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마도사 자격증명시험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자신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말투.
엘릭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골리려는 게 아니고서야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따금 얼빠진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메피스토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만 하는 존재였다.
‘유령으로 가득한 지역에 교묘하게 숨겨진 사가라….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오토 한의 솜씨라고 하면 이해가 되기도 되는데.’
엘릭은 어쩌면 붉은 유령의 숲에 존재한다는 수많은 유령들이 사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가디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그런 추측을 확인하려면 빨리 이곳을 나설 필요가 있는데… 이상하게 헤이즈가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헤이즈는 현재 개인적으로 볼일이 생겼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엘릭이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기뻐하기에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더니, 어젯밤에 누이를 대신해서 온 건 누이가 보낸 사람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 아무리 늦어도 내일까지는 갈 것 같으니 너무 걱정 말고.]
누이의 친필로 적은 게 분명한 서신도 같이 달려왔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횡액이 판을 치는 살벌한 세상이라고 해도, 헤이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엘릭은 왜 헤이즈가 늦는지 알 것도 같았다.
‘레드 팬텀… 그곳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오거스틴과 마찬가지로 헤이즈도 그들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탈의 사내도 헤이즈를 알아보는 눈치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헤이즈가 몸담은 조직과 레드 팬텀 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 블랙 스컬인지 뭔지 하는 곳에 대해서도 그동안 자세히 묻지 못했었는데. 흠!’
그동안 헤이즈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리는 눈치였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었다.
엘릭도 헤이즈가 밖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번 돈으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기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고.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당당해져도 되겠다 싶었으니 슬슬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헤이즈가 돌아온 건 밤이 꽤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했던지, 시비에게 따로 부탁해 가져온 빵을 한참 동안 먹은 뒤에야 겨우 입을 뗐다.
“아니, 여태 대체 뭘 했기에 사람한테 밥도 안 먹인 거야?”
“제법 일이 많아서.”
“일?”
“어. 여태 몰랐는데, 너 따라서 북방에 다녀온 사이에 일이 꽤 많이 쌓였더라고.”
“역시. 용병단에 다녀온 거구나?”
“어.”
헤이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엘릭에게 물었다.
“너, 윈즈 변경주로 간다고 했었지?”
“그렇지. 금인칙서가 내려왔는데 어쩌겠어. 나뿐만 아니라 션도 갈 예정이라고 했고.”
헤이즈가 던진 질문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 소집령을 내린 곳은 비단 메르빙거 만이 아니었다.
네레스타를 비롯한 마탑의 육망성과 사자공가 및 이를 떠받드는 팔사자문(八獅子門) 전체, 그리고 세 공작가며 지방 귀족들에까지 일정 이상의 전력을 차출할 것을 명령하는 공문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네레스타 가에서는 션을 비롯해 ‘화이트 맘바’라는 이름을 가진 특수 부대가 파견될 예정이었다.
듣기로는 바일 가문에서도 청사자가 직접 병력을 차출할 예정이라던가?
다만, 그곳은 현재 이래저래 내부 사정이 많이 복잡해서 결정을 내리는데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했다.
여하튼.
엘릭은 이것이 정치적 우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황실의 술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사병을 한데 끌어모아 진두지휘한다면 황태자의 입지가 그만큼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덤으로 사병들의 전력도 소진할 수 있으니, 황실로서는 절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왜?”
“아무래도 나도 그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뭐?”
엘릭이 미간을 좁혔다.
쭉정이만 남은 메르빙거로서는 ‘외부에’ 드러낼 만한 전력감이 엘릭밖에 없기 때문에 헤이즈가 나설 일은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건만.
헤이즈도 엘릭의 생각을 읽은 듯,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있는 조직에 징발령이 내려졌을 뿐이야.”
블랙 스컬은 제국에 소속된 용병 집단.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만큼 전투에 특화된 이들도 없었기에 황실에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이까지 응할 필요는 없잖아? 정식 멤버도 아니라면서.”
“그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왜…!”
“멤버들 전부 참여하기로 결정됐어. 준회원까지 전부. 내가 만약 불참을 선언한다면 영구 제명되겠지.”
엘릭은 ‘그럼 이제 위험한 용병 일 따윈 그만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이제 자신을 후원해주기로 한 곳도 많다. 네레스타 가와 협약도 맺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돈의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특히 정식 마도사가 되면 정부에서 지원금도 두둑하게 나왔다. 엘릭은 이를 바탕으로 가문을 부흥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자신 때문에 한평생 고생만 했던 누이를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헤이즈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이제 좀 사람 노릇한다고 해서 나더러 쉬라는 말을 할 건 아니지?”
“….”
“그럴 생각이었네. 미안하지만, 엘릭. 나는 일 그만둘 생각 없어. 돈의 제약에서 해방된 게 즐겁긴 하지만, 난 내 일을 좋아하고 사랑해. 나름대로 이룬 것에 자부심도 있고. 그런데 무기 놓고 그만 쉬라고? 시집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으면 네 머리부터 깨버릴 거야.”
“…그런 말은 안 해. 누나 인생인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해.”
엘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메피스토가 히죽 웃었다.
『누이가 여장부로군.』
[그만한 깡이 없었으면 어떻게 제 멱살 잡고 여기까지 끄집어 올렸겠어요? 아마 누나가 마법에 조금만 관심 있거나 재능이 있었어도, 가주직은 제가 아니라 누나의 것이었을 걸요?]
헤이즈가 아무리 다소곳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녔다고 해도, 결국 엘릭과 같은 메르빙거였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엘릭보다 훨씬 메르빙거다운 면이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러를 깨우치고,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동생을 이만큼 먹여 살린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알았어. 누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보다 그거나 물어보자. 대체 블랙 스컬과 레드 팬텀, 둘 다 뭐 하는 곳이야? 아무리 알아봐도 둘 다 온통 수수께끼이기만 하던데.”
“그거 착각이야. 레드 팬텀과 다르게 우리는 딱히 정체를 숨긴 적도 없어. 그저 멤버들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니까 무슨 관계…!”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적이 된 곳들. 그리고 우리 용병단의 단장은 너도 한 번쯤 들어봤을걸?”
“응? 누군데?”
헤이즈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회사자(灰獅子).”
“…!”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기에 엘릭으로서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회사자는 황금사자를 제외한 여덟 사자 중에서도 가장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자였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은둔 사자’였을까?
별다른 세력도 두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건만.
그런데 회사자에게 세력이 있었다고?
“회사자가 여태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
“워낙에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분이라,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그분이 일궜다기보다는 정확하게는 윗대에서부터 내려온 것에 가깝고.”
헤이즈의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회사자보다도 훨씬 윗대에 ‘어나니머스(Anonymous, 무명無名)’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이렇다 할 명분도 목적도 없이, 오로지 사적인 친분으로 만들어진 소모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직 내 규율이 생기고 기강이 확립되면서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이 되었다.
조직원들 개개인의 실력도 제법 뛰어나 비밀 결사로도 활약하던 그들은 언제부턴가 조직의 목적성을 두고 내분을 겪고 말았으니.
한쪽은 계속 이름을 숨기며 암중 활동을 벌이자는 쪽이었고.
다른 한쪽은 대외적으로 이름을 드러내어 이제 자유롭게 활동하자는 방향을 추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자는 레드 팬텀이, 후자는 블랙 스컬이 되었어.”
헤이즈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처음에는 목적성을 두고 대립은 있었어도 갈라설 정도는 아니었다고 해. 어나니머스라는 조직 자체가 워낙에 세간에 안 알려질 만큼 소규모이기도 했고, 대다수의 멤버들은 중립을 표방하기도 했었다니까.”
“그럼 언제부터 갈라진 건데?”
“전대 수장이 죽고 나면서.”
“…후계자가 두 명이었구나.”
“맞아.”
헤이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회사자 님과 네가 얼마 전에 상대했던 나무탈. 내 기억이 맞는다면 두 분은 원래 사형제 사이였을 거야.”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두 사형제가 추구하는 노선이 전혀 틀어지면서 조직이 갈라졌다… 흔히 있는 일이지.”
어떤 조직이든지 목적과 이익 앞에서는 노선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런 내분을 잘 수습하고 계속 이름을 이어갈 수 있다면 명문(名門)이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그저 그런 곳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어나니머스는 그것에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하나라는 정체성은 있어서 대립 중이라고 여기고 있다던가.’
이런 경우, 한쪽이 승기를 잡게 되면 자연스레 패배한 쪽이 승리한 쪽에 흡수되기 마련이다.
블랙 스컬과 레드 팬텀. 두 곳이 어떤 상황인지는 엘릭은 몰랐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닐 거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헤이즈가 레드 팬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블랙 스컬 본단에 보고를 올렸고, 여기에 지금까지 논의를 계속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만큼 이번 일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일 테지.
“여하튼 그 때문에 블랙 스컬은 블랙 스컬 나름대로 따로 움직일 생각인 것 같아. 명분은 징발령이지만….”
“실상은 레드 팬텀을 상대하기 위해서고?”
헤이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엘릭도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나는 그쪽을 통해 참전할 생각이야?”
“어. 물론, 최대한 신분은 노출 안 되게 조심할 거고. 괜히 시끄러운 것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엘릭은 헤이즈가 말은 그렇게 해도, 실은 자칫 자신과 가문에 누가 될까 봐 염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어. 몸조심하고, 저쪽에서 보자.”
“그래. 너도 하려던 거 잘 됐으면 좋겠어.”
“여태까지 가문을 지켰던 건 누나였잖아? 이제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마.”
“많이 컸네?”
헤이즈가 짓는 웃음에는 정말 기쁨이 가득해 보였다.
* * *
이튿날, 아침.
엘릭은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헤이즈는 블랙 스컬과 움직이기로, 션은 가문의 부대와 함께 윈즈 변경주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홀로 나서는 길이라 할 수 있었다.
도중에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이번에는 가이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만류했다.
흑의 설원에 가는 거야 단순한 외유라 여길 수 있었다지만, 전장에 두 사람이 엘릭과 함께 가는 건 자칫 네레스타 가의 정치적 행보라 비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엘릭을 따라나서려던 원로원과 빈객청의 마법사들이 모두 손만 빨아야 했지만.
엘릭은 간만에 여유를 즐기면서 붉은 유령의 숲으로 이동하는 마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