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전란(戰亂)
쐐애액-
“황자 전하!”
“피하십시오!”
호위병력들이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이런.]
나무탈의 사내는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움직임이 들킬 줄 몰랐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런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텐데.]
몇몇 기사들은 직접 몸을 날리기까지 했지만, 이미 그 전에 칼바람은 크롬헬 황자에게 다다르고 있었다.
차차창!
크롬헬 황자는 이를 악물면서 어떻게든 녀석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투로를 전혀 예측할 수 없어서야 막을 수 있는 건 겨우 두세 합이 한계였다.
더 이상 발자국을 읽을 수도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이제는 발자국도 남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해야…!’
엘릭은 크롬헬 황자가 있는 쪽으로 달리면서 억지로 머리를 쥐어짰다.
저놈이 너에게 중요한가?
휼의 사념이 그런 엘릭이 재미있다는 듯이 흥얼거렸다.
애당초 너는 가까운 지인이 아니면 타인에게 아주 무관심한 놈이지 않았나?
그런데 왜 굳이 도와주려 하지?
그냥 내버려 둬. 그럼 되잖나.
그런다면 저 유령 같은 놈도 할 일이 끝나 조용히 사라질 것 같은데. 굳이 나설 필요는 없잖아?
엘릭은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나 싶었지만, 이를 악물면서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중요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어!’
그럼?
‘내가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나에게 진짜 호의를 보여준 사람이 다치는 것까지 내버려 둘 정도는 아니거든?’
그런가.
호의라. 나에게는 아주 낯선 감정이지만.
그것이 뭐, 인간에게는 중요한 동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
키키키킥!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도와줄 거면 빨리 도와주고! 안 그럴 거면 꺼져!’
성격이 아주 급한 주인님이로군. 참을성을 기르라고. 그래야 복이 따르지 않겠나.
휼의 사념이 속삭인 그 한 마디와 함께.
엘릭은 감각이 어느 때보다 활짝 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곳곳에 인지 영역이 닿아있었다.
개중에는 크롬헬 황자가 있는 곳도 있었으니!
엘릭은 그것이 그림자를 매개로 한 감각의 확장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림자를 통해 상대의 영역까지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아주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치솟아라】.”
엘릭은 동계의 인장에다 마력을 한껏 쏟아붓는 것과 동시에 크롬헬 황자의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결을 마구잡이로 꼬아 마력장을 형성했다.
원래대로라면 물리적 한계 때문에 절대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림자를 중간 경유지로 둬야만 하기에 효과는 훨씬 떨어졌지만.
이것만 해도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쿠쿠쿠쿠…!
크롬헬 황자의 발 앞에서 지반이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 얼음벽이 두텁게 치솟았다.
까가강!
퍼어엉-
나무탈의 사내가 휘두른 검격이 얼음벽을 폭죽처럼 부수긴 했지만, 크롬헬 황자가 뒤로 빠져나가기엔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또…!]
나무탈의 사내는 자신의 공격이 엘릭 때문에 몇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탄식까지 내뱉고 말았다.
이대로 계속 억지로라도 크롬헬 황자를 쫓아야 할까, 아니면 계속 번번이 실패하게 만드는 엘릭을 먼저 처리하는 게 나을까.
한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무탈의 사내는 더 이상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촤르륵, 촤륵-
빙판 곳곳에서 냉혹의 사슬이 튀어나와 그의 발을 묶으려 한 것은 물론, 헤르만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다라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차차창!
헤르만은 오러를 줄기차게 뽑아대면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댔다. 공격이 얼마나 맹렬하던지, 한순간 나무탈 사내의 손발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아무리 녀석이 자객치고는 뛰어난 칼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검술 실력만 놓고 본다면 사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헤르만을 꺾을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나마 나무탈의 사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은신술이었지만, 헤르만이 악착같이 따라붙고 엘릭이 엄호를 해주니 이제는 좀처럼 숨어볼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를 더욱더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츠츠츠츠-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회담장의 바닥 위로, 새하얀 백색 물결이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특이한 기현상으로만 비칠 수도 있었지만.
거기엔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흉폭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딱 하나.
[하얀 밤까지…!]
나무탈의 사내는 헤르만을 크게 밀어내면서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망가진 천장 위. 처음 그가 나타났을 때처럼, 오거스틴이 철골 위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상당히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 못 잡아서 다들 이 모양이니. 쯧!”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리 사자들을 희롱할 정도로 날고 기는 자객이라 하여도, 하얀 밤이 나타난 이상 더 이상 제멋대로 굴지 못할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하얀 밤이라는 존재는 예측불허와 규격 외에 놓인 인간이었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군.]
아니나 다를까.
나무탈의 사내도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여긴 건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두 개의 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오거스틴이 있는 방향으로 갑자기 예를 갖췄다.
[오랜만입니다, 은사.]
“…!”
“…!”
“…!”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반응.
엘릭이며 크롬헬 황자, 헤르만까지 전부 놀란 눈으로 오거스틴과 나무탈의 사내를 번갈아 봐야만 했다. 심지어 그 속에는 헤이즈도 섞여 있었다.
오거스틴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누가 은사라는 것이냐.”
[예나 지금이나, 저는 한결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더 이상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썩 꺼져.”
한순간, 나무탈 사내의 시선이 엘릭에게로 향했다.
[제자를 두셨다는 말이 들리더니 진짜였던 모양입니다. 다행이군요. 진전을 이을 전인을 그토록 찾아 헤매시더니, 드디어 얻으심에 축하드립니다.]
“말했을 텐데. 네놈이 신경 쓸 건 아니라고. 이 늙은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면 들리도록 아예 귓구녕이라도 새로 뚫어주랴?”
오거스틴이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하얀 물결도 거칠게 출렁였다. 그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곧장 사나운 이빨을 들이댈 기세였다.
[그건 안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물러나겠습니다.]
“다시는 나타날 생각 따윈 마라.”
[다음에 뵐 기회가 있다면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휘릭!
나무탈의 사내는 그 말만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이런…!”
호위기사며 국경수비대까지 모두 감히 황자를 시해하려던 자객을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단 사실에 탄식을 흘리고 말았지만.
감히 오거스틴을 거부할 배짱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 * *
크롬헬 황자의 암살 미수 사건은 여러모로 큰 파란을 남겼다.
황실 인사를 해친다는 건, 사실상 황실과 제국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었다.
감찰국 본국에서 직접 요원들을 파견하여 검문과 검색을 벌이는 한편.
국경수비대는 국경수비대 나름대로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큰일이 빚어질 뻔했다는 사실에 잔뜩 분개하여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자객들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불살랐다.
다만, 그 과정에서 헤이즈는 엘릭에게 말했던 ‘레드 팬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엘릭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생각이 깊은 누이이니만큼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엘릭 역시 굳이 그 정보를 언급하지 않았다.
‘감찰국도 스승님께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군.’
특히 감찰국은 이미 다른 목격자들로부터 오거스틴과 미수범 간에 안면이 있는 것 같다는 증언을 들었을 텐데도, 굳이 오거스틴을 따로 찾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원로원주로 있는 네레스타 가문을 두려워하거나, 마탑과의 정치적 갈등을 꺼려서가 아니라 ‘하얀 밤’이라는 존재 자체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거스틴의 뒤를 밟지 않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를 귀찮게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엘릭과 크롬헬 황자 간에 있었던 회담도 저절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쉽군. 좀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말이오.”
크롬헬 황자는 엘릭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가득 담긴 말투.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크롬헬 황자는 엘릭에게 깊은 관심이 있지 않았던가.
거기다 이번에는 엘릭의 활약 덕분에 암살 위기에서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에 대해 무한한 신의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크롬헬 황자는 이대로 황실로 돌아가는 대로 엘릭과 메르빙거 가문에게 감사장과 함께 특혜도 따로 내어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엘릭은 그런 크롬헬 황자를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 뵀을 때 더 많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애도 그때마저 나누도록 하시죠.”
크롬헬 황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보여준 강체술이라는 것, 아주 인상적이었다오. 다음에 볼 수 있다면 한판 겨뤄보고 싶소.]
파앗!
그렇게 크롬헬 황자는 한 줄기 전음을 남기면서 호위단과 함께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고.
“우리도 이만 돌아갑시다.”
뒤이어 엘릭 일행도 황도로 향하는 마법진 위에 올랐다.
번쩍!
빛무리가 가신 뒤에 보인 것은 이미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던 네레스타 가의 시종들이었다.
“왈트, 핫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션이 던진 질문에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션 님과 엘릭 메르빙거 님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사자가의 반란으로 귀환하라는 급전을 받긴 했다지만, 이렇게 직접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급히 찾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아무리 아들의 친구라지만 결국 외부인일 뿐인 엘릭까지 찾는다?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도 잠시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헤르만은 황도에 사는 친구 집에서 잠시 머물 거라며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장벽 밖이었다면 모를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는 청사자가 마탑의 육망성 가문에 들렸다는 것만으로도 별의별 이슈를 다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갈라서는 게 맞았다.
푸른 매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사벨의 설득에 떼이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마치 그 모습이 이산가족의 이별이라도 보는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션으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지만.
곧 계속되는 시종들의 채근에 본가가 있는 곳으로 다급히 움직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