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전란(戰亂)
엘릭도 사실 크롬헬 황자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이런 부탁을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션에게 말했던 것처럼 완곡한 거절에 가까웠을 뿐.
그런데 설마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이 정도면 ‘골 때린다’는 표현으로도 오히려 부족할 성싶었다.
3신성이라 불리는 천재들은 원래 다 이렇게 괴짜들인 걸까?
‘확실히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엘릭은 크롬헬 황자를 ‘황자’라는 신분이 아닌, ‘크롬헬’이라는 개인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친분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릭이 하나 더 있다! 또 있다고!’
션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삭이고 있었다.
하나만 있어도 매번 그에게 두통을 가져다주는데, 두 명이라니!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시종은 다친 로데오를 데리고 다급히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출혈이 심한 만큼 서둘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엘릭은 굳이 그런 로데오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표정으로 잘린 왼팔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나서서 복수를 할 생각이긴 했다지만, 이렇게 남이 대신해서 해주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헛웃음도 나왔다.
“친구 하나 사귀겠다고 너무 큰 것을 버리시는 게 아닙니까? 사실 황자 전하께서는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프란츠 백작가는 메르빙거의 얼마 안 남은 유산까지 싹 쓸어간 곳답게 세력 면에서는 절대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오히려 황실파 귀족의 대표 격으로 분류될 만큼 큰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메르빙거가 가진 명망을 필요로 한다고 할지라도, 프란츠 백작가가 자랑하는 아들의 팔을 잘라버렸으니. 이에 노발대발한 백작가가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프란츠 백작가와 긴밀하게 연결된 다른 귀족가는 물론, 지금까지 단단히 다져온 지지기반 중에서도 4황자가 변덕스럽다고 판단하며 등을 돌리는 이들이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하. 그건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오. 설사 역적으로 내몰린다고 해도, 프란츠 가문은 절대 본인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
크롬헬 황자는 절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말투에서 강한 자신감이 풍겼다.
‘아무래도 프란츠 가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
아마도 그건 지지기반이 되어주는 귀족 가문 모두가 똑같이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황위에 큰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고 들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잡은 권력을 순순히 놓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다는 뜻이겠지.’
엘릭의 머릿속에 든 주판이 더 빠르게 튕겨졌다.
“그래도 이만하면 성의는 제대로 보인 것 같은데. 어떻소?”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데.
“그…!”
바로 그때였다.
엘릭과 크롬헬 황자, 그리고 헤르만의 시선이 똑같이 우측으로 돌아가고.
콰아아앙!
갑자기 한쪽 벽이 폭발하면서 얼굴에다 복면을 뒤집어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대거 안으로 쏟아졌다.
쉬쉬쉭!
쐐애액-
“황자님,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자객들의 등장에 시종과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으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화살이나 암기 따위가 이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일부가 반대로 방향을 꺾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쐐액! 쐐액!
여러 개의 칼날이 크롬헬 황자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자객?’
엘릭은 전혀 예기치도 못한 상황에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국경수비대는 물론, 황실이 자랑하는 로얄 가드(Royal Guard)며 청사자와 푸른 매까지 있는 판국에 암살 시도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객 집단의 노림수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움직이고자 했다.
당장 마법을 발동시키기에는 다급한 상황. 그래서 흉성의 인장이라도 발동시키려는데.
‘가만히 있는다고?’
자객의 칼을 눈앞에 두고서도, 크롬헬 황자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듯이 쓴웃음만 지을 뿐.
아니나 다를까.
차차차창!
크롬헬 황자는 조금 전에 로데오의 왼팔을 잘라냈던 검을 크게 비틀어 자객들의 검을 전부 튕겨냈다.
그리고.
쿵!
거칠게 진각(震脚)을 밟아 마나 파동을 일으켜 녀석들의 몸뚱이를 뒤로 크게 밀어냈다.
엘릭을 보호하던 그림자가 잘게 떨릴 정도로 강한 충격파.
이미 그들의 중앙에 놓여있던 탁상이 산산조각이 난 채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파앗!
크롬헬 황자는 부서진 탁상 파편 사이를 통과하며 그대로 녀석들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양 떼로 뛰어든 사자처럼!
“흡!”
“마, 막아!”
시종단으로 위장했던 자객들은 마나 파동을 옆으로 치우면서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흑사자의 송곳니가 그들의 목줄을 죄다 뜯어버린 뒤였다.
촤악, 촤악, 촤아악-
순식간에 내그어진 다섯 번의 섬광 위로 머리통이 튀어 올랐다.
자리에 있던 헤르만과 푸른 매가 움직인 것도 동시(同時)였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의 앞마당을 더럽히려는 자객들의 행패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객들을 막아라!”
“전하를 보호하라, 어서!”
시종단과 푸른 매는 가장 먼저 크롬헬 황자의 안전부터 지키려 했지만, 정작 크롬헬 황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자객들이 있는 곳으로 깊숙하게 뛰어들었다.
그런 그의 뒤를 헤르만이 덧붙었다.
한순간, 크롬헬 황자와 헤르만 사이에 시선이 오고 갔다.
‘….’
‘….’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손발을 맞춰온 것처럼 함께 자객들을 쓸어 나갔다.
두 사자가 진군을 시작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촤촤촤촤!
쿠르르릉-
그제야 엘릭도 3신성 중 하나인 흑사자를 걱정하는 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신에 그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자객이 움직였다는 건, 어느 곳에 눈먼 칼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뜻.
심안이 활짝 열렸다.
* * *
‘흠! 이 정도면 그래도 뜻대로 되어가고 있군.’
자객 집단, ‘레드 팬텀’의 무(無)급 자객 16호는 어둠 속에 숨은 채로 순식간에 궁지에 내몰리는 수하들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가 상부로부터 하달받은 명령은 4황자를 제거하는 것.
처음에는 이런 명을 어떻게 완수하냐면서 거부하기도 했었다.
4황자가 가진 상징성이나 호위 병력, 그리고 본인이 가진 무력도 있는 만큼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생은 얼마든지 이뤄도 좋다는 수장의 재가가 떨어지고 난 뒤, 16호는 생각을 전환하고자 했다.
만약 호위 병력이 문제라면 미끼로 흩어내고, 4황자가 가진 실력이 걱정되면 물을 흐려서 빈틈을 노리자고.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이 시기만을 기다려왔다.
수하들 중 상당수를 시종단에 섞는 것만 해도 엄청난 노고를 필요로 했으니까. 황실과 감찰국의 눈을 피한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16호는 성공해냈고, 드디어 거사가 집행되었다.
가장 먼저 외부에 나가 있는 2조가 소동을 일으키면, 시종단에 잠복한 1조가 4황자를 노린다.
이 과정에서 4황자는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으니.
16호는 바로 그 틈을 타서 싸움에 정신이 없을 크롬헬 황자의 뒷목을 노린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3신성 중 하나로 손꼽히며, 재능만으로도 이미 ‘사자’의 칭호를 받은 괴물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이미 이 자리에는 그 말고도, 다른 무급 자객이 네 명이나 더 잠복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안 된다면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든 승부를 볼 터였다.
임무 완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건, 자객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의무이자 소명이었다.
다만, 이번 임무에서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뜻하지 않게 이곳에 갑자기 청사자와 메르빙거의 가주가 합류를 했다는 것인데….’
저 때문에 병력 피해가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으니 찝찝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움직인다.’
16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정신없이 자객들을 치워내기 바쁜 크롬헬 황자의 사각지대를 파악했다.
‘지금!’
그리고 한순간 자신이 움직일 타이밍이 보이자 단박에 움직였다.
파앗-
마치 풀숲에 바짝 엎드리며 움직이던 뱀이 단박에 먹이의 목덜미를 낚아채듯이.
하지만.
픽!
별안간 16호는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자신의 앞으로 날아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뭐…!’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시간 따윈 없었다.
퍽!
이미 생각이 끝마치기 전에 시야가 데구르르 회전하는가 싶더니 의식이 뚝 끊어지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신호와 함께 움직였어야 할 다른 무급 자객들이 머리가 없는 채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죄다 머리가 부서진 게 분명했다.
너희들이 왜 거기에…!
그것이 16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생각이었다.
* * *
[오케이. 한 놈 더 잡았고.]
『누가 보면 다트 놀이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뭐가 다릅니까?]
『하긴 별 차이도 없군. 자신을 맞춰달라고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데. 쯧쯧! 저놈들은 자기네들 천적이 여기에 있는지 아는가 모르겠군.』
메피스토는 머리통이 부서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16호의 시체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아하니 은신술이나 잠행술 모두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객들인 것 같았지만.
‘상대를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심안을 활짝 연 엘릭이 있다는 점이었다.
결의 흐름을 보여주는 심안이 있는 이상, 자객들이 아무리 뛰어난 기예를 펼친다고 해도 들킬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정말 뛰어난 실력자들이라면, 그런 결조차도 지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엘릭은 심안뿐만 아니라 아귀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짐승보다도 더 직감적으로 위험을 알아채는 아귀감이 있는 한, 엘릭은 자객들에 있어서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엘릭은 곳곳에 숨어있는 무급 자객들을 일일이 찾아내 얼음 화살로 머리통을 열심히 부숴대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이놈들 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리 황위 경쟁이 미쳐 날뛴다고 해도, 황실 인사를 직접 건드려서는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흑의 설원에 있었던 일들을 벌써 소상히 파악했을 만큼, 감찰국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그만한 뒷배가 있다는 뜻인데.’
엘릭은 눈을 차갑게 빛내면서 계속 무급 자객들을 골라잡았다.
‘우선 이놈들 정체부터 알아내야겠지.’
엘릭은 더 이상 크롬헬 황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겠다 싶은 정도가 되자, 몇 놈은 생포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에 움직이려는데.
[생포는 안 될 거야.]
어느새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합류한 헤이즈가 전음으로 전달해왔다. 전음 기술은 이미 엘릭이 그녀에게 알려준 상태.
그녀의 뒤편으로는 국경수비대의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객들을 물리쳐라!”
“전하를 보호하라!”
“이것들이 감히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의 본영에서…! 용서치 않겠다!”
엘릭은 그들을 힐끗 보다가 다시 헤이즈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
[그 정도 훈련은 되어 있으니까. 설사 자결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뇌된 암시가 발동해서 그냥 죽을 거고.]
헤이즈는 자객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누나, 이놈들 누군지 알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