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마도사 자격증명시험
엘릭과 메피스토의 거래는 예상보다(?) 아주 쉽게 끝났다.
[그리고리 새끼들 족쳐서 얻은 마기 중에 군장 급 이상은 메피한테 줄게요. 콜?]
『콜!』
이번 거래는 엘릭에게도 메피스토에게도 사실 크게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가문의 특성상 마족을 섬멸할 의무가 있는 엘릭으로서는 어차피 그리고리와는 척을 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고.
메피스토는 같은 대마왕이었던 아자젤과 원래 관계가 그리 좋질 못했으니, 그들의 인장과 신앙을 뺏을 수만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너무 많은 마기를 메피스토에게 넘겨도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지만.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메피스토가 아무리 힘을 되찾아도 가문이 내건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애당초 메피스토가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의 깊이를 생각해본다면, 그만큼 다다르는 것부터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그 정도면 나도 인장을 엄청 모았을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두 사람은 그리고리를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도와주자며 협상을 맺을 수 있었다.
* * *
“…음?”
엘릭은 션과 같이 복도를 완전히 벗어나려다 말고, 갑자기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을 보고 주춤거리고 말았다.
“오!”
“드디어 왔군.”
“말로만 들어서 긴가민가했었는데… 괜찮은데?”
“괜찮아? 저게 괜찮은 정도라고? 눈깔이 삐었군. 그럼 자네는 빠져. 내가 하지.”
“뭐야? 케르누, 자네 빠지나? 잘 됐군. 케르누 빠진단다!”
“아, 아아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사람들아!”
웅성웅성.
북적북적.
그들은 떼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엘릭의 이모저모를 살피기 바빴다.
마치 신기한 고대 유물을 발견해서 연구라도 하는 듯한 표정.
문제는 하나같이 나이를 지긋하게 먹었으면서도, 절대 만만치 않은 힘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릭은 그들이 오거스틴이 한창 경계하던 원로원과 빈객청의 은거기인(隱居奇人)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제로 저 한쪽 구석에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뭔가 영 탐탁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다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션이 어이없다는 투로 질문을 던지자, 그들의 시선이 똑같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보면 모르나?”
“당연히 구경하러 왔지.”
“원로원주, 저 영감탱이가 아주 말년에 복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해. 그러니 우리도 같이 구경해야지.”
그들의 두 눈은 탐구욕과 소유욕으로 잔뜩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션은 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지만.
“그래서 뭐 어떡하시게요? 작은 할아버님처럼 납치라도 하시게?”
“가능하다면.”
“할 수 있다면.”
“할 건데?”
“그럼 나도.”
“…제가 그렇게 마법 가르쳐 달라고 조를 때는 다들 듣는 척도 하지 않으셨으면서?”
“재능이 모자란데 어쩌겠나.”
“문제 내줄게. 맞춰봐. 그럼 가르쳐줄게.”
“젠장.”
션은 억울하다는 투로 욕지기를 내뱉고 말았다.
자신도 어디 가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일은 절대 없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건만.
아무래도 이 빌어먹을 영감님들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만 알아보았던 엘릭의 재능이 이제는 이 까탈스러운 영감님들도 탐낼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다.
“스승인 내가 여기서 버젓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뭔 납치를 하니 마니 운운을 하는 거야!”
오거스틴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엘릭이 원로들에게 끌려가겠다 싶었던지 후다닥 앞으로 나섰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면서 마력까지 사용하는 모습에 원로와 빈객들은 널찍이 떨어지면서도 불만을 잔뜩 쏟아냈다.
“저, 저! 욕심만 많아서!”
“늙어서 땡깡 부리는 거 봐라. 늙으면 욕심만 많아진다더니, 좋은 거(?) 나눠 먹을 생각은 안 하고 혼자 처먹을 생각이나 하고.”
“사제지간이 무슨 먹을 것과 같은 줄 아나! 엄연히 부모자식 관계처럼 하늘이 점지해주신 인연인 것을!”
오거스틴이 거세게 반발해 봐도, 역시 원로와 빈객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거 우리도 좀 같이 해보자고.”
“우리가 관심 가지는 건 여기 있는 엘릭 메르빙거인데, 왜 자네가 나대나?”
“제기랄!”
오거스틴은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욕지기를 잔뜩 쏟아냈다.
이럴 줄 알고 엘릭을 안개의 언덕으로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엘릭이 청연의 미궁을 통과했다는 소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원로원과 빈객청에 널리 퍼진 사실이었고, 오거스틴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엘릭을 구경하고 싶다는 말을 쳐내다 보니 이제는 반쯤 노이로제에 걸린 상태였다.
사실 엘릭이 흑의 설원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가장 좋아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잠시 본가에서 떨어지고 나면 엘릭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단순하고 편한 생각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말았으니.
설마 엘릭의 활약상이 본가에 이리 쉽게 흘러 들어갈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있어서 본가에 도착하기 전에 엘릭에게 조심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던 것인데….
‘이것들이 설마 이정도로 크게 날 뛸 줄이야!’
원로와 빈객들은 엘릭이 도착했단 말이 들리자마자, 오거스틴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도 오거스틴이 접근을 차단할 것이란 예측하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물론, 엘릭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타샤와 맞먹을지도… 아니,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원로와 빈객들이 모두 엘릭을 살펴보고 나서 공통으로 내린 결론이었으니.
그들이 이렇게 요란법석을 떨던 때는 타샤가 자신의 재능을 화려하게 만개했을 때 말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엘릭은 그보다도 훨씬 짧은 기간 동안 타샤가 이룬 성취를 바짝 뒤쫓았으니. 더더욱 눈을 부리부리하게 뜰 수밖에.
그래서 오거스틴은 어떻게든 이들을 엘릭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길리티가 엮인 거야 어쩔 수 없다 칠 수 있지만, 다른 놈에게까지 엘릭을 공유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문제는 빌어먹을 영감들이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냥 확 마법을 써서라도 강제로 찢어 놔?
아니면 차라리 엘릭의 뒷덜미를 붙잡고 여기서 도망쳐버릴까?
그런 생각들이 순차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여기 계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배움을 추구하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메르빙거라는 가문을 이끄는 수장입니다. 그 때문에 사사로이 사사(師事)를 청할 수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순간, 우울했던 오거스틴과 길리티의 안색이 저절로 확 밝아졌다.
저 말이 완곡한 거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암. 배움을 잇는다는 것은 학파를 계승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말고!’
오거스틴이야 녹야의 전승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게 있었고, 길리티도 전승을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으니 그냥 엘릭에게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일반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전혀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실제로 학파 중에는 다른 학파의 마법을 익히는 것을 아예 금지하는 곳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몇몇 원로와 빈객들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하지만 ‘제자’라는 카테고리에도 세세한 분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속가 제자라던가, 무기명 제자라던가 하는 식으로요.”
속가 제자는 학파의 비전은 공유해주지 않아도, 기본 공식은 나눠주면서 세력 확장용으로 쓰이는 이들이고.
무기명 제자는 정식으로 받아들인 제자는 아니되, 필요에 따라 가르침을 나눠준 이들을 의미했다.
즉, 엘릭은 자신을 그렇게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흔쾌히 따를 수도 있다고 넌지시 운을 띄운 것이다.
당연히 물러서던 원로와 빈객들의 두 눈은 다시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오거스틴과 길리티의 안색은 도로 창백해졌다.
“물론, 저 역시 제 입장이 있어 그냥 무턱대고 가르쳐주신다고 해서 무작정 따를 수는 없으니 좀 더 깊이 논의를 나눠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제 처지는 그렇습니다.”
즉, 가르쳐주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받아들이고 말고 결정하겠다는 뜻.
어찌 보면 제자가 스승을 고르겠다는 주제넘은 발언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원로와 빈객들은 저마다 두 눈을 반짝이면서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어떤 것을 보여줘야 엘릭을 혹하게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강렬한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젠장!’
‘이, 이럼 안 되는데…!’
오거스틴과 길리티의 얼굴은 핼쑥해져만 갔다.
* * *
“…저 영감님들한테서 삥을 뜯다니.”
션은 황도의 중심가에 위치한 마법성(魔法省) 산하 중앙마도관리청(中央魔道管理廳)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혀를 차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가 기억하던 원로와 빈객들은 하나 같이 콧대가 높던 인간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마도학이라는 학문에 있어 크고 작은 족적을 하나 이상 남긴 거인(巨人)들이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아주 높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프라이드는 설사 직계 혈손이라도 눈에 차지 않는다면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원로와 빈객들이 3신성인 타샤에게는 큰 관심을 보였던 것에 비해, 별반 눈에 차지 않았던 다른 형제들과는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했던 게 그 증거였다.
실제로 션도 그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정도가 전부였지, 제자로 삼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으니.
가주인 가이 네레스타마저도 그들에 한해서는 선만 넘지 않는다면 크게 터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엘릭은 그런 영감들을 상대로 스승을 ‘고르겠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경쟁을 붙였으니.
덕분에 원로와 빈객들은 엘릭을 ‘무기명 제자’로 두면서도, 자신들이 그동안 품고 있던 비전 중 상당수를 엘릭에게 가르쳐주겠다는 의사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미친 거 아냐?’라는 말까지 나올 수밖에 없는 수준.
물론, 그런 가르침들을 하루아침에 전부 다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순번대로 받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또 엄청 싸워댔었지. 서로가 먼저 하겠다고.’
한 달 뒤에 엘릭이 윈즈 변경주로 가야한다는 걸 안 원로와 빈객들은 이번 순번을 놓치면 엘릭을 만날 때까지 무기한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어떻게든 앞쪽 순번을 뽑으려 서로 으르렁대기 바빴다.
듣기로는 서로 드잡이질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제비뽑기로 순번을 정하기로 했다고 하던데….
사실 그들의 고약한 성질머리를 봤을 때, 그 약속도 잘 지켜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어떻게든 훼방을 놓으려 들지도 몰랐고.
‘엘릭, 이놈이랑 엮이고 나서 우리 집이 좀 많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란 말이지….’
원래는 되게 정적이고 고요한 가풍을 자랑하는 곳이, 어째 엘릭만 오면 많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태풍의 눈이 따로 없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정작 션의 골치를 가장 아프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맞은편. 자신의 누이, 타샤 네레스타가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게 웃으면서 엘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번 보세요. 지난 계약으로 저희 ‘불새의 홰’가 둥지를 탐사하고 난 뒤에 나온 물품 목록이랍니다.”
션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이 누이는 또 왜 이래?
집에서는 폭군으로 유명한 누이의 간드러진 목소리라니. 정말이지 못 볼 꼴을 보는 것 같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