 번이고 부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래도 꾹 참으면서 제대로 된 그릇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노라고.
어쩌면 그 이유가 오토 한 등에게 겪어야만 했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마신과 4명의 대마왕이 그토록 대단한 성세를 구가하며 대륙을 집어삼킬 듯 굴었지만, 결국 시조와 오토 한을 위시한 4대 가신이란 벽을 뛰어넘지 못했으니.
그것을 어떻게든 넘어서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태도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단 말이다! 네놈만 그리 편하게 웃은 채로 눈을 감으면 본 왕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남아있는 원한은! 절규는! 비통함은 어찌하면 된단 말이냐!』
메피스토에게 힘만 남아있었더라면 이 던전은 금세 마기로 들끓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대로 폭삭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피스토가 내뻗은 손길은 허망하게 오토 한을 통과해버리고 말았으니.
그것이 더더욱 메피스토의 분통을 터뜨렸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부채질을 가했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토 한에게 다가갔다.
메피스토는 여전히 씩씩대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엘릭이 옆에 나타나니 자신만의 세계에서 깨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두 눈은 여지없이 광기로 일렁였으니.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메르빙거의 ‘겨울’인가 보군.
잘못 삼켰다간 탈이라도 나겠는걸?
한편, 휼의 사념은 살아생전에 메르빙거와 그렇게 많이 충돌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오토 한을 보고 흥미진진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미 오토 한의 유해(遺骸)가 품고 있는 짙은 마력을 감지했는지.
먹음직스러운 먹이 앞에서는 아무리 그 양이 많아도 군침을 흘려대던 녀석일진대, 신기하게도 지금만큼은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오토 한이 녀석에게는 유해(有害)하다고 보였단 뜻일 테지.
그래서 엘릭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오토 한이 품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동계의 인장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가문의 비밀은 무엇인지.’
부디 이곳에 온 것이 그 비밀과 의문을 풀어줄 해답을 얻을 기회이기를 바라면서.
엘릭은 오토 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퍼걱!
파스스-
손끝이 닿기도 전에 오토 한의 유해가 잘게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엘릭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왔으니. 거기에 맞춰서 동계의 인장이 화려하게 빛나고, 마도경식도 요란하게 떨렸다.
‘마정석이 빠르게 녹고 있다…!’
하지만 엘릭을 놀라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자신이 따로 마력 운행에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력이 제멋대로 순환로를 그린다는 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마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길을 새롭게 개척해나갈 뿐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오토 한이 남긴 사념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휘휘휘!
마력은 돌고 또 돌면서, 여태껏 엘릭이 개척하지 않았던 세맥으로 빠지고 또 빠졌다.
신기한 점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순환로가 기존에 엘릭이 갖고 있던 마투술의 순환로와도 절대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으니…!
아니, 오히려 부족분을 보완하고, 미처 오거스틴도 신경 쓰지 못했던 지점까지 개선하고 있었다.
마나 로드는 더 이상 길(Road)이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빽빽해지고, 복잡해졌으니.
엘릭은 그것을 두고 전혀 다르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로망(回路網, Circuit).
거기에 생긱이 미친 순간.
번쩍!
엘릭의 시야가 순간 반전되었다.
“…여긴?”
엘릭은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느새 다른 안배에 접속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심상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평상시 여러 배경을 두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온통 순백색으로만 가득했다.
“피안(彼岸)이다.”
엘릭은 익숙한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토 한이 어느새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사가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안경을 쓴 눈가에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주름이 가득했다. 50대 중년인이 한순간 70대까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피안이라고 하시면…?”
“우리가 닿았고, 언젠가 네가 닿아야 할 곳이지.”
“…?”
“아직은 몰라도 된단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오토 한을 바라봤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
“예.”
“그럴 게다. 네가 여태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아주 많을 테니까. 모든 의문을 풀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수고했단 뜻으로 몇 가지는 풀어주마.”
오토 한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순백색 세계가 다시 한번 더 반전했다.
엘릭은 자신의 발아래에 넓게 펼쳐진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드넓은 지평선.
홀로 높게 서 있는 낭떠러지.
그리고… 그 위에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서 있는 한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청년인지도 알 수 없는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로브의 등에 그려진 문장(紋章)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용을 부리고, 거인을 다루던 꿈속의 그 사내가 분명했다!
‘시조!’
엘릭은 그동안 머릿속에 품어두기만 했던 의심에 이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분명했다. 아니, 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다. 메르빙거 가를 일군 존재가 아니고서야 저만한 기백을 보이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전 꿈에서와 달리, 그의 곁에는 4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토 한이었다.
정확하게는 젊은 시절의 오토 한.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만사에 불만도 많아 보였고.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하던 게임은 마저 다 할 수 있도록 좀 해주지. 그거 몇 판 남았다고 그…!”
빠악!
그때, 오토 한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로 오토 한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아악!”
“참새도 아니고 쫑알쫑알, 시끄러워 죽겠네.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지?”
“내 입으로 내가 말하겠다는데 아줌마가 무슨 상관… 아아악! 또 때렸어!”
빡! 빡! 빠아악!
“아프다고!”
빠아악!
“알았어, 그만할게! 그만하면 되잖아!”
젊은 오토 한이 저항할 때마다, 여인은 묵묵히 그의 뒤통수를 계속 두들겨댔으니.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귀신같이 곰방대가 날아오는 판국에 결국 젊은 오토 한은 쌍수를 들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항복 선언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빠아아악!
여인은 여태껏 두들겨대던 것보다 훨씬 세게 곰방대로 가격했다. 이번에는 정말 두개골이 깨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 소리가 커서 다른 사람들도 움찔하고 떨 정도였다.
“이, 이번에는 대체 왜…!”
“뒤통수가 반질반질 해 보여서. 딱 때리기 좋은 각도에 있더라고.”
“…!”
젊은 오토 한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여인이 뭘 어쩔 거냐는 투로 되레 노려보자 꼬리를 잔뜩 말아야만 했다.
‘아무리 젊은 시절이었다고 해도 저 오토 한을 저렇게 다루다니….’
엘릭으로서는 어쩐지 신세계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자신을 죽어라 괴롭히기만 했던 사람이 도리어 당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저 때 배운 것(?)을 자신에게 써먹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엘릭은 어쩐지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지적인 눈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도한 표정을 한 여인.
4대 가신 중 홍일점이자, 가진 마력량과 파괴력만 따진다면 그들 중 최강이라 불렸던 이.
크리스티나 메르빙거.
엘릭은 어쩐지 ‘사계(四季)’라 불렸다던 4대 가신 중 그녀가 ‘여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고압적인 성격을 자랑하고 있을뿐더러, 그녀를 따라 맴도는 바람이 얼마나 뜨겁던지 대기가 몇 번이고 일렁일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후우-
연기가 한가득 퍼지면서 서서히 흐려질 때쯤.
“…온다.”
가장 후덕한 체구를 지녔지만, 두 눈만큼은 따스해서 ‘봄’을 연상케 하는 장년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콰콰콰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랗던 하늘이 한순간 시커먼 색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시조와 4대 가신과 다르게,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다섯 존재가 다섯이나 나타났으니.
그중 둘은 엘릭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동장군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미청년.
마신(魔神).
그리고 그 옆에는 메피스토가 서 있었다.
마신과 4명의 대마왕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거울을 중앙에 세워둔 것처럼.
인원도 기질도 정반대로 이뤄진 두 진영은 곧 전쟁을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