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전란(戰亂)
“정말 가능하겠나?”
“저만 믿어주십시오, 전하. 저와 엘릭 메르빙거 님은 원래 어린 시절부터 아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제가 나서서 설득한다면, 이쪽으로 충분히 마음이 기울 것입니다.”
4황자 크롬헬은 영 못 미덥다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봤지만, 로데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13국에서도 추진하는 사안이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까지 해야 하나.’
크롬헬.
제국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빛난다는 젊은 신성(新星)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빛난다던 3개의 별 중 하나.
황실의 적통을 타고났으면서도, 검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여 이미 15살의 나이에 황금사자로부터 ‘사자가 될 상(相)이로다’는 극찬을 받았던 인물.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사자들과 달리 아직 5체인의 슈페리어 급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세간으로부터 ‘흑사자’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새로운 황제 후보자로 급격하게 명성을 떨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크롬헬은 옛날부터 이런 상황들이 싫었다.
‘내가 바라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크롬헬은 애당초 검을 쥐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었다.
황제가 되어야 하니, 황실의 의무가 무엇이니, 외가의 한을 갚아야 하느니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너무 듣기 싫어서 잡았던 피난처가 바로 검이었다.
최소한 검을 쥐고 있을 때만큼은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일들과는 다르게 검술만큼은 배우는 족족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나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 더더욱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랬던 검술이 그를 다시 옭아매는 속박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
황금사자가 황궁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가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툭 하고 내뱉은 말은 궁정 내에 큰 파란을 일으켰고.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에 속상해하던 어머니는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황태자 자리에 앉으면서 한 시름 놓으려 했던 제라이츠는 노골적으로 적대감까지 드러냈으니.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복을 자처하며 몰려드는 인파들로 인해 크롬헬은 항상 머리를 쥐어 싸매야만 했다.
자신이 아무리 황좌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고 한들, 이제 주변 상황이 좀처럼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이제는 떨어지면 즉시 죽고 마는 기호지세(騎虎之勢)에 올라탄 형국이라, 마음에도 없는 권력 행보를 계속 이어나가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이번 국경수비대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딴 변경에서 지키기만 하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주려는 마음에 찾아오는 것뿐이었지만.
이제 수하들은 이런 그의 생각마저도 전부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공교롭게 현 시국에 맞춰서 절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적사자가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지지 병력을 끌어모으려는 것처럼.
‘형님은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수를 걸어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으시겠지.’
크롬헬도 자신만의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반란 사건에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저 이번 일을 계기로 사자공가에 강한 경고장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확고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여차저차해서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던 다른 황자들도 적잖게 엮어서 쳐낼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크롬헬이 아무리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해도, 순순히 당해줄 만큼 호구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한다는 13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벽을 찾아왔고, 이제는 흑의 설원에서 볼일을 끝내고 귀환 중이라던 네레스타 가의 3남과 메르빙거의 가주를 만날 예정이었다.
물론, 깊게 따지자면 션 네레스타는 그가 직접 만나서 회유할 대상은 아니었다.
크롬헬과 마찬가지로 3신성에 꼽히는 타샤 네레스타가 있는 이상, 그가 차기 가주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친분을 다질 수 있다면, 가이 네레스타와의 끈이 만들어지게 된다.
가이 네레스타는 스스로도 한계를 알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이며, 현재 복마전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감찰국에서도 도저히 전력을 측정하지 못한 네레스타 가의 가주인 동시에 마탑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수장인바.
그의 지지까지 끌어내지는 못하더라도, 호의적인 인상만이라도 심을 수 있다면 계속 벌어지는 후계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취할 수 있었다.
‘특히 하얀 밤, 그 사람도 볼 수 있을 테고.’
황금사자 다음으로 감찰국에서 주요 감찰 대상으로 삼는 하얀 밤 오거스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크롬헬의 구미를 당겼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동방에서 넘어왔던 천년 묵은 마왕을 홀로 쓰러뜨린 대마법사…. 확실히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황금사자처럼 반신(半神)의 자리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고.’
어디 그뿐이랴?
저 일행에는 바일 가문의 청사자도 있었고, 최근 들어 그 명성이 간간이 황실까지 닿는 블랙 스컬의 멤버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하나같이 웬만한 소국 따위는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인 것이다.
13국에서 그런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리 만무한 일.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감찰국에서 반드시 크롬헬이 회유해야 한다며 말한 존재가 있었으니.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 엘릭이었다.
‘듣기로는 아카데미에 있을 때 개차반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또라이였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여태 마법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때에 따라서 자신을 숨길 줄도 안다는 거야.’
그리고 13국의 추천이 아니더라도, 크롬헬은 사적으로도 엘릭 메르빙거에 대해 흥미가 가고 있었다.
‘확실한 건 심계도 깊은 자라는 거야.’
만약 복잡한 후계 경쟁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먼저 찾아가 친구가 되자고 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인 게 분명했다.
여하튼.
13국에서는 이를 위해 한 인물을 추천해주었다.
로데오 프란츠.
그는 어린 시절에 메르빙거의 저택에서 살았으며, 엘릭과는 둘도 없는 친분을 자랑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러니 자신만 믿어준다면 엘릭을 회유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지만.
어쩐지 크롬헬은 그에게 별다른 신뢰가 가질 않았다.
‘프란츠 백작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원래 메르빙거의 봉신 가문이었다가 돌아선 곳으로 기억하는데. 흠!’
으레 대가문(Great House) 아래에 여러 봉신 가문이 존재하듯, 메르빙거는 원래 제국보다도 더 깊은 역사를 지닌 만큼 꽤 많은 봉신 가문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메르빙거가 몰락을 겪으면서 그들은 대부분 이탈해버렸으니.
프란츠 백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섰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전에는 ‘마도명문의 가장 착실한 오른팔’이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로 충신을 자처해왔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크롬헬은 과연 이 로데오 프란츠라는 작자가 엘릭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믿어봐야겠지.’
13국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저 그런 인물을 추천했을 리는 없을 테니 한 번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감사하나이다.”
로데오 프란츠는 마치 커다란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크게 감복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런 과장된 제스처가, 오히려 크렘헬에게는 더더욱 찝찝하게 다가왔다.
* * *
“정말 가려고?”
“어.”
“황실과 엮이는 거, 싫어하는 것 아녔어?”
엘릭과 션은 바닐 만인장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국경수비대가 따로 마련해준 거처로 안내를 받았다.
어차피 황도로 이어지는 텔레포트 게이트는 가동 준비 작업을 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에 그동안에 크롬헬 황자를 만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션에 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한 건 엘릭이었다.
션은 엘릭이 얼마나 황실을 싫어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릭은 별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이젠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순간 션의 걸음이 뚝 멈췄다.
“왜 그래?”
엘릭은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가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션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찝찝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
“너 이 새끼, 무슨 꿍꿍이가 있구나?”
“꿍꿍이는 무슨. 그런 거 없어.”
“제대로 말해라.”
“…어휴. 귀신은 대체 뭘 하는지 몰라. 저놈 안 잡아가고.”
『그러면서 본 왕은 대체 왜 보는 것이냐?』
메피스토는 어이없다는 투로 엘릭을 노려봤지만, 엘릭의 시선은 다시 션에게 향해 있었다.
“이제 슬슬 나도 조용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가문 다시 일으켜야지. 그게 좀 더 당겨졌을 뿐이야.”
흑의 설원을 다녀온 이후로, 엘릭은 힘을 어느 정도 완성한 만큼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고민했다.
처음에는 네레스타 가문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명성을 쌓고, 가문의 기반을 마련할까 싶기도 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그렇게 천천히 걸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4황자 이용해서 일어서기라도 하게?”
“그건 보고 나서.”
“전쟁에서 아주 날아다니겠다는 뜻이구만.”
엘릭은 말없이 웃었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전쟁에서 큰 활약을 벌이거나, 아니면 킹메이커가 되거나.
어차피 엘릭은 황태자와는 거리를 두게 된 상태. 그렇다면 아예 황태자가 열심히 설계했을 전쟁을 제멋대로 만들면서 그가 명성을 떨칠 수 있는 배경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4황자 크롬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괜찮은 패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엘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어떻게 쓸 건지는 일단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겨울 폭풍이 불겠군.”
션은 흑의 설원을 휩쓸었던 동장군을 제국에서도 볼 수 있을 거란 사실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이번 일이 메르빙거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은 분명했다.
* * *
“흑사자가 어떤 인물인지 말해달라고?”
“예.”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헤르만은 갑자기 엘릭이 자신을 찾는다고 해서 이제 다시 검술을 배우려는 건가 싶어 기대했건만.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아 자리에 있던 아우들도 적잖게 시무룩 해하던 중에 뜻하지 않게 다른 말을 듣고 말았다.
엘릭은 오늘 저녁에 크롬헬을 만나게 될 것 같다면서 그간 있었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지금은 파혼했다고 하지만, 바일 가문은 한때 황태자와 약혼까지 맺었던 곳.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이 중에서 황실과 가장 가깝게 관계를 맺은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거기다 같은 ‘사자’로 묶이기도 하니,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그를 만날 기회도 많았을 터였다.
다행히 헤르만은 자신이 크롬헬 황자와 크게 대립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애당초 나는 황실에 충성을 서약한 기사이긴 하네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아서 말일세. 황태자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에는 그런 이유도 사실 컸었지.”
그로서는 처가의 도움을 빌리고 싶었던 것인데, 내가 일절 거리를 뒀었으니 말일세. 헤르만은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여기에 엘릭은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사실 그로서는 좋지 않은 인연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는데, 정작 헤르만은 별일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사벨도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저번부터 느끼던 것이었지만, 이사벨은 한 번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 별다른 미련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엘릭은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언을 필요로 한다면… 음! 그래. 쉽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군.”
“무엇입니까?”
“검술광(狂). 그리고 무투광(狂).”
“…검술과 싸움에 미쳤단 뜻입니까?”
“4황자에 대해 자네가 어떤 소문을 들었고, 어떤 평가를 보았는지는 잊게. 아마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아주 멀 테니까.”
엘릭은 그동안 크롬헬 황자에 대해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정의로운 기사. 속을 알 수 없는 사자. 자신을 숨기는데 능통한 야망가….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전부 포커페이스 때문에 생긴 오해였던 모양이었다.
“좋은 관계가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안면을 트고 나면 그리 나쁠 일은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 정도 말이면 충분하다.
엘릭은 헤르만 덕분에 크롬헬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보다.”
“…?”
“동장군 때문에 멈췄던 우리 간의 거래도 재개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보아하니 자네도 안배를 겪고 나서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던데.”
엘릭은 헤르만의 강렬한 눈빛에서 짙은 호승심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불가사의를 상대하면서 보였던 강체술 후초식에 관심이 간 모양이었다.
사실 엘릭도 자신의 무술 실력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간만에 대련 한 판 하시겠습니까?”
“나야 좋지.”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나도 나도!”
“큰형님! 정말이지 계속 이럴 거요! 우리한테는 기회도 안 주고…!”
푸른 매가 다급하게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