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마도사 자격증명시험
“표정이 영 좋질 않은데.”
적사자(赤獅子) 안드레 윈즈는 수하들이 올린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지친 발걸음으로 들어서는 친우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분명히 떠날 때까지만 해도 아주 자신만만했던 친구였으니까.
3신성이니 흑사자니 하는 명성 따윈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덧붙였던 뒷말이 더 가관이었다.
-4황자, 되도록 생포하려 노력은 하겠지만, 뜻대로 안 풀려서 머리만이라도 잘라오게 되면 진짜 뒷감당은 알아서 해.
정말이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만큼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뜻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털썩!
친우는 대답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더니,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동안 얼굴을 덮고 있던 나무탈을 벗어 탁상에다 던졌다.
엘릭을 비롯해 두 명의 사자와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정예인 국경수비대까지 맘껏 희롱하고 사라졌던 사내의 맨얼굴은, 길거리에서 보면 금세 생김새를 잊어버릴 정도로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뛰어난 검술 실력이나 은신술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기 힘든 인상이었고, 별다른 위세나 기품도 느껴지질 않았다.
무미건조(無味乾燥).
딱 그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보다 4황자의 머리는? 그쯤은 가볍게 들고 올 거라더니… 설마 빈손은 아니지?”
하지만 사내가 지쳐있건 말건 간에 안드레에게는 자신의 심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아끼는 벗이었으니.
으레 모든 절친한 사이가 그러하듯, 꼬투리가 잡히면 약을 올리기 바쁜 법이었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그렇게 큰 소리 뻥뻥 치고 갔었는데… 세상에 주머니 속에 못 담는 물건이 없다는 ‘유령’이 빈손으로 올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유령이라 불린 사내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제 좀 그만하라는 언짢은 기색이 팍팍 드러났지만, 안드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다 숨긴 거야? 서프라이즈지? 서프라이즈인 것 같…!”
“좀 닥쳐!”
나무탈의 사내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마저도 안드레에게는 아주 즐거운 떡밥에 불과했지만.
“어어? 정말 실패했나 보네.”
“젠장! 이놈의 망할 주둥이가 문제지.”
나무탈의 사내는 평상시 근엄하고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어쩐지 안드레 앞에서는 호기 부리기를 좋아하는 이 망할 성격을 다시 자책해야만 했다.
사실 그로서도 일이 이렇게 꼬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적사자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산책 정도로만 여겼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이번 임무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4황자쯤 되는 인물을 납치하거나 제거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자가 황실이나 황도에 있을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변경에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수하 중 상당수를 국경수비대와 4황자의 호위병력에 심어두는 데 성공했고, 무급 자객들을 움직여 4황자의 손발을 어지럽게 만들기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변수는 바로 그 뒤에 발생했다.
‘엘릭 메르빙거… 그자가 그만한 실력자라니. 판단 착오였어.’
그도 당대 메르빙거의 가주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하얀 밤 오거스틴의 하나뿐인 제자였고, 메르빙거의 마법까지 활짝 열어젖히면서 벌써 마도사 급에 다다른 실력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기준에서나 ‘만만치 않다’였지, 5체인 슈페리어 급인 그의 기준으로는 ‘귀엽다’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반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인을 오랜만에 뵐 수 있겠단 생각에 가볍게 인사라도 하고 나올까 고민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패한 이유가 전부 엘릭 메르빙거 때문이지 않은가.
마법 실력도 절대 마도사 급 따위가 아니었다.
최소 7써클.
흑의 설원에서 어떤 수련을 했는지, 아니면 어떤 기연을 맞았는지는 몰라도 그가 파악하고 있던 정보는 전부 ‘옛것’에 불과했다.
거기다 문제는 무술 실력도 상당히 뛰어났다는 점이었다.
오러만 구사하지 않았을 뿐이지, 마법을 동반한 파괴력은 얼마나 그리 강하던지.
결국.
나무탈의 사내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너무 오만했고, 만용을 부렸노라고.
4황자의 실력도 생각보다 많이 뛰어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제국을 떠나 있었더니, 그동안에 벌어진 격차를 실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실패한 이유가 뭐야?”
친구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안드레는 옆쪽에 놓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강에서는 뒷 물결이 앞 물결을 걷어치운다지. 그뿐이야.”
“문자 쓰기는.”
“역시 제국은 제국이란 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나라가 크니 그만큼 인력 풀도 많으니까. 유서 깊은 명문가들도 많고.”
제국 출신이 아닌 나무탈의 사내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을 감히 다른 소국이나 부족들이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체급 차가 가장 컸으니까.
“그나저나 4황자는 결국 못 데려왔으니, 전략은 다시 고민해봐야겠는데.”
안드레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집무실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지도 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그가 다스리고 있는 윈즈 변경주를 배경으로, 윈즈 군(軍)의 대략적인 배치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속속들이 집결 중인 어림군(御臨軍, 황실 직속의 군단)을 위시한 제국군도 함께 놓여 있었으니.
높다란 협곡을 낀 윈즈 변경주 특유의 거대 요새가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압도되었을 만한 군력 차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볼 때마다, 안드레는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겨우겨우 삭여야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인 건지는 정작 반란군 수괴라고 지목된 안드레도 잘 모른다.
그저 자신을 지지하라던 황태자의 제안을 무시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만 봉신 직위를 반납하고 은퇴하고 싶다던 자신의 말에 뿔이 난 황금사자의 눈 밖에 나서 그렇게 된 건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미 자신과 수하들은 반란군으로 규정되어 버린 상태였고, 변명할 여지 따윈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진짜 반란군이 되어보자면서 친구를 끌어들여 4황자를 납치해보려 했던 것인데.
그렇게 해서 황태자와 새로운 거래를 하던, 아니면 인질 보호를 구실로 제국군을 물러나게 하던, 뭐라도 수를 내려던 것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라리 크롬헬 황자의 머리라도 들고 왔더라면, 최후의 발악이라고 비칠 테지만 그렇게도 못 했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라는 거겠지.”
나무탈의 사내가 던진 무미건조한 말에 안드레는 살짝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명색이 제국을 지키는 검이 되어 마족과 손을 잡게 되다니… 내 신세도 한 번 처량하군. 하아!”
황태자와 감찰4국이 적사자가를 반란군으로 규정한 명분은 마족과의 연대에 있었으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안드레는 결국 저들이 원하는 대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거부감도 들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잖아?’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니.
실제로 안드레가 이번 일로 준비한 것이 단순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레드 팬텀을 끌어오고, 마족 집단 ‘그리고리’와 손을 잡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딸랑-
안드레가 탁상에 놓인 종을 가볍게 흔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안으로 들어와 군례를 갖췄다.
“부르셨습니까?”
“그리고리에서 보냈다는 사절, 아직 있나?”
“예. 사흘째 접객실에서 아무 미동도 하지 않고 백작님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질린 얼굴이 되었다. 접객에 응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거라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었다.
“데려와. 여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꺼려지는 대상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복명.”
부관은 모든 인간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마족과 손을 잡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힌 것인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만큼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는 뜻.
그 때문에 안드레는 다시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자신의 결정 때문에 수만 명이나 되는 충성스러운 수하들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애당초 ‘적사자’의 칭호를 얻고, 윈즈 변경주의 주인이 되었어도, 살생과 전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이 순간이 그저 무겁기만 할 뿐이었다.
무언가 해결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계속 입안이 텁텁했다.
* * *
“가주를 보는 건 좋다만… 으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엘릭은 네레스타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오거스틴이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짓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옆에 있는 길리티도 영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가 네레스타 가에 가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뭐라도 있나?’
오거스틴은 엘릭의 질문에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 끝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노인네들 조심해라.”
“…?”
“끄응! 그런 게 있다.”
『저러는데도 모르겠냐? 제자를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는 거지.』
엘릭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자, 메피스토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도 압니다. 제가 그렇게 눈치가 없을 줄 알구요?]
『…엥?』
엘릭은 여전히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로, 메피스토에게는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이렇게 계속 모른 척을 해야 네레스타에 있는 원로들이나 빈객들이 저한테 접근해도 스승님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 것 아닙니까?]
『쯧! 그럼 그렇지.』
머리도 좋은 놈이 그리 눈치가 느릴 리가 없지. 메피스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엘릭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네레스타를 복마전으로 만들어준 수많은 은거 기인들의 눈에도 띈다면 엘릭으로서는 만세를 외칠 일이었다.
최대한 많은 종류의 마법을 익히는 것.
그리고 그만큼 사장된 가문의 마법을 복원하여 체득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엘릭이 아주 오래전부터 반드시 추구해온 방향성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연기를 좀 하는구나?』
[하도 주변에서 잔소리를 해대서 이번에는 그냥 시치미만 뚝 뗀 겁니다. 이 정도도 발연기면 큰일이지.]
『그보다는 이득이 되는 일에는 기가 막히게 반응하는 것이겠지.』
엘릭은 메피스토의 핀잔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오거스틴에게 물었다.
“그보다 스승님.”
“왜 그러냐?”
“나무탈을 썼던 자객과 무슨 관계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순간, 마차 안에 있던 션과 헤이즈는 물론, 길리티의 시선도 똑같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들 모두 내심 궁금했지만, 여태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인연이라고 보면 된다.”
“…?”
“…?”
“…?”
“그런 게 있다.”
오거스틴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엘릭도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워 거기에 대해서 더 묻지 못했다.
그사이.
일행들은 아주 빠르게 네레스타의 대저택이 있는 ‘안개의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참 동안 검문검색이 있을 테지만, 이번에는 오거스틴과 션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가주의 특명이 있어서 그런지 통과가 아주 빨랐다.
그리고.
“프란츠 백작 영식의 팔을 잘랐다지?”
엘릭은 가주 가이 네레스타와 마주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들은 말에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내 이야기는 공공재라도 되는 건가.’
크롬헬 황자도 그랬었지만, 이들의 정보망은 대체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좀처럼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보는 눈이 있는 한, 자신에 대한 소문은 퍼질 수밖에 없다는 것.
“원래 은원은 10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그보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이번에는 아들 팔이 아니라, 그 아비의 목을 자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가이는 시종에게 시켜 미리 챙겨뒀던 것을 엘릭에게 건네주게 했다.
엘릭은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가, 상단 중앙에 적힌 글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소집령.
황실 인장이 찍힌 금인칙서(金印勅書, 황제의 명령서)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