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전란(戰亂)
전쟁.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대체 어디랑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엘릭은 곧장 웃옷을 갈아입으면서 방을 바쁘게 빠져나갔다. 션이 바로 그 뒤로 따라붙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션은 벨렌체 왕과 노루스 재상도 잔뜩 굳은 얼굴로 뒤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메시지 마법을 전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윈즈 변경백.]
“…뭐?”
엘릭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션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엘릭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윈즈 변경백.
그곳은 애당초 엘릭도 잘 아는 곳이었으니까.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곳은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했으니까.
적사자가(赤獅子家).
제국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라는 사자공가. 그곳을 이루는 여덟 가신 중 하나가 반란이라고…?
특히 적사자가는 국경 방비를 위해 세운 군사 식민지(Mark, 변경주邊境州)의 총독이기 때문에 휘하에 두고 있는 군대도 정예병으로 유명했다.
그만한 곳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절대 쉽게 볼 수가 없었다.
문제는 평소 충성심 넘치기로 유명한 그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냐는 것인데.
아무리 따져 봐도 그럴 이유가 전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오늘 중으로 황실에서 윈즈 변경백을 제국 공적으로 선포하고, 마탑의 육망성에 소집령을 내릴 예정이란다.]
[같은 사자들이 나선다면 외려 손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로구나.]
[아마도. 그래서 우리더러 치우라는 거지.]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공감이야.]
날이 갈수록 마탑과 사자공가의 전력이 높아지고 있었고, 여기에 대한 황실의 견제도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마족이라는 공통된 적이 있을 때는 함께 힘을 합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사라진 지금은 내부적으로 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탑과 사자공가는 명목상으로는 황실을 지지하고 있다지만, 어느 정도 거리는 두고 있어서 긴장감이 점차 높아지는 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여태 별다른 문젯거리가 없었던 곳에서 이런 일이 터졌다?
당연히 가장 먼저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션은 물론, 엘릭도 황실에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명분은 뭔데? 아무리 황실이라도 그냥 막무가내로 공적 선포는 하지 않을 것 아냐.]
[마족과의 결탁.]
[뭐?]
엘릭의 걸음이 도중에 뚝 멈췄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뭐가 더 있어?]
[그런 움직임을 주도한 게 황태자라는 거지.]
[…냄새가 나다 못해 아예 악취가 나네.]
엘릭은 인상을 팍 구겼다.
황태자와 감찰4국이 그리고리를 뒤쫓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갑자기 이런 포고를 하는 게 더 이상했다.
아무래도 서둘러서 제국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 * *
이튿날.
엘릭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나설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별다른 걸 해주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떠나야 한다니. 그대들과 달리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을….”
그것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당연히 벨렌체 왕이었다.
한참 동안 엘릭과 헤이즈의 손을 붙잡은 채로 놓아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그에게 있어 엘릭은 은인이었고, 헤이즈는 친누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왕좌에 앉아야 했던 그로서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새롭게 결성될 수인 연합의 수장이 된다면 더더욱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만 더 묵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릭 일행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그리고 빚을 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굳이 당장 갚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엘릭은 한쪽 무릎을 굽히면서 벨렌체 왕과 눈을 마주쳤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실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어엿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어린아이이긴 한 모양이었다.
다만,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웃음기를 꾹 참았다.
대신에 벨렌체 왕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주 앳되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엘릭의 뇌리에도 강하게 남아있는 율호왕의 눈빛이 남아있었다.
호목(虎目).
범의 눈은 만물을 잠재우고 무릎을 꿇게 만든다.
그것이 제대로 갖춰지기를, 엘릭은 바랐다.
“대신에 나중에 갚으십시오. 이자까지 단단히 쳐서. 그러면 되시지 않습니까?”
벨렌체 왕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곧 단호한 눈매가 되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되어서 엘릭의 옆에 설게요. 그럼 되는 거죠?”
엘릭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예. 그겁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그렇게 엘릭은 벨렌체 왕과 훗날을 기약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다시 세울 가문의 우군으로 흑의 설원을 거느리는 제왕을 둔다?
이만한 전력이 또 어디에 있을까.
엘릭은 이것이 전부 장기적인 투자라고 생각했고, 조부님을 비롯한 선조들이 남겨준 가문의 유산이라고 여겼다.
그런 것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크게 키우는 것.
그것이 당대 가주인 자신이 할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볼 수 있겠죠?”
벨렌체 왕은 떠나는 마차를 한참 동안 전송하다 말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노루스 재상을 올려다보았다.
노루스 재상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우리를 찾아온 것은 메르빙거였습니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우리가 메르빙거를 찾아가도록 하지요. 물론, 그때는 메르빙거가 깨나 손꼽히는 명문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을 테니,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세도 키워야 할 것이구요. 하실 일이 많으십니다.”
벨렌체 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크고 높이 일어설 엘릭의 옆에 나란히 서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건 그도 똑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벨렌체 왕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오늘 연합 재결성을 위한 수장 회의가 있었죠? 거기서 이 안건을 올릴까 하는데….”
노루스 재상은 벨렌체 왕의 뒤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이 어린 왕이 갑자기 키가 부쩍 커진 것 같다고.
* * *
[가는 거야?]
[벌써 가는 거야?]
[더 놀다가.]
[맞아! 맞아! 아직 인사도 다 못했는데 왜 벌써 가!]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된 건 벨렌체 왕만이 아니었다.
동백의 신을 데려다주기 위해 꽃의 신전에 잠깐 들렀다가, 자세한 내막을 들은 겨울꽃의 신들이 엘릭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아니, 겨울꽃의 신들만이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 엘릭은 온실을 일일이 전부 돌아다니면서 꽃의 신들을 잠재우고 있던 냉기를 가져갔고, 그들은 모두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금세 신전을 향긋한 꽃향기로 가득 채웠다.
수백 년 만에 친구들을 되찾게 해준 고마운 사람.
그리고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겨울’을 가져간 은인이 아닌가.
당연히 겨울꽃의 신들은 그런 엘릭을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특히 수선의 신은 눈동자에 눈물이 이슬처럼 그렁그렁 맺히기까지 했으니.
엘릭은 그들을 모두 떼어놓느라 한참 동안 씨름을 해야만 했다.
대체 신력이 언제 그만큼 돌아왔던 건지. 그 작은 체구들에 어울리지 않게 힘도 엄청 세져 있었다. 만약 잠시나마 더 지체했다간 아예 신전에 박제라도 당했을 판이었다.
다행히 엘릭을 구해준 건 바로 동백의 신이었다.
[이 꼬맹이들은 본 녀가 알아서 잘 다독일 테니 당신은 그만 가보도록 하세요.]
“고생 많으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본 녀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텐가요.]
동백의 신은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콧방귀를 끼다가, 곧 짓궂게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래도 만약 걱정이 된다면, 그러지 말고 본 녀의 첩으로 들어오는 건 어떠신가요? 말했지만, 본 녀는 두 번 제안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두도록 하죠.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인데 어떤가요?]
“감사한 제안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흥! 그 선택, 곧 후회하게 될 테니 그리 알도록 하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엘릭은 동백의 신과도 차후를 기약하면서 꽃의 신전도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털썩!
진이 다 빠진 얼굴이 되어 마차 의자에 겨우 몸을 누였다.
『꽃거지들한테 적잖게 시달린 모양이로군.』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의 꼴이 우습다는 듯이 가볍게 비웃음을 터뜨렸다.
엘릭은 대꾸할 힘도 없어 그냥 웃음을 귓등으로 흘리다가, 갑자기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메피스토를 돌아봤다.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만.]
『본 왕이 이제 어디로 가는지도 일일이 너에게 보고를 하고 다녀야 한단 말이더냐?』
[그러다 저 놓치고 못 찾으면 메피만 손해일 텐데?]
『…산책을 했다.』
순간, 엘릭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마치 수상한 것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동백 님이랑?]
『…어쩌다보니.』
[엥?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요?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겁니까?]
『본 왕이 이럴 줄 알고 말 안 하려 했던 거다!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마라!』
[그렇게 발끈하니까 더 수상쩍은데?]
『아니라고!』
[알겠으니까, 좀 편하게 말해 봐요. 언제부터예요? 전혀 그럴 기미는 안 보였… 아, 내가 안배를 치르고 있던 동안이구나? 여기는 나흘 정도 지났었다고 들었는데. 하긴 그 정도면 남녀가 거사를 치르고도 남지. 아니, 근데 평소엔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왜 갑자기 그렇게 급진전을 했…!]
『이놈! 역시 본 왕의 말을 들을 생각은 죽어도 않는구나!』
메피스토는 또 이상하게 약점이 잡혔다 싶어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더 건드렸다간 정말 메피스토가 삐칠 것 같아, 엘릭도 능글맞게 웃으면서 뒤로 한발 물러섰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보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본 왕은 애당초 본질적으로 신좌니 뭐니 하는 것에 앉은 놈들과는 두드러기가 나서 겸상도 하지 않느니라!』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 속에 담긴 짙은 분노와 경멸을 놓치지 않았다.
분노는 그렇다 쳐도, 경멸이라?
어쩐지 그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동백의 신은 원래 마왕이었다가 신으로 전향한 케이스였지? 그럼 메피스토 입장에서는 배반자로 보일 수도 있겠군.’
물론, 그런 것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
[하긴. 설산왕한테도 차이던 모태 솔로가 어디서 그런 여왕님을 꼬시겠어.]
『이이…! 이놈이!』
[그럼 왜 같이 산책한 건데요?]
메피스토는 자신을 실컷 약 올리다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엘릭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은 엘릭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기가 바뀌어서 그랬느니라!』
[천… 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
엘릭은 눈만 끔뻑이다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점쟁이도 했었어요? 웬….]
『마신의 가복이자, 대마왕의 자리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딸 수 있는 것으로 보이더냐? 비록 본 왕이 힘은 잃었을지언정, 그동안 가진 지식과 견식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바.』
[잡설은 그만하시면 됐고. 그래서 본론은?]
『뱀의 자리 사이로 별똥별이 떨어졌었다. 그로 인해 천기의 운행이 어긋났고.』
[그럼 뭐가 안 좋은데요?]
『뱀은 탐욕과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허물을 벗는 모습 때문에 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꼬리를 물게 되면, 돌고 도는 자연 순환의 법칙이 되기도 하지. 그런 것의 머리 위로 별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될까?』
[재생과 순환이, 멈춘다?]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잉태를 의미하지.』
[요약 좀.]
『…여기서 본 왕은 천기가 역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역행?]
『너희들의 말로는… 정해진 역사의 커다란 틀이 바뀌었단 뜻이다.』
[…!]
엘릭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벨렌체 왕에게서 빌렸던 율호왕의 일기장.
『어떤 거대한 의지가 작동한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지.』
[….]
엘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직감적으로 여기서 무슨 말을 잘못 꺼내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의지.
그 말이 어쩐지 엘릭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그게 앞으로 있을 천기 운행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한참 나누느라고 늦었던 것일 뿐이니라.』
[…그래서 결론은 뭡니까? 점괘가 저한테 좋아요? 아니면 나빠요?]
엘릭은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지며 메피스토의 말을 기다렸고.
메피스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