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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45화 (145/405)

145화

오토 한

한편.

엘릭은 언제부턴가 소피아 일행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똑같군.』

[그러게요. 누가 봐도 오토 한이 남긴 곳이 맞네.]

던전의 복도를 지나는 내내 엘릭과 메피스토가 받은 느낌은 ‘익숙하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구조가 똑같아. 설산왕의 무덤에서 봤던 안가와.’

복도를 따라 구성된 석실의 위치, 인테리어, 안에 담긴 내용물들의 배치까지.

마치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이곳이 안가보다는 훨씬 더 컸다.

안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방도 훨씬 많았고, 던전 가디언들도 맘껏 활보하고 있었다.

그래도 메르빙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던전의 원주인이 메르빙거 출신이라는 것을 절대 모를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문도 열려 있었지.’

엘릭은 던전을 따라 흐르는 마력향이나 마법진의 소모 정도를 보고 나서 던전이 봉인에서 해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봉인이 열린 시점은 대략 엘릭이 흑의 설원에 있을 시점.

‘동계의 인장을 획득했을 때 이곳도 저절로 열렸다고 판단한다면, 대략 일주일쯤 지난 셈인가.’

그런데 그사이에 트레져 헌터들이 발견해서 도굴이 이뤄졌다니. 참 운도 없었다 싶었다.

아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저들 덕분에 숲속을 헤매지 않고 사가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굴된 물건들을 잃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제자리(?)에 가져다 놔주기까지 했으니까.

‘덤으로 인장의 조각에다 망자석도 얻어가고 있고.’

츠츠츠-

그림자도 마음에 든다는 듯이 크게 출렁였다.

휼의 사념은 던전 가디언들이 나타나는 족족 먹어 치워 대면서 간만에 허기를 채우는 중이었다.

마기의 순도가 아주 높아. 이런 건 아주 보기 드문데 말이지.

메르빙거… 듣기로 인외의 천적이라고 들었는데. 직접 인외를 다룰 줄도 알았었나?

뜻밖이로군.

사실 이 부분은 엘릭도 확실하게 알고 싶은 점이기도 했다.

메르빙거는 인간을 대표하고, 인외와는 대척점에 서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오토 한은 유실될 위기에 처한 메르빙거의 마법을 복구하는데 마족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을 복원하기 위해 동계의 인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형태의 인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던전 가디언들은 하나 같이 마기를 품고, 동계의 인장 조각을 각각 갖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엘릭도 늘 가슴 한편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물론, 짚이는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더 큰 힘을 갈구한 나머지 마(魔)에 물들며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뒤늦게 그 잘못을 깨우칠 수 있었다…」

안배를 처음으로 열면서 들었던 목소리의 내용이 뭔가 단서가 될 만하지 않을까.

‘정확한 건 아마 여기서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율호왕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테고.

여하튼.

이런 의문점을 차치한다면, 소피아 일행과 만나게 된 건 장점만 가득한 셈이었다.

결국 엘릭은 소피아 일행을 만난 걸 운이 좋았던 것으로 결론짓기로 했다.

“여기서 우측 복도로 틀면 심처로 들어가는 길이 나옵니다….”

거기다 자칫 엘릭이 헷갈릴 수 있었던 길을 직접 안내해주기까지 하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물론, 엘릭도 심안을 열고 구조를 더듬어가다 보면 길을 알아서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귀찮은 작업을 생략해도 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키아아!

쩌저적, 퍼어엉-

때마침 술래잡기하듯이 튀어나오던 유령을 소수로 파괴한 뒤, 엘릭은 드디어 마지막 지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기군. 중심부가.’

심안을 살짝 열어보니, 던전 내에 흐르는 마법진의 결이며 마나 흐름이 모두 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릭은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를 하면서 전혀 모른 척 소피아 일행에게 물었다.

“이곳 너머에 동료 분들이 갇혀 있으시단 말씀이시죠?”

“예. 거기에… 무서운 놈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소피아 일행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히 엘릭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엘릭도 이미 문 너머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 꿈틀대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겠습니다.”

엘릭이 문을 활짝 연 순간, 여태껏 봤었던 방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실험실이었는지, 온갖 기괴한 형태를 자랑하는 유리관이며 플라스크가 가득했다.

그리고.

좌우로 길게 나 있는 벽에는 척 보기에도 위협적인 안광을 흉흉하게 내뿜는 유령 기사가 열 구나 기립해 있었으니.

바스타드 소드, 폴엑스, 모닝 스타 등 저마다 다양한 형태의 무기들을 쥐고 있던 유령 기사들의 머리가 일제히 이쪽으로 돌아갔다.

번쩍!

하얀 천을 뒤집어씌운 듯한 흐리멍덩한 두 눈덩이 사이로 안광(眼光)이 번쩍였다.

“히, 히이익!”

“여, 열 구나 반응을 한다고…?”

공동 깊숙하게 들어간 엘릭과 다르게, 여전히 문가를 서성이던 소피아 일행은 일제히 안색이 새하얗게 지새고 말았다.

실제로 그들은 운 좋게 여기까지 왔다가, 유령 기사를 깨우면서 애들을 대거 잃고 말았던 것이니.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마주했던 유령 기사는 단 한 구.

겨우 그 한 구만으로도 그들은 몰살 직전까지 몰렸었다.

그런데 설마 열 구나 한꺼번에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아무리 여태껏 압도적인 마력을 보여준 엘릭이라고 해도, 저들을 한 번에 상대하기는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역시 지금이라도 도망을 쳐야…!’

소피아 일행은 재빨리 시선을 교환하면서 달아날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했다.

그런데.

우- 우우-

우우우-

유령 기사들이 갑자기 엘릭 앞으로 모여들더니 무기를 들기는커녕 도리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으, 으응?”

“뭐, 뭐야, 대체…?”

마치 군주를 알현하는 충직한 신하라도 보는 듯한 모습.

그 순간, 엘릭의 목에 걸려 있던 마도경식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소피아 일행으로서는 경악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으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상황을 파악해보려 해도 가진 정보가 너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이제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공동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령 기사들도 하나둘씩 일어나 그 뒤를 조용히 따라붙었다.

태도가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하던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소피아 일행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킬 정도였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내 중 한 놈이 불안한 얼굴로 엘릭의 뒷모습과 문 바깥쪽을 번갈아 봤다.

더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 분명한 중심부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반, 이대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 반.

본능과 본능이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다.

“일단 따라가보자.”

그것을 소피아가 단호한 말투로 바로 잡았다.

무언가를 크게 결심한 듯 안으로 들어가려 하기까지 했다.

“야! 그러다가 저것들이 돌변해서 우리한테 달려들면 어떻게 하려고?”

다른 사내가 그런 소피아의 팔을 황급히 잡아서 만류했지만.

“그럼? 이대로 돌아가면? 복도에 있던 가디언들은 우리한테 안 덤벼?”

“그, 그건…!”

“저 마법사가 해치운 가디언보다 아직 살아있는 가디언이 많을 거야. 이전에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걸?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어. 그러니까 차라리 마지막까지 들어가는 게 맞아.”

“그, 그렇겠지?”

“소, 소피아의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저 마법사가 이 던전의 비밀을 푼 게 확실해. 그럼 더더욱 그걸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두 사내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렸던 눈가에 다시 욕망이 일렁였다.

이 던전을 발견한 건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놈팡이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엘릭이 모든 비밀을 풀게 만들어두고, 자신들은 그 뒤를 쳐서 결과물만 날름 먹으면 된다. 그런 욕심이 다시 머릿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 다른 두 연놈을 해치우고 혼자서 독식할 수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들어가자.”

“내가 앞장서지.”

“아니. 내가 서겠어.”

처음과 달리 이제는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며 엎치락뒤치락해대는 사내들을 보면서, 소피아는 뒤에서 콧방귀를 꼈다.

녀석들이 같은 동료들마저 배신할 생각이었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일행’이라고 묶이긴 했지만, 결국 욕심 앞에 양아치 본성은 어디로 가지 않는 것이다.

너희들 멋대로 해봐라. 마지막에 웃는 건 나일 테니까. 소피아는 서슬 퍼런 미소를 살짝 지었다가 다시 숨기면서 마지막으로 공동에 들어섰다.

쿵!

문이 저절로 닫혔다.

* * *

파아아!

엘릭은 천천히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도경식이 내뿜는 빛의 인도에 따라 걸었다. 다이아몬드에서 새어 나온 빛이 안쪽의 벽에 다다르고 있었다.

츠츠츠-

키키키-

열 구의 유령 기사들은 그런 엘릭의 뒤를 조용히 따라붙었다. 혹시 옆으로 샐까 봐 에스코트까지 하는 모양새였다.

‘이것들… 생전에 오토 한의 권속들이었나?’

설산왕의 무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충성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죽어서도 모시던 주군의 업을 지키려는 자들.

엘릭은 과연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면서 이만한 충신이나 믿음직한 동료들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아마 살아있던 시절에는 높은 경지를 이룩한 강자들이었겠지. 그들 개개인이 가진 힘은 분명 설산왕 못지않을 것 같았다.

끼이잉, 크그그-

엘릭이 빛이 닿는 마지막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석벽이 거칠게 흔들렸다. 기관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석벽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숨겨진 내부 공간이 드러났다.

침실로 쓰였는지, 갖가지 명화가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며 책상 등이 보였다.

하지만 엘릭의 눈을 사로잡은 건 가장 깊숙한 안쪽에 놓인 흔들의자였으니.

그 주변의 다 꺼진 화로와 곱게 깔린 카펫 같은 것들은 오토 한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흔들의자에는 누군가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잠들어 있었으니.

엘릭은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토 한.

메르빙거를 반석에 올려두었다던 중시조가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채로, 그곳에서 머나먼 후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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