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전란(戰亂)
-메르빙거의 가주와 청사자가 대련을 한다더라!
국경수비대의 군영에 그런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졌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랑 무투가가 대련을 한다고? 어떻게?”
마탑과 사자공가의 라이벌 관계는 일반 시민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와 무투가가 대련을 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애당초 두 직군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전투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는 주로 후방에서 병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거나, 주 공격을 위한 대형 마법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투가는 기사나 병사들과 함께 전방에 나서서 적들을 베고, 전장을 지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마법사 계통 중에 전방에 직접 나서는 워메이지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메모라이즈나 아티팩트를 다량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무술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가, 사자 중에서도 손꼽힌다는 청사자와 대련을 한다니 의아할 수밖에.
아무리 청사자가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자의 기량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기에는 메르빙거의 가주가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라센트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이곳 북방까지도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병사들은 호기심을 갖고 하나둘씩 대련장으로 모여들었다.
마침 초소 근무가 있어 가지 못한 병사들은 아쉬워하면서 동료들에게 대신 직관을 부탁했으니.
결국 엘릭이 몸을 다 풀고 대련장에 섰을 때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말았다.
“…이거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그러게. 허허! 그냥 간단하게 유흥이나 즐긴다는 생각으로 하려던 것이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
헤르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엘릭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미심쩍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왜 그러나? 갑자기 가자미눈을 뜨고.”
“청사자 님의 솜씨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허. 허. 허.”
『저놈, 연기 솜씨가 딱 너와 비슷한 수준이구나.』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말했다.
“안 그럼 그냥 저희끼리만 나눈 대화고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인데 이렇게 소문이 날 리가… 에휴! 아닙니다.”
엘릭은 말을 하다 말고, 여전히 모르겠다면서 눈을 끔뻑대는 헤르만을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상 기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도 귀족 작위는 그냥 따내신 게 아니라는 건가.’
엘릭은 슬쩍 헤르만의 뒤편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이사벨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이사벨의 솜씨던지.’
왜 고의로 이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전히 라센트의 영웅이 가진 실력에 관해 긴가민가하는 국경수비대에게 제대로 된 인식을 새겨주기 위해서겠지.
이들은 군대이니만큼 강자를 숭상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지역의 군단과도 장교들 사이의 커넥션이 있으니, 엘릭에 대한 소문도 사교계나 중앙 정치계에 금세 퍼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장 큰 건 4황자와 만나기 전에 그에게 엘릭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엘릭이 아무리 중앙 정치계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도, 앞으로 가문을 일으키려면 어떻게든 명성을 떨쳐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를 위한 가장 편한 방법은 황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헤르만과 이사벨 부녀(父女)는 바로 이 기회를 빌려 엘릭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줄 생각인 것 같았다.
『저 여아, 아무래도 머리를 쓰는 것이나 정치적인 감각이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네놈의 내자로 받아들이는 건 어떠냐?』
[아내로 맞으라구요?]
『그래. 저런 건 머리도 영민해야 하지만, 감각도 타고나야 한다. 그리고 저런 감각을 지닌 사람은 본 왕이 살던 시절에도 아주 드물었지. 보아하니 저 여아도 네놈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고, 주변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쁠 건 없지 않으냐?』
메피스토가 팔짱을 끼면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저 가문 일으키기도 바쁩니다만.]
『원래 세를 확장하는데 가문간의 결합만큼 효율적인 수단도 없을 텐데?』
[메피가 옆에 붙어 있는 동안에는 연애 절대 안 할 거니까 신경 끄시죠?]
『쳇.』
메피스토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엘릭이 연애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이래저래 놀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러긴 그른 모양이었다.
엘릭도 그런 메피스토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칼에 제안을 잘라내면서.
파앗-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하나를 알면 백을 안다.
헤르만이 엘릭을 가리켜서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푸른 매는 알았다.
사실 그 말도 아주 겸손한 말에 불과했단 것을!
‘이게 어딜 봐서 백이야! 이백이나 삼백이지!’
‘아니, 천인가?’
‘으아! 불가사의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달라졌어! 그새 대체 또 뭘 한 거야?’
푸른 매는 동장군과 혈미왕을 잡을 때 엘릭과 손을 맞춰봤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에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 뿐.
실제 무술 실력 역시 그 깊이만 따지고 본다면 절대 얕은 수준이 아니었다.
콰아앙!
서로 간에 오러나 마력을 절대 사용하지 않고 맞붙기로 한 대련에서. 엘릭은 헤르만의 검술에 이리저리 당하기는 해도, 절대 일방적으로 밀리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허를 찌르는 반격을 노리기도 했으니.
오랫동안 흑의 설원의 마물들과 싸우면서 적잖게 단련된 병사들도 탄복할 정도였다.
“와. 방금 봤냐? 저 자리에서 바로 슬라이딩으로 피하는 거. 나라면 살 떨려서 잘 못 할 것 같은데. 간담 장난 아닌데?”
“마도명문의 가주 맞지?”
“아니, 마법사가 저렇게 잘 싸우면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야….”
“전업(轉業)하기라도 했나?”
그들의 감탄사가 퍼지던 그때.
“어, 어어?”
“저분은…?”
“화, 황자님께서도 소문을 드, 들으셨나?”
한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인파는 한꺼번에 좌우로 갈라서야만 했다.
설마 4황자가 직접 행차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유흥거리를 즐길 생각으로 있던 만인장들까지 허겁지겁 예를 갖췄다. 크롬헬 황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면서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차아앙!
‘어쩔 수 없군.’
크롬헬 황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금 전에 거친 쇳소리가 들린 대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릭과 만나기로 한 건 저녁이었지만.
우연히 대련 소식을 듣고 나서 참모들을 채근해 부랴부랴 이쪽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라센트 영웅의 솜씨를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그는 황자이기 이전에 강자에 대한 선망이 강한 무인(武人)이었다.
콰콰콰!
그렇게 한참 동안 대련이 이어지다가.
퍼어엉-
엘릭은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입고 있던 옷이 여기저기 해어지고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만족에 찬 미소.
가물거리던 무언가를 잡았을 때 나타나는 미소였다.
“자세나 동작이 아주 깔끔해졌군.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군더더기가 많아. 의(意)를 제대로 실으려면 더 간결해져야 한다네. 그걸 좀 더 고민해보게.”
“아무래도 오히려 더 많은 형(形)을 볼 필요가 있겠네요.”
“이래저래 비교해본다면 허실을 파악하는 눈이 생길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잘하고 있네.”
헤르만이 웃으며 하는 대답에 엘릭은 후련하다는 얼굴이 되어 허리를 쭈뼛 세운 순간.
짝! 짝! 짝!
갑자기 관중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누가 봐도 황자인 게 분명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이쪽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왠지 좀 전에 조금 시끄럽다더니.’
아무래도 그새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헤르만이 먼저 그쪽으로 꾸벅 목례를 취하자, 엘릭도 뒤따라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짝, 짝, 짝-
다른 병사들도 하나같이 기립해서 박수치기 시작했다.
눈을 즐겁게 해준 엘릭에 대한 감사와 실력자에 대한 호의가 가득 담긴 갈채였다.
* * *
“오, 엘릭! 이게 얼마 만인가, 내 친구!”
엘릭은 헤르만과 함께 크롬헬 황자에게 제대로 인사하기 위해 단상 쪽으로 가려다 말고, 갑자기 옆에서 불쑥 나타나 어깨동무를 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봐야만 했다.
『뭐냐, 이 재수 없게 생긴 낯짝은? 아는 놈이더냐?』
[알죠. 너무 잘 알아서 문제죠.]
엘릭은 능글맞게 웃어대는 로데오 프란츠를 가만히 바라봤다.
『누군데?』
[프란츠 가의 적자요.]
『프란츠? ‘붉은 벽’의 그 프란츠?』
[예.]
『배반자란 뜻이로군. 파하하!』
메피스토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크게 웃어댔다.
붉은 벽의 프란츠 가(家).
그 명성은 메피스토가 활약하던 시절에도 유명했었다.
메르빙거를 지키는 거대한 성벽으로서.
별칭에 ‘붉다’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메르빙거를 노리던 무수히 많은 적의 피를 흐르게 만들어서였다.
하지만 프란츠 가는 불과 십여 년 전에 천 년을 넘게 이어오던 두 가문의 우애를 단박에 어그러뜨렸다.
자신들도 이제는 높이 일어서겠다는 일념 하나로.
문제는… 그들이 메르빙거의 몰락을 조장한 황실에 완전히 붙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가문이 보유하던 상당한 유산도 함께.
메피스토가 웃음을 터뜨린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메르빙거와 프란츠 가 사이에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엘릭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재수 없는 낯짝을 지닌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지, 그게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프란츠 가의 자제는 멍청하게도 사람의 속을 전혀 읽지 못하고 친한 척 굴기 바빴으니.
메피스토는 그 모습이 더 우습게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로데오도 그 나름대로 속셈은 있었다.
‘엘릭이 아무리 본 가에 큰 유감을 가지고 있어도 함부로는 대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 엘릭이 장애를 극복하면서 라센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로데오를 비롯한 프란츠 가의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프란츠 가가 메르빙거와 작별을 고하면서 빼돌렸던 상당한 양의 유산 때문이었다.
거기엔 메르빙거가 당장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옛 선조들의 보물들도 꽤 많았으니.
그걸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메르빙거가 프란츠 가를 적대시할 수는 없을 거란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프란츠 가는 이제 친(親) 황실파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가문 중 하나.
아무리 메르빙거가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황실과 척을 지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렇기에 크롬헬 황자를 지지하는 감찰13국에서도 로데오를 엘릭에게 붙여 주기로 결정했으니.
엘릭이 옛 선조들의 유산을 필요로 하는 한, 어쩔 수 없이 프란츠 가와 한동안 함께 갈 수 없을 거란 판단이 있어서였다.
물론, 그래서야 괜한 반발심만 심어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따로 조사해본 결과, 엘릭과 로데오가 어린 시절에 친형제처럼 지냈단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괜찮을 거란 추가 판단도 있었다.
그래서 로데오는 바로 이 의제를 집중적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본 가가 갖고 있는 너희들의 보물을 돌려주마. 대신에 함께 손을 잡자.
한낱 봉신가에 불과했던 곳이 옛 대가문과 대등하게 손을 잡는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보다 가슴 벅찰 일이 어디에 있을까!
로데오는 그런 위대한 업적의 포문을 자신이 열 수 있을 생각에 크게 기뻐했지만.
“야.”
엘릭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로데오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아무 고저도 없었다.
“하하! 왜 그러나, 친구여? 그래.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하긴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 우리 황자 전하께 인사드리고 간만에 회포를 풀…!”
“손 내리지?”
“으응?”
“손, 내리라고.”
엘릭은 검지로 툭툭 녀석의 손을 두들겼다.
“어디서 친한 척이야?”
“…!”
로데오가 놓친 점이 있었다.
메르빙거가 한 번 품은 한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간다는 것.
엘릭이 차갑게 으르렁거렸다.
“프란츠 백작이 직접 예를 갖춰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일개 삼남 따위가 제국의 공작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거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