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오토 한
붉은 유령의 숲.
황도 인근에 있는 미개척지로, 원래는 여우나 곰 따위가 많이 나와 황실의 사냥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유령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많이 뜸해졌으니.
그러다 황실에서 이를 폐쇄하지 않고, 근위병들의 실전 훈련지로 사용하면서부터 방문객들이 부쩍 많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한 무도가와 마법사들의 방문으로.
“거기, 막아! 어서!”
“으, 으아아! 여기로 온다!”
“방패 세우라고 새끼야!”
애당초 ‘유령의 숲’이라고 한다면, 고요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이곳은 온통 사람들의 발악과 절규, 혹은 신음으로 가득했다.
무턱대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위기에 내몰린 파티들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통칭 유령종(幽靈種)이라 분류되는 몬스터는 애당초 사냥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물리적 피해는 거의 입힐 수가 없다시피 했고, 마법적 영향도 일부 속성 주문에만 해당했으니까.
그나마 효과적으로 공격을 먹일 수 있는 신관이나 사제들은 애당초 이곳을 두고 ‘이교도의 저주받은 땅’이라는 알 수 없는 설명으로 방문을 꺼리는 편이었으니.
하지만 붉은 유령의 숲은 황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고, 그만큼 이름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만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무 준비 없이 들어왔다가 낭패를 보는 이들이 적잖았으니.
도처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 많이 널린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엘릭이 숲을 홀로 가로지르면서 그렇게 발견한 사체도 벌써 십여 구는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한 것이냐?』
“그러게요. 난 왜 여태 조용하기만 하지?”
메피스토가 던진 질문에 엘릭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숲에 들어온 지 벌써 1시간여째.
곳곳에서 유령들이 내지르는 귀곡성이며 사람들의 비명이 연거푸 들려오건만.
정작 그는 유령들을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접근을 못하는데.’
분명히 엘릭의 기척을 읽고 유령들이 접근을 해와도, 일정 거리 밖에서 계속 배회하고만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스펙터, 벤시, 고스트….
분명히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유령들이건만.
어쩐지 엘릭은 녀석들이 자신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그때 그런 엘릭의 의문에 대답하듯, 그림자가 크게 출렁였다.
츠츠츠-
키키킥.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휼의 사념이 키득거리자 마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자 혹여나 하는 생각에 두리번대던 유령들이 일제히 혼비백산하면서 달아났다.
키아아악!
퀴퀴퀴! 퀴퀴퀴!
엘릭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산 사람에게 공포를 줘야 하는 유령이 오히려 산 사람에게 겁에 질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무래도 유령들은 엘릭을 해코지하려 해도, 그가 삼킨 마왕의 기운을 읽고 겁을 먹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휼의 사념은 본체의 그것에 비하면 아주 약소했지만. 그래도 기질은 일개 유령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야. 좀 가만히 있지? 나 일해야 하거든?”
문제는 그것이 엘릭에게 편할지언정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엘릭이 3차 시험으로 받은 퀘스트 때문이었다.
-유령의 정수를 10개 이상 모을 것.
유령종 몬스터를 열심히 잡다 보면 이따금 탁한 백색을 띤 돌멩이가 떨어질 때가 있다.
유령을 구성하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집합된 돌.
마법사들의 실험 재료로 자주 사용되는 망자석(亡者石)이었다. 이따금 그것들을 모아 흑마술의 연구 재료로도 쓴다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는지까지는 엘릭도 아는 바가 없었다.
여하튼 그것을 열 개나 모으기 위해서는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숫자의 유령들을 잡아야 할 텐데… 문제는 이래서는 절대 쉽지 않겠다는 점이었다.
‘제일 쉬울 것 같아서 선택했건만. 이래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엘릭으로서는 언령 마법으로 유령들을 싹 다 끌어다가 전부 동계의 인장으로 얼려서 잡을 생각이었기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거 알잖나?
하지만 휼의 사념은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는 투로 뻔뻔하게 대답할 뿐이었으니.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엘릭은 더더욱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휼의 사념은 언제나 그렇듯 유령들에게 군침을 흘리고 있을지언정 이렇다 할 활약은 펼치지 않고 있었으니까. 기세도 열지 않았는데도 슬슬 저것들이 피하는 판국이니.
『더럽게 말을 안 듣나 보군?』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의 속사성을 알고 낄낄대기 바빴다.
『그러게 그때 본 왕이 말하지 않았더냐. 저놈은 받아들이지 않는 게 네 정신 건강에도 훨씬 이로울 거라고 말이다. 말을 듣지 않더니, 쯧쯧!』
거죽만 남은 놈이 말만 많군.
그때, 휼의 사념이 한껏 비웃음을 던져왔다.
메피스토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뭣이?』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언제나 대마왕이라고 거들먹대더니. 유령들도 무시하는 신세라니. 키키키킥!
『무시라니! 본 왕의 위대함을 어찌 유령들 따위가 읽을 수가 있을까!』
혓바닥이 길군, 찐따.
『네 이놈!』
유령들한테도 무시당하는 주제에 어디서 훈수질이냐는 휼의 사념의 지적에 메피스토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동백의 신과 헤어지고 나서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이제는 휼의 사념과 열심히 싸워대고 있었다.
어째 메피스토와 사이가 좋은 인물은 좀체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메피스토와는 사이가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한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근데 휼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었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엘릭은 이들을 먼저 조용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가뜩이나 안 꼬이는 유령들이 더 안 꼬일 것 같았으니까.
이것들을 어떻게든 잡아야 정수도 모으고, 또 ‘길’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그러던 그때.
키이이이!
엘릭의 귓가로, 아주 미약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소소 돋게 만드는 귀곡성이 들렸다.
『음? 이건?』
맛난 걸 찾았나? 키키킥! 저거 나에게 다오. 나에게!
일반 유령들이 내뱉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울음소리.
마기(魔氣)가 담겨 있었다.
그것도 아주 농밀하게.
파앗-
엘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면서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꺄아악! 엘튼! 정신 차려, 엘튼!”
“소피아! 어서 결계를 쳐! 지금 위험하… 컥!”
“서둘러!”
“젠장!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마기를 내뿜는 유령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비명도 점차 커졌다.
안력(眼力)을 잔뜩 돋궈 확인한 곳에는… 세 명의 남녀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유령과 싸우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체는 모두 둘.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고, 생존자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몬스터는… 벤시 리퍼인가?’
벤시 계통 중에서도 오랫동안 마이너스 에너지를 품어 도구를 지니게 된 유령을 의미했으니.
항상 녀석이 항상 목에 두르고 다니는 대낫에 베이면 육체가 아닌 영혼에 상처가 남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도사 급 이상의 실력자가 아니면 절대 잡을 수 없는 개체이기도 했다.
‘그런데 원래 더 안쪽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어째서 마기를 품고 있는 거지?’
인외의 범주를 넓혀 본다면 유령도 거기에 속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마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유령들은 마족처럼 독자적으로 사고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마기를 갖고 있다는 뜻은 단 하나.
‘뭔가 있다!’
엘릭도 이제는 메르빙거가 인외의 천적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저것을 절대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오토 한의 사가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장소에 있는 녀석이라면 더더욱…!
“【뚫어라】.”
벤시 리퍼가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기 직전, 엘릭은 그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재빨리 언령 마법을 구동했다.
그러자 하늘을 따라 얼음 화살이 잔뜩 맺혔다.
그냥 딱 보기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많은 개수.
족히 수백 발은 되는 것 같았다.
“헉!”
“저건…!”
생존자들의 눈에도 경악이 잔뜩 퍼졌다.
그러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판단한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얀 법복을 입은 것으로 봐서는 신관인 것 같았다.
“얼음 화살은 안 돼요! 물리 공격은 저놈에게 안 통할…!”
하지만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얼음 화살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쐐애액-
퍼퍼퍽! 퍼벅!
벤시 리퍼의 몸뚱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텐데, 이게 대체 무슨…?”
여인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입을 쩍 벌려야만 했다.
다른 생존자들도 마찬가지.
여기서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망치면서 잃은 이들까지. 모두 일곱이나 되는 동료들을 앗아갔던 벤시 리퍼는 조금 전의 그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었다.
벤시 리퍼도 제 딴에는 저항을 해보려는 것 같았다.
목에 두르고 있던 대낫을 높이 들어 어떻게든 얼음 화살을 쳐내려 해도, 얼음 화살은 오히려 그런 대낫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결국 녀석은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지다가.
퍼억!
마지막으로 날아든 한 발에 그대로 머리통이 깨지면서 바스러지고 말았다.
츠츠츠-
벤시 리퍼가 죽으면서 남은 가루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생존자들은 미처 그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엘릭을 멍한 표정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생존자들은 드디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꺼이꺼이 눈물을 쏟아냈다.
거기엔 남녀노소의 구분 따윈 없었다.
한편.
엘릭은 미간을 가늘게 좁히고 있었다.
‘역시. 이거… 그냥 마기가 아니었어.’
엘릭은 벤시 리퍼가 죽으면서 남긴 마기의 일부가 인장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인장이었다.
‘동계.’
아무래도 길을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생존자들에게 벤시 리퍼를 어디서 발견했냐고 물어보려는데.
순간.
녀석들이 갖고 있던 행낭이 엘릭의 눈에 들어왔다.
갖가지 종류의 보물이나 고서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봐도 무덤을 도굴하고 난 뒤에 나온 부장품들을 잔뜩 담아놓은 모습.
‘이것들 봐라?’
엘릭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