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겨울 전쟁
“엘릭!”
그 순간, 헤이즈가 다급하게 앞으로 뛰어가 엘릭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동생에 대한 걱정이 다분하게 섞여 있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엘릭은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거기다 몸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하니 그녀의 눈가에 걱정이 다분히 섞이는 것도 당연했다.
“괜… 찮…!”
엘릭은 그런 누이를 달래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헤이즈가 화들짝 놀라 그를 부축하는데.
드르렁.
“…?”
갑자기 코 고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엘릭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오던 헤르만과 푸른 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말게.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나머지 잠든 것일 뿐이니. 겉보기에는 그래도 그 상처도 곧 나을 거고.”
“그, 그런가요?”
헤이즈는 헤르만의 말에 엘릭의 맥을 잡아보고,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엘릭의 맥박은 아주 평온했다. 상처도 마찬가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육안으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자가회복 되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기력 소모가 심했던 것도 사실이니 며칠 푹 쉬게 하면 괜찮을 게야.”
“감사합니다.”
헤이즈는 그제야 엘릭이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폭발에서 빠져나오는데 헤르만과 푸른 매가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뒤늦게 예를 갖추고 고개를 숙이니, 헤르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
[고맙네.]
귓가로 오거스틴의 목소리도 들리자, 헤르만은 살짝 놀랐다가 곧 담담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흑의 설원에서 있었던 모든 혼란이 끝났다.
* * *
엘릭은 아주 잠깐이지만, 의식을 잃은 동안 꿈을 꿨다.
거기엔 동장군이 서 있었다.
하지만 동장군은 더 이상 인형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목구비도 완전하게 형태를 갖추어 표정도 자유로웠다. 이 아이가 이렇게 웃을 줄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동백의 신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띠면 이렇지 않을까. 엘릭은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그 말을 하러 온 거냐?”
끄덕끄덕.
동장군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동장군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동장군은 낯선 손길이 다가오자 아주 잠깐 움찔거렸지만, 곧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용기를 갖고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이거 누가 보면 내가 되게 많이 괴롭힌 줄 알겠네. 엘릭은 볼을 긁적이면서 동장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내가 좀 괴롭힌 게 사실이긴 하군.’
엘릭은 아주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뻔뻔하게 나서기로 했다.
동장군의 표정이 점차 평온해졌다. 마치 따뜻한 방석에 앉은 고양이처럼 가만히 손길을 만끽하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저쪽에 가서도 재미있게 놀고. 말썽 피우지 말고. 알겠지?”
동장군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단순히 마력으로 치환되어 동계의 인장에 스며드는 것일 수도 있고, 오토 한의 정신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모종의 장소에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엘릭은 더 이상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외롭지 않고 웃었으면 했다.
동장군은 세월만 잔뜩 먹었을 뿐, 사실 속은 놀기 좋아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동안 수도 없이 상처를 받아온 유리처럼 투명한 아이였다.
동장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동그란 눈으로 엘릭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다음에도 놀아줄 거지?”
다음에도.
그 말에 엘릭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이 많다고 왕따시키지나 마라.”
꺄르르!
그 나이대 아이들이 웃는 것과 똑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동장군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 * *
엘릭은 조용히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동장군이 떠나기 전에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피로로 무거울 줄 알았던 몸이 개운했다. 머릿속도 다른 어느 때보다 훨씬 맑았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있던 거지?’
엘릭은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화려하게 치장된 장신구며 커튼까지. 아무래도 안트로모프의 궁정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니 달이 떠 있었다. 좀 더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는 걸 말해야 하나 싶은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일어나셨어요?”
벨렌체 왕이 이리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엘릭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벨렌체 왕은 그러지 말라고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누워 계세요. 환자가 왜 함부로 움직여요?”
엘릭은 한순간 다 나았다고 말하려다가, 굳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침대에 앉았다.
‘일어나기 귀찮기도 하고.’
매트리스가 생각보다 많이 편했다. 이런 거 어디서 구할 데가 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제가 일어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동백 님이 말씀해주셨어요.”
“동백의 신이?”
엘릭은 그제야 자신의 곁에 동백의 신과 메피스토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같이 사라진 걸 봐서는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동백 님은 잠시 정원을 거닐고 계세요. 제가 부탁드린 것이 있어서요.”
벨렌체 왕은 엘릭의 그런 의문을 읽고 대신 답해주다가, 따로 이리나에게 가져온 것을 전달해주라고 부탁했다.
이리나가 조용히 엘릭 앞으로 나서서 가져온 책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재질을 가진 책자였다.
엘릭은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자는 상당히 낡아 보이는 고서(古書)였다.
“이게 뭡니까? 원래 주시기로 했던 보물 지도나, 연구 자료집은 이미 받았….”
“율호왕께서 남기신 일기장이에요.”
“…?”
엘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책자를 건네는 이리나의 손이 많이 떨리더라니.
그런 것이라면 호왕가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일 텐데, 왜 자신에게 주는 걸까?
벨렌체 왕은 여전히 속을 짐작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사실 저도 어젯밤에 서고를 뒤지다가 우연히 찾은 거라서요. 그런데 내용을 뒤지던 중에 조금 신기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책갈피를 끼워놨으니 한 번 확인해보세요.”
엘릭은 벨렌체 왕이 대체 뭘 발견했다는 걸까 싶어서 도중에 끼워진 책갈피가 끼워놓은 부분을 열어 내용을 빠르게 살폈다.
수인족의 문자로 적혀 있어 해석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그래도 엘릭은 별 어려움 없이 금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2월 14일.
흥미로운 인간을 발견해 부족으로 데려왔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느 이름 모를 수인이 거둬주었다고 밝힌 인간은 인간 중에서도 보기 드물다던 금발과 녹안을 지니고 있었다. 강체술을 부리는 녀석은….
2월 16일.
부족에 과연 융화될 수 있을까 싶었던 인간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처음 들어올 때 갈등을 빚었던 랄프 등과는 여전히 갈등을 겪었지만….
2월 17일.
이제 슬슬 정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이 어느 한 장소를 추천해주었다….
2월 29일.
인간은 내가 가진 강체술에 유독 흥미가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사용하는 강체술도 어딘지 모르게 내 것과 많이 닮았다. 아무리 같은 강체술이라고는 해도 유파에 따라서 특징이 다 다르니 절대 닮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더구나 녀석의 것은 어딘지 모르게 미완성으로 보이기도 했다….
3월 31일.
최근 들어서 이상한 기현상이 빚어지는 날이 많아졌다. 눈보라가 쌀쌀하게 불어 닥치고, 어느 부족에서는 이미 피난을 결정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예전에 일족의 장로들에게서 옛날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4월 15일.
피해자가 양산되자, 이를 확인하기 위한 준비를….
4월 16일.
길을 떠나려 한다. 그런데 궁금한 건, 저 녀석이 키우는 나무는 대체 뭘 먹이고 있기에 저렇게 잘 자라는 건가 싶다….
한순간이지만, 그가 있는 방은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샤락.
샤락.
조용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릴 뿐.
그만큼 일기장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읽는 내내 엘릭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만큼 엘릭이 받은 충격이 크다는 증거였다.
‘그냥 안배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일기장에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자신이 안배에서 겪었던 일들을 담고 있었다.
비록 이름은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아 ‘인간’이라는 단어로 퉁 치고 있다지만.
오늘날의 안트로모프가 있는 정착지를 소개한다거나, 랄프와 갈등을 빚었다던가, 동장군이 몰려와 길잡이로 자신을 앞세웠다거나 하는 내용은 절대 그냥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다 떠나서라도.
율호왕이 가진 강체술을 탐냈다는 내용은 영락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동장군과 관련하여 쭉 이어지는 일기장의 끄트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5월 6일.
여태 방구석 전설로만 들었던 동장군을 만났다.
5월 7일.
그동안 내 강체술을 염탐하던 빌어먹을 놈이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나? 그리고 허깨비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든 게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은 엘릭 메르빙거.
메르빙거의 먼 후손이라고 했다.
“…!”
엘릭은 이제 숨을 쉬는 것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기습적으로 찾아온 충격은 그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마도경식을 손으로 매만졌다.
대체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안배’라는 것은 정체가 무엇일까?
“일단 메르빙거와 관련이 되어 있고, 엘릭 님이 거론되어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가져왔어요. 물론, 같은 이름을 쓰신 메르빙거의 선조가 율호왕과 인연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벨렌체 왕이 꺼낸 말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했다.
“감… 사합니다. 저, 그리고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예. 엘릭 님이라면 가져가셔도 좋아요. 대신에 저희에게도 중요한 사료이니 소중하게 보관하셨다가 돌려주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릭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이번에 겪은 안배는 단순히 심상 세계라고만 말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긴 했다.
하나 같이 너무 사실적이었고, 인물들도 생생했으니까.
‘마치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현실이라 치부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게 너무 많았다.
400년 전의 과거로 타임 워프시킨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마법인데, 거기서 미션을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마법이 기적을 체현한다고 해도, 그런 종류의 마법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전지전능한 신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메르빙거는 이렇게 몰락하고 만 걸까?
‘오토 한이 자신의 사가를 찾아달라고 했었지…? 어쩌면 거기에 이와 관련된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엘릭은 한시라도 빨리 장벽 이남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북방행을 통해 알아야 봐야 할 의문이 너무 많이 생겼으니까.
‘율호왕이 남겼다는 보고도 찾아가 봐야 하고. 날 정말 기억하고 있었다면 거기다 무엇을 뒀을지도 모르니까.’
엘릭은 일행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장 흑의 설원을 떠나자고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일은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쾅!
“엘릭!”
갑자기 방이 활짝 열리더니, 션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어딜 급하게 다녀왔던지 그는 숨을 크게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엘릭은 친구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굳혔다.
“다행이구나…. 안 깨어나면 어떡하나 했었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방금 본 가에서 급전이 도착했어. 빨리 귀환하라고.”
“급전?”
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전쟁이 터졌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