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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37화 (137/405)

137화

마도사 자격증명시험

-제국의 신하이자, 황실의 오랜 벗이었던 메르빙거에 하명하노라.

현재 제국에 감히 입에 올리기도 불경스러운 죄를 범한 죄인이 등장한 것은 익히 알 터.

이미 지은 죄만으로 자비를 청해야 마땅하거늘, 외려 하늘이 내리시고 신께서 결정하신 질서에 반기를 들고자 하고 있으니.

금일부로, 메르빙거 역시 그러한 죄인을 징치하는 데 있어서 앞장설 것을 명한다.

금인칙서.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흔히 ‘칙(勅)’이라고 하고, 이런 칙을 담긴 서류는 칙서(勅書)라고 불렀다.

그리고 칙서에도 등급이 있었다.

금색 옥새의 낙인이 찍힌 금인칙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높았으니.

이를 어길 시에는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었다.

하늘을 주관하는 창조신을 대리하여 황제가 지상을 굽어살핀다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아래, 엘릭 메르빙거 역시 황제의 신민이니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금인칙서는 자칫 남발될 우려가 큰 만큼, 귀족원의 견제에 따라 그 사용에 있어 여러 가지로 제한 조건이 따랐다.

가령, 고위 귀족가에게는 횟수 제한이 있다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엘릭이 알기로 현재 메르빙거를 상대로 황실이 보유한 금인칙서의 발동 권한은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다고 알고 있었다.

제국과 메르빙거가 함께 한 지도 벌써 어언 수백 년이니, 그동안 황실에서도 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문 하나의 위세가 마탑과 맞먹었다던 메르빙거를 제어할 만한 고삐를 잃는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남은 두 개 중 하나를 사용했다?

‘이거… 냄새가 나도 너무 나잖아?’

그냥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악취가 아주 풀풀 날릴 정도였다.

『여기에 함정을 파뒀으니 이곳으로 걸어들어오라고 하는 꼴이라…. 아예 대놓고 해코지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로 어이가 없다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

“더 웃긴 건 그 금인칙서가 메르빙거의 자택이 아니라 본 가로 왔다는 점이지.”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은 건지, 가이 네레스타 역시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그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그 역시 어이없어하는 투가 역력했다.

메르빙거는 명색이 제국 내에서도 단 네 개밖에 없는 공작 가문이다.

비록 지금은 세가 몰락했다고 해도, 황실에서도 반드시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메르빙거가 네레스타 가의 봉신 가문도 아닐진대, 이렇게 이곳으로 금인칙서를 보냈다는 것은… 절대 공작가로 대우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게 뭔 개같은 짓거리야.”

그리고 말없이 금인칙서를 보는 엘릭과 달리, 그를 대신해서 가장 분개한 건 션이었다.

평상시에는 점잖은 성격을 자랑하던 그가, 지금은 화가 단단히 나 보였다.

“아버지! 이거 그대로 두실 생각이세요?”

“그대로 두지 않으면? 적사자가처럼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아버지! 그런 말이 아니잖…!”

“언성이 높구나, 션.”

“…!”

션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에 휘둘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자신의 친부라고 해도, 공식 석상에서는 일가를 이끄는 가주였다.

권위에 도전하는 불경죄는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나 역시 이번 황실의 태도에 불쾌하던 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메르빙거는 본 가와 협약을 맺은 곳이다. 황실에서도 그걸 모를 리는 없으니… 이는 본 가를 무시하는 태도가 된다.”

가이는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썼다.

렌즈 너머로 비치는 두 눈은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지만, 그만큼 차가웠다.

“본 가와 메르빙거의 관계를 흔들려는 건지, 아니면 협약을 맺은 정도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기책(奇策)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단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션은 목소리가 점차 무거워지는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너무 허술하다. 이게 정말 황제가 제 손으로 찍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션은 다시 엘릭이 들고 있는 금인칙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 황제가 얼마나 야욕가인지, 또 얼마나 뱀처럼 간교한 계책을 자랑하는지는 귀족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메르빙거의 가주도 눈치를 챈 모양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션의 시선은 이제 엘릭에게로 향했다.

엘릭은 금인칙서를 아무렇게나 구기면서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제가 반발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요? 그런다면 황실을 우롱한 죄가 되니 아주 손쉽게 치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어도.”

엘릭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가주인 제가 전장에 불려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을 테니 황실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죠.”

* * *

엘릭과 션은 가주실을 나와서 복도를 지나쳤다.

걷는 내내, 션의 발걸음은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짜증과 불만이 가득 섞인 걸음걸이.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션이 짜증 섞인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웃음이 나오냐, 지금?”

“아니. 그럴 리가. 나도 화나. 이딴 헛짓거리를 아예 대놓고 부리는데, 나랑 가문을 무시하는 거와 뭐가 달라? 한판 해보자는 거지.”

어차피 황실로서는 금인칙서의 발동권이 하나 차감된 것 말고는 크게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성공한다면 메르빙거와 네레스타 간에 분열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원하던 대로 메르빙거를 함정이 가득한 전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메르빙거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태도인 셈이었다.

“그럼 왜 웃는 건데?”

“고마워서 그러지.”

“뭐가?”

“네가 걱정해주잖아.”

“누,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션은 한순간 얼굴이 뻘개져서는 빽 소리를 질렀지만, 엘릭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속내는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었다.

동장군이 몰고 다니던 추위처럼.

[황태자가 파 둔 함정 같은데. 이 새끼를 어떻게 파묻어야 아주 잘 묻었다는 소문이 날까요?]

『그런 걸 본 왕에게 묻는 것이냐? 따지자면 본 왕도 그 황태자라는 인간과 같은 위치인 것 같다만.』

[계속 이러실래요? 진짜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국물도 없습니다?]

『흥! 네놈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려고? 본 왕은 그저 그리고리를 어떻게 하면 조질 수 있을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차피 엘릭으로서도 메피스토의 도움을 크게 바란 건 아니었다.

애당초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없는 메피스토가 뭔가 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고작해야 엘릭이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해주거나, 마족과 엮인 일에 대해 충고를 해주는 정도?

물론, 예전처럼 틈만 보이면 대립각을 세우던 것과 다르게, 요즘은 그가 하려는 일에 많이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다.

메피스토도 그것만이 자신이 힘을 빨리 되찾을 방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근 들어 전장을 여러 번 전전하면서 전우애와 비슷한 게 생기기도 했고.

아니, 정확하게는.

‘원죄 인장의 빗장이 풀렸을 때부터였나.’

아니나 다를까.

『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그 황태자라는 인간이 네놈에게 벌이려는 술수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메피스토는 별다른 군세가 없이도 대마왕의 자리에 올랐던 만큼, 심산귀계에도 상당히 능숙한 편이었다.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황태자가 쫓는 것이 그리고리이기도 하니, 그 둘을 잘 엮어본다면 녀석이 그리려는 그림도 쉽게 파악할 수 있겠지.』

[그 뒤에는 같이 싸잡아서 파묻어버릴 수도 있는 것일 테구요?]

『그거야 원래 네놈이 잘하는 짓이 아니냐.』

엘릭은 어쩐지 메피스토의 툴툴대는 말투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션이랑 메피스토, 둘 다 성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겉으로는 틱틱대면서 도와줄 건 도와주는 게 참 닮았다 싶었다.

물론, 둘 앞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간 당장 그를 죽이려 들 테지만.

‘그래도 지금은 일단 함정인 줄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데.’

금인칙서가 발동된 만큼, 이것을 거부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목숨에 위해를 끼치거나, 가문의 존폐가 걸릴 만한 내용이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순순히 따르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뒤집을 방법을 모색해봐야겠어.’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션이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소집 기한은 언제까지야?”

“한 달. 정확하게는 29일쯤?”

“좀 애매하네.”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윈즈 변경주까지 가는 데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봤자,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한다면 보름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뭘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션은 엘릭이 절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 건 그가 아는 엘릭과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해야 할 게 두 가지 있어.”

“두 가지나?”

“어. 하나는 마도사 자격증명시험을 치를까 해.”

션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엘릭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마도사’라는 것을 증명하고 남을 테니까.

흔히 마법사는 마도사가 되는 6써클이 운명을 가르는 분기점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노력으로 어떻게든 이룰 수 있지만, 이때부터는 재능이나 운도 크게 뒤따라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도사 자격증이 있으면 여러모로 받는 혜택도 많았으니.

그전까지는 단순히 실습생 신분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진짜’ 마법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전선으로 소집될 때도 취급되는 수준이 달랐다.

최소한 장교 급으로 분류되니까.

아마 엘릭이 자격증을 따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찬성공작이라는 걸 내세워도 장교 직 정도는 쉽게 따겠지만, 그렇게 하면 행동에는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운신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거겠지.’

그렇기에 션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다른 한 가지는 뭘까?

“그럼 다른 건?”

“비밀.”

“…이러기냐?”

“미안. 하지만 가문과 관련된 거라서.”

“꽃의 신전을 찾았던 것과 비슷한 거냐?”

“연장선상이야.”

션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했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에도 가문에 대한 비밀은 세세히 캐는 게 아니었다.

『오토 한의 사저(私邸)를 찾을 생각이로군.』

[고향 집 찾아가서 기록들 싹 다 뒤져 보려구요. 아, 큰일이네. 율호왕 보물창고도 뒤져야 하는데.]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하고.

엘릭은 오토 한의 사저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리겠다 싶어 투덜거리다가, 곧 메피스토가 던진 말에 고개를 홱 돌려야만 했다.

『그런 거라면 본 왕이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토 한의 사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아마도?』

[그럼 왜 그걸 이제야 말해요?]

『네놈이 안 물었잖나.』

엘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능글맞은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면서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본 왕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니다. 다만, 조금 찝찝한 게 있어서 골똘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거고.』

[거짓말 아니죠?]

『흥! 네놈에게 헛수작 부리려다가 당한 게 한두 번이라야지. 이제는 망신살 뻗칠 일 따윈 하지 않는다. 믿기 싫으면 말든가. 어차피 본 왕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으니.』

[그럼 원하는 게 뭔데요?]

『선제시.』

또 이거냐.

순간, 엘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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