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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29화 (129/405)

129화

전란(戰亂)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뭡니까, 그 애매한 대답은?”

『분명히 커다란 뭔가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맞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본 왕도 알 수 없단 의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엘릭을 보는 메피스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한 번 뒤틀리기 시작한 축의 중심, 즉 변곡점(變曲點)에 바로 네가 있다는 거다.』

“…!”

* * *

“…그래서 녀석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유다는 수하가 올린 보고에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럴수록.

수하는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숙여야만 했다.

“그, 그렇다고 합니다.”

“하!”

유다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동안 흑의 설원에서 진행했던 모든 계획이 단박에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까.

자신이 북방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상황을 유보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했겠지만.

이건 뭐, 제대로 출발하기도 전에 일이 다 끝나버렸으니.

짜증이 나는 것도 짜증이 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허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무리하면서까지 혈미왕을 불가사의로 만들었던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단 뜻이었으니까.

“메르빙거가 그 정도였나?”

그래서 유다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별반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이런 식으로 목을 옥죄어올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역시… 그 핏줄은 정말 어디로 가지 않는 걸까?

‘이래서야 대제사장에게 문책만 당할 뿐일 텐데.’

그리고리가 어떻게든 손에 넣고자 했던 두 개의 권능, ‘북풍’과 ‘한설’은 이로써 완전히 손끝에서 떨어져 나간 셈이니.

어떻게든 뒤를 악착같이 쫓으려 해도, 문제는 그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감찰국 놈들.’

저들의 집요함 때문에 지난 몇 달 동안 잃어야만 했던 소중한 전력이 얼마던가.

사실 그가 북방을 가지 못하는 데는 감찰4국의 집요한 추격도 있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도 조직에서 아자젤에 대한 신앙을 끌어모으고, 번제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둔 비밀 장소.

하지만 이곳 역시 언제 저들에게 발각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으드득!

유다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수하는 이제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바닥에다 머리를 찧어야만 했다.

휘휘휘!

“요, 용서를…!”

조직 내에서 차사가 가지는 무게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

하지만 여느 마족들이 다 그러하듯이, 유다는 공포에 질린 수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르빙거, 메르빙거, 메르빙거! 그놈의 메르빙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현재 본단에다 지원을 요청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들도 윈즈 변경백, 적사자가의 이번 사태에 완전히 휘말린 상황이라던가.

자신이 메르빙거로 인해 모든 게 파탄에 이른 상황이라면.

조직은 현재 감찰국이 쳐놓은 설계에 완전히 휘말려 끌려가고만 있는 상태.

‘다른 건 몰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북풍과 한설은 반드시 되찾아와야만 한다.’

그렇게 유다가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차사님, 아무래도 이것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수하가 황급히 달려와 본단에서 내린 밀서라면서 죽간을 하나 내밀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로 온통 적힌 암호문.

아자젤에 대한 신앙이 투철한 이들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기에 유다는 금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밀서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보는 즉시 귀환하고, 밀서를 파기할 것.

유다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아직 임무와 관련된 걸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라고 하니 속에서 울분이 터질 수밖에.

이를 두고, 다른 차사들은 뭐라고 자신을 씹어댈까?

보나마나 ‘이러니 잡종은 대마왕님의 그릇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지’라거나, ‘역시 순혈이 아니면 마족을 이끌 수 없다’는 헛소리만 지껄여댈 게 분명했다.

능력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놈들이!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다음 내용이었다.

-또한, 절대 꼬리를 남기지 말 것.

꼬리를 남기지 말라.

이건 차사 이상의 고위 간부들만 알고 있는 암어(暗語).

그 뜻은.

‘모든 지부를 전부 지우라는 건가?’

그리고리에 있어 말단 수하들은 평상시 자신들의 대업을 수월케 진행하는 손발 역할도 하지만.

유사시에는 즉각 전력감으로 치환할 수 있는 ‘양분’이 되어주기도 했다.

혈미왕의 불가사의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저들의 생명만큼 효율적인 제물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본단에서 직접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건, 더 이상 감찰4국에 잡힐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말고 모든 증거를 싹 치우란 뜻도 되겠지만.

유다의 전력을 가장 최고조로 끌어올려서 본단으로 합류를 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이대로 일어서시려는 건가!’

어차피 대업의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제대로 일어서려는 모양이었다.

스륵-

유다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수하들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엘릭 메르빙거에 대한 화는 다른 곳에다 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 * *

“장벽이 보입니다!”

카를의 외침에 션이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거진 숲 너머로 높다랗게 선 성벽이 보였다.

“으. 여기도 이제 드디어 끝나는구나.”

션은 이제야 한 시름을 놨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흑의 설원을 돌아다니면서 좀 정신이 없었던가.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그래도 장벽 너머에서부터는 제국의 영역이고, 가문의 손길이 미쳐있는 곳이니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멈춰라!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침입자라고 판단하고 공격하겠다!”

장벽의 위쪽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확성기를 사용해서 검문을 시도했다.

애당초 장벽이 만들어진 목적이 흑의 설원에서 내려오는 마물의 군세를 막는 데 있었기 때문에, 흑의 설원 쪽에 배치된 보초병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흑의 설원 쪽을 휩쓸던 이상 현상 때문에 경계가 더더욱 삼엄해진 상태.

비록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상 현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일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많이 삼엄한데?”

엘릭은 그런 광경을 마차 안에서 보면서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성벽에서 이쪽으로 겨눠진 대궁(大弓)이나 발리스타들이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내력을 담은 것들이었으니까.

하나 같이 ‘폭발의 룬’이 새겨진 아티팩트, 아니, 흉기였다.

저것들이 이쪽으로 쏘아진다면 정말이지 볼만할 것이다.

반경 수백여 미터에 있는 것들이 일제히 초토화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아무리 국경수비대에 배정되는 예산이 많다고 해도, 저만한 물건들을 몽땅 끌어오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저들이 동장군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적사자가의 반란과 관련이 있는 걸까.’

엘릭의 눈이 예리하게 빛날 수밖에 없었다.

국경수비대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군단.

그리고 적사자가의 변경주와 장벽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만약 국경수비대가 그리로 이동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당장 국경수비대는 황실의 권력 다툼에서도 중립을 표시하고 있는데, 만약 이번 반란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면 중앙 정치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테고….

“소속과 인원을 밝혀라!”

엘릭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검문은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카를은 재빨리 마차의 지붕을 덮고 있던 천을 치우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가문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두 달 전에 이곳을 통과했던 네레스타 가의 마차요! 성문을 열어주시오!”

“네, 네레스타?”

“저들이 정말 돌아왔다고?”

“허! 말도 안 돼…!”

순간, 장벽 위에 있던 수비대원들 사이에 경악이 잔뜩 퍼졌다.

오랫동안 장벽을 지켜왔던 국경수비대이니만큼, 그들도 동장군에 대해서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어느 정도 지식은 갖고 있었다.

시야를 분간하기 힘들고, 마물이 난동을 부리는 기간이라 인간은 거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심지어 자신들조차도 이 기간만큼은 수색대를 보낼 때 최정예만 엄선해서 보낼 정도였는데, 일반인들이 돌아올 줄이야…!

“성문, 안 열어줄 거요?”

그러다 카를이 짜증 섞인 어투로 버럭 소리를 지른 뒤에야, 병사들은 허겁지겁 도르래를 돌려 도개교를 내리기 시작했다.

쿵!

도개교가 해자에 걸리자, 카를은 고삐를 다시 흔들어 마차를 움직였다.

* * *

“3번 만인장 바닐이라고 합니다. 저희 병사들이 저지른 무례와 실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일행이 가진 신분을 알게 된 국경수비대에서는 즉각 그들을 사령부로 초대했다.

일행은 갈 길이 바쁘단 이유로 처음에는 초대를 거절했지만, 그러시면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하위 병사들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국경수비대에는 물자 공급을 원활하게 받기 위해서 황도와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바.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이들의 움직임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고.’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션이 일행의 대표 격으로 나서서 인사를 받았다.

물론, 엘릭과 오거스틴이 자신들은 순전히 나서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배짱을 부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아닙니다. 오히려 위풍당당하게 제국의 국경을 방비하고 계시는 병사분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니, 제국의 신민으로서 더욱더 뿌듯함과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장벽 수비를 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은 순전히 국경수비대를 치하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실상은 장벽에 주둔하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은유에 가까웠다.

션도 엘릭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국경수비대가 이번 사건에 정치적으로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 따라 미칠 파급 효과를 미리 염두에 둬야 했다.

애당초 션은 적사자가의 반란이 성공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재편될 정치 질서가 중요할 뿐이었지.

흑의 설원에서 엘릭의 장기가 빛났다면.

여기서는 그의 장기가 빛을 보여야 할 때였다.

‘특히 처음에 우리가 초소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다른 뭔가가 있단 뜻일 텐데.’

그리고.

바닐은 그런 션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그가 던진 미끼를 덥썩 물고 말았다.

“하하! 그거야 너무 걱정 마시지요. 저희 국경수비대는 그동안 그러했고, 앞으로도 신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는 든든한 방벽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기쁘군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사실 저희가 하는 일이 제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 보니 그동안 재정이나 축낸다며 귀찮아하던 자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아, 그랬습니까?”

“예. 그런데 그런 저희 노고를 4황자님만 아니라, 네레스타 가의 삼남께서도 알아주시니… 이곳에 종군한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감격에 젖는군요. 하하하.”

순간, 션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모두 빛났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있었으니까.

4황자!

황실에서도 손꼽히는 걸출한 기재라 불리면서 ‘흑사자(黑獅子)’의 칭호까지 받아, 제국의 삼신성에도 꼽힌 그가 국경수비대를 찾았다?

션은 최대한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놀란 척하면서 맞장구쳤다.

“아! 4황자께서도 국경수비대에 관심이 아주 많으신가 봅니다.”

“관심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이따금 직접 위무하러 오시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흑의 설원에 기현상이 벌어졌다 하여 찾아오시기도… 아! 그렇지 않아도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계시는데, 한 번 뵈시겠습니까?”

그 순간, 엘릭과 션은 깨달았다.

이 자리는 4황자가 직접 자신들에게 접촉하고자 만들어낸 자리였다는 것을.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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