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전란(戰亂)
[레드 팬텀이야.]
엘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당연하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럼 누나는 어떻게 아는 건데?]
[내가 있는 용병단 단장님과 원수지간이거든.]
[흠.]
엘릭은 헤이즈가 소속된 ‘블랙 스컬’에 대해서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누이가 어떻게 고생하는지 묻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누이도 굳이 그곳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블랙 스컬이 절대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회사자 쪽과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 블랙 스컬과 대립하는 자객 집단이라면 확실히 그냥 순순히 자신들의 정보를 털어놓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엘릭은 방법을 바꿨다.
녀석들 중 몇 명을 풀어주기로.
대신에.
‘환안(幻眼)!’
엘릭은 길리티로부터 배운 새로운 마법을 발동시켰다.
단숨에 패밀리어로 지정된 날파리들이 아직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객들에게로 달라붙었고
[퇴각하라!]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후퇴하는 녀석들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올 때는 마음대로라도, 나갈 때는 아니란다.’
엘릭이 차갑게 웃으면서 퇴각하는 그들의 뒤를 쫓으려 하는데.
[이런! 아무래도 계속 이렇게 임무를 내버려 뒀다간 조직의 기둥뿌리가 완전히 뽑히고 말겠는데.]
…!
엘릭은 가속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려다 말고, 갑자기 아귀감이 다급하게 내지르는 비명에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폭발로 날아간 천장의 골조 위.
나무탈을 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정말 사람이 맞는 걸까?
탈 너머로 보이는 두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엘릭을 더욱 충격으로 몰아넣은 건.
‘결이 없다!’
무결(無缺).
생명체라면 누구나 응당 결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급 자객이라고 해도 한두 개쯤은 결을 흘리고 다니기에 엘릭이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건만.
저 사내는 대체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결이 하나도 없었다.
키키키킥!
아무래도 재미난 놈이 나타나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림자에 담긴 휼의 사념도 마치 재미난 물건을 만난 것처럼 키득거렸다.
맛있겠군. 휼의 사념이 나무탈의 사내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던진 감평이었다.
[재미난 짓을 하려는 것 같지만, 여기엔 우리의 명줄이 담겨 있어서.]
사내는 자신의 육성을 직접 내지 않고 마력으로 음파를 빚어내는 기괴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는 단박에 칼을 휘둘러 엘릭이 붙여뒀던 패밀리어를 전부 제거해버렸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엘릭은 두 눈이 따끔거려도 절대 녀석에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사내가 어떻게 나서느냐에 따라서 자신도 택할 수 있는 대응책도 달라졌으니까.
촤아악!
그렇게 마지막 패밀리어까지 제거되고.
“너흰 대체 누구지? 누가 날 죽이라고 보냈나?”
크롬헬 황자는 으르렁거리면서 나무탈의 사내를 노려봤다.
도망치는 자객들은 이미 국경수비대가 뒤쫓고 있는 상태.
하지만 저 사내를 잡지 않으면 이번 기습의 주동자를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제가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지는 않으실 텐데요, 전하.]
“하긴. 순순히 말해주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없지.”
쩌어어엉!
크롬헬 황자가 쥐고 있던 검이 거칠게 울음을 토해냈다.
소드 하울링.
응집된 오러가 더 이상 압축할 수 없는 농도로 집약되었을 때에나 나타난다는 현상과 함께.
파앗-
크롬헬 황자는 지면을 거세게 박찼다.
여태 그렇게 했던 것처럼 헤르만이 바로 그 뒤를 바싹 뒤쫓으면서 합공(合攻)을 시도했다.
[이런! 두 명이나 되는 사자에게 둘러싸여서야 전혀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흠!]
사내는 난감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말투 어디에도 조급해하는 기색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차차창!
오히려 더 재미난다는 듯이 두 사자의 합공을 막아내는 신기까지 선보였으니.
도저히 일개 자객으로서 보기 힘든 뛰어난 검술 실력이었다.
슈페리어.
5체인 이상의 실력자가 분명했다.
콰아아앙!
세 사람의 오러가 거칠게 폭발하면서 결국 회담 장소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퍼졌다.
[이만하면 충분히 흡족하실 만큼 어울려드렸다는 생각이 드니, 소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사내는 먼지 구름 위로 널찍이 올라서서는 크롬헬 황자가 있는 곳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수하들도 대부분 이곳을 빠져나갔으니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4황자에 대한 암살 건도 조금 더 신중을 기울여야겠다고 판단을 하면서 어둠 속으로 몸을 묻히려는데.
“【쏟아져】, 【흩어져라】.”
바로 그때, 엘릭이 움직였다.
휘휘휘!
눈보라가 먼지 구름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사내가 숨을 장소를 숨겨버렸던 것이다.
[…이런!]
여태껏 여유만만하던 나무탈의 사내가 처음으로 당혹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어느새 사내 앞까지 나타나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동계의 인장이 발동하고, 흉성의 인장이 그 위에다 위력을 한껏 더해주었다.
강체술.
후3식.
천호작렬 – 원(圓).
콰콰콰!
엘릭이 일격을 내지를 때마다 경력(勁力)이 회오리치면서 대기를 크게 찢어발겼다.
그 속에 담긴 칼바람이 연달아 퍼져 나가니 바닥에는 빙판이 깔리고, 주변에는 온통 얼음 조각이 쉴 새 없이 튀어 올랐다.
나무탈의 사내도 엘릭의 공격에 조금이라도 노출되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거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빙독에 노출되어서야 상처만 덧날 게 분명했으니.
문제는 아무리 엘릭을 밀어내려고 해도, 좀처럼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악착같이 달라붙었으니.
거기다 대기의 흐름이 자꾸만 안쪽으로 되돌아오면서 얼음 사슬이며 얼음 화살들을 잇달아 쏟아대는 통에 손발이 자꾸만 어지러워졌다.
어디 그뿐이랴.
쐐애애액-
뒤쪽에서는 어마어마한 파공성과 함께 사람 머리통만 한 굵기를 자랑하는 해머가 날아들고 있었다.
[블랙 스컬의 홍일점과 메르빙거의 가주라. 이건 상정치 못한 상황인데… 흠! 여러 가지로 꼬이는군.]
엘릭과 헤이즈가 벌이는 합공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여기에 크롬헬 황자와 헤르만까지 더해지니, 아무리 나무탈의 사내가 실력자라고 해도 방어하기가 쉽지는 않았고.
결국.
[…어쩔 수 없지.]
나무탈의 사내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는가 싶더니, 순간 탈 너머로 보이는 두 눈동자가 크게 번뜩였다.
여태껏 등에만 걸어두고 있던 검집으로 왼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차아아앙!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쇳소리와 함께 그를 노리던 모든 공격이 튕겨 나왔다.
쌍검. 아니, 이걸 두고 이도류(二刀流)라고 해야 할까?
오른손에 쥔 검은 자객들이 흔히 사용하는 좁은 폭과 가벼운 재질로 된 레이피어였지만, 왼손에 든 건 날이 완만하게 굽어있는 시미터였으니까.
푸른 매로부터 병기에 관련해 여러 강의를 받은 전적이 있던 엘릭으로서도 처음 보는 기괴한 형태의 기수식이었지만.
그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나무탈의 사내를 둘러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조금 전까지 녀석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미풍과 같았다면, 지금은 무풍(無風)이었다.
이제는 희미한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유령과 같은….
“물러나!”
헤르만이 가장 먼저 녀석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눈치채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뜻대로 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무탈의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파앗!
존재가 고스란히 사라졌다.
분명히 숨을 공간 따윈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스스로에게 투명화 마법이라도 건 것 같았다.
‘어디지?’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어 어떻게든 나무탈의 사내를 뒤쫓으려 했지만, 여전히 결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누구를 노릴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그렇게 둔해서야 쓸 수 있나?
순간, 휼의 사념이 한껏 비웃으면서 던진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귀감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곳으로 날아들고 있다고!
엘릭은 직감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면서 그림자를 두텁게 높이 끌어올렸다.
콰콰쾅!
어디선가 바람 소리도 없이 찾아온 공격은 단숨에 그림자 벽을 부수고, 엘릭의 왼쪽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튀었다. 그 사이로 나무탈의 사내가 반쯤 공간에 묻힌 채로 놀란 눈을 뜬 게 보였다.
[그걸 피해? 대단하군.]
그러면서 피식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 어딘가 동생을 기특해하는 형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의 결과는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촤촤촤-
나무탈의 사내는 다시 공간 속으로 숨으면서 조금 전과 비슷한 공세를 잇달아 퍼부어댔다.
엘릭은 그럴 때마다 아귀감을 바짝 세워서 겨우겨우 피하다가, 나중에는 바닥을 뒹굴기까지 했다.
마법을 발동하거나, 강체술을 펼칠 시간 따윈 없었다.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이 소모될 만큼 날카롭고 은밀한 공격이었으니까.
[메르빙거의 가주… 기억에 둬야겠군. 이 ‘걸음’을 어떻게 읽는 건지도 궁금하고. 아무래도 이번 암살이 실패한 것도 그대 때문이었나 보군.]
그러다 한참 바닥을 뒹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무탈의 사내는 더 이상 그를 쫓지 않았다.
다른 방향, 다른 장소로 이어졌다.
촤악! 촤악!
촤아아악!
“크아악!”
“케른! 왜 그… 컥!”
“이 새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유령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
크롬헬 황자의 호위기사며 국경수비대가 자랑하는 고수들까지, 모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야만 했다.
“전하를 보호하라!”
“국경수비대는 포위망을 갖춰라! 어떻게든 녀석의 반경을 좁혀!”
그렇게 되자, 위험을 느낀 사람들은 재빨리 크롬헬 황자를 뒤로 물리고, 병사들은 나무탈의 사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 회담장 중앙으로 움직이게 했다.
병사들의 희생이 다소 따르더라도, 어떻게든 4황자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롬헬 황자가 가지는 정치적 무게는 그만큼이나 무거웠다.
단순히 황실 인사라서가 아니라, 황태자와 가장 크게 대립하는 인사이기도 하며, 흑사자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민중의 지지도 엄청 났으니까!
하지만 병사들이 계속 죽어 나가고, 나무탈의 사내도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 판국에 도저히 어떻게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 해.’
엘릭은 이대로 있다가 정말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녀석을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던 누이에게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싶어 돌아보기도 했지만, 그녀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유령을 찾을 방법… 유령….’
『쉽지 않은 놈을 만나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메피스토의 웃음을 듣는 순간, 엘릭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휘몰아쳐라】!”
안배 속. 한파가 몰아치고 어둠이 깔리던 동장군의 영역에서 동료들을 찾아냈던 방법.
눈 발자국.
휘휘휘!
회담장 안쪽으로 공기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순식간에 동장군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바닥에 빙판이 깔리면서 눈이 차올랐다.
사람들은 엘릭이 갑자기 왜 아군에게도 도움이 안 될 대규모 마법을 발동시키나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크롬헬 황자 앞으로 아주 얕게나마 찍히는 발자국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