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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26화 (126/405)

126화

겨울 전쟁

엘릭은 율호왕으로부터 대부분의 초식과 비기까지 전수를 받은 상태.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완성되지 않은 원형 중의 원형에 가깝고, 엘릭이 아직 깨닫지 못한 부분도 많아 제대로 펼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형(形)은 어떻게든 모방할 수 있다지만, 그 속에 담긴 의(意)까지 똑같이 담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후3식 중에서 당장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였다.

천호작렬.

하지만 엘릭은 자신 있었다.

이것만 하더라도, 자신의 마법과 한데 섞는 것이 가능하다면 충분한 위력을 자랑할 수 있다고.

천 마리의 범이 동시에 찢어발긴다는 뜻처럼, 이 초식은 ‘난(亂, 어지럽다)’과 ‘이(離, 해체하다)’의 성질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촤촤촤촤!

엘릭의 일격이 강하게 작렬한 자리로 엄청난 폭발이 치솟더니, 거기서 파생한 칼바람이 수도 없이 녀석을 난도질해버렸다.

특히 엘릭은 바로 여기에 겨울의 기운까지 가득 담았으니.

과연 그는 알까?

이것이 바로 그리고리가 그토록 갖고자 애썼던 ‘겨울’의 두 가지 권능 중 하나인 ‘북풍(北風)’이라는 것을.

엘릭을 억지로 태우려던 여우불이 갈가리 찢기면서 흩어졌다.

크오오오!

불가사의는 가뜩이나 헤르만이 깊게 쓸고 간 상처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제 핵이 있는 중심부까지 깊숙하게 칼바람이 밀고 들어오자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기를 이용해 상처를 회복하려는 시도조차도 쉽게 이뤄지질 못했다. 상처 부위가 얼음으로 뒤덮이면서 복구가 더디기만 했으니까.

촤아아악!

키아아-

결국 불가사의는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나겠다 싶었던지, 몸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이미 녀석의 몸뚱이는 마치 수백 마리의 범들에게 일제히 물어뜯긴 것처럼 전신이 온통 상처로 도배되어 있었다. 검붉은 마기가 핏물처럼 쉴 새 없이 튀어 올랐다.

“어딜.”

하지만 그런 녀석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엘릭이 아니었다.

엘릭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녀석의 뒤를 쫓았다. 동계의 인장만이 아니라, 흉성의 인장까지 같이 발동하고 있었다.

키키킥! 도와줄까?

“네가 맛난 걸 먹고 싶은 건 아니고?”

흐흐. 도와달라는 말은 죽어도 안 하는군. 아주 자존심이 강하단 말이지. 역시 메르빙거. 듣던 대로야.

“싫음 말던가.”

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포식할 기회를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마왕 휼의 사념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안 그래, 주인?

주인이라.

엘릭은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휼의 사념이 정말 그에게 충성을 바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힘을 주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령에 충실하다는 뜻일 테지.

보통 마왕 출신이라면 메피스토처럼 고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녀석은 아귀 출신이라 그런지 굳이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지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엘릭보다도 훨씬 빠르게 움직이면서 단숨에 몸집을 일으켜 불가사의를 뒤덮었다.

불가사의는 불안을 느꼈던지 몸을 크게 비틀어서 어떻게든 그림자를 떨쳐내려 했지만.

캬캬캬캬!

휼의 사념은 오히려 그렇게 녀석이 발버둥 치는 꼴이 재미난다는 듯이 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가뜩이나 응결 때문에 잘 닫히지 않던 상처에 그림자가 멍울처럼 맺히면서 하나 같이 톱니 이빨을 잔혹하게 드러냈다.

찰칵!

찰칵!

수많은 톱니 이빨이 닫혔다가 열리기를 반복할 때마다, 불가사의는 몸이 이리저리 뜯기는 고통에 울부짖어야만 했다.

꾸우우우!

고통에 찬 비명이 구슬프게 울렸다.

여우불이 몇 번이나 다시 땅거죽을 갈랐다.

쐐애애액-

엘릭은 그런 녀석에게로 재차 쇄도하면서 동계의 인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빙열을 퍼부었다.

쩌거거걱!

퍼어어엉!

불가사의의 다른 한쪽 다리가 또 통째로 뜯겨 나갔다.

『아주 걸레로 만들어놓는군.』

메피스토는 엘릭과 휼의 사념이 벌이는 협공을 두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쿠쿠쿠쿠…!

엘릭은 결이 잔뜩 뭉쳐있는 방향을 따라 불가사의를 부수고 또 부수면서, 그리고 찢고 또 찢으면서 아주 깊숙한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 역시 여우불에 수도 없이 그을리고, 수도 없이 많이 상처를 입어 지쳐 보였지만 두 눈만큼은 차갑게 번들거렸다.

그곳에.

결이 잔뜩 응집된 검붉은 핵(核)이 있었다.

“【부서져라】.”

엘릭은 마지막 남은 힘을 있는 힘껏 쥐어짜면서 핵을 두들겼다.

쩌걱-

어디선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퍼어어엉!

불가사의가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 * *

“혀, 혈미왕이 폭발한다! 모두 물러나!”

퓨리에서 벌어지는 엘릭과 불가사의의 싸움을 지켜보던 수인들이 모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이미 안트로모프나 퓨리 등, 소속에 구분 없이 엘릭의 싸움을 응원하던 중이었다.

퓨리의 수인들도 자신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여기서 엘릭이 진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불에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동장군이 흑의 설원을 겨울로 뒤덮었던 것처럼, 이제는 뜨거운 여름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설원 대신에 가뭄이 찾아오고, 한파 대신에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환경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은 반드시 피해야만 해…!’

‘더 이상 험한 환경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더군다나 그들은 벨렌체 왕에게서 이미 혈미왕이 그동안 동장군을 몰래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들어 알고 있는 상태.

그동안 왕으로 모셨던 혈미왕에 대한 충성심이 배신감으로 탈바꿈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벨렌체 왕을 따르기로 맹세하고, 엘릭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시가 쑥대밭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친 폭발이 일어나니 놀랄 수밖에.

검은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고, 뜨거운 열풍이 파문을 그리면서 날아왔다.

“친위대와 투사들은 전하를 지켜라!”

노루스 재상의 명령에 따라 이리나를 비롯한 친위대와 퓨리의 투사까지 포함한 투사들이 서둘러 전열로 나서면서 벨렌체 왕과 일반 병사들을 지키고자 했다.

콰콰콰!

“크윽!”

“대체… 저 인간은 대체 뭘 먹었기에 저런 곳에서 싸워댈 수 있었던 거지?”

그들은 있는 힘껏 오러를 터뜨리면서 열풍을 한참 동안 막아냈다. 그래도 위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모두가 지친 소리를 내야만 했다.

투사들 중 몇몇은 수화를 진행하고도 털이 그을리고 화상을 입는 부상을 입게 되자,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저, 저…!”

노루스 재상도 서둘러 힘을 보탰지만, 별달리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럴 때 마법이라도 부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노루스 재상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밑 빠진 독에다 물 붓는 식으로 허공에다 힘을 마구잡이로 뿌려대는 게 아니라, 마법이라도 쓸 수 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텐데.

‘사실 따지고 보면 동장군도 그렇지 않았나…! 우리가 조금만 시야를 넓혔더라면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을.’

수인족이 몰락하고 만 건 결국 이기와 문명을 거부한 종족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도와준다면…!’

그런 생각에 이를 악무는데, 갑자기 노루스 재상의 귓가로 한숨이 들려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간에, 정말이지 왜 이리도 다들 자존심만 더럽게 센 건지. 에잉, 죄다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란 말이지. 쯧!”

노루스 재상이 무거워졌던 고개를 다시 위로 번쩍 들었다.

오거스틴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여태껏 친위대와 투사들을 지독하게도 괴롭혀대던 열풍이 그의 주변으로는 전혀 범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수장과 병사들이 있는 수인 진영 전체에 걸쳐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결계가 두텁게 쳐져 열풍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저 거센 바람 소리만 귓가를 때릴 뿐.

결계 안쪽은 평온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조금 전까지 열풍을 겨우겨우 막아내던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수인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으로 오거스틴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건 노루스 재상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주문을 영창하는 듯한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만한 결계를 단지 손짓만으로 일으켰다고?

마법에 관해서 문외한인 그조차도, 이만한 실력을 벌일 수 있는 건 제국에서도 몇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노루스 재상은 엘릭이 오거스틴을 가리켜서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조부, 우스던 메르빙거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실력자라던….

“이봐, 수인.”

“왜, 왜 그러시오?”

노루스 재상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화들짝 놀란 채로 그를 바라봤다.

보통 사람에게 ‘이봐,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누구나 기분 나빠할 것이다. 그건 수인족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서인지 노루스 재상은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

그는 혈미왕에게서조차 이토록 거대한 압박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40년 전에 우스던이 여기에 왔었다고?”

“그, 그렇소만.”

이런 걸 왜 묻는 걸까?

“그렇단 말이지.”

오거스틴은 무슨 생각인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 잘 봐둬라.”

순간, 노루스 재상은 오거스틴의 두 눈동자가 녹색 빛깔을 띠더니, 서서히 새하얀 백색으로 물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 동공이 뒤집히면서 눈자위가 전부 백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노루스 재상은 그것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한평생 마족을 안고 살면서 웬만한 기세 따위는 전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고 말았으니까.

츠츠츠-

그를 주변으로 ‘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제는 동장군이 부리던 어둠과는 전혀 다른 밤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눈보라를 거칠게 일으켜 햇볕을 가린 것이라면, 저것은 세상에 있는 빛이란 모든 빛은 전부 빨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마치 새하얀 장막을 오거스틴 주변에다 둘러친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장막의 색이 눈자위만큼이나 새하얗다는 점이었다.

하얀 밤.

노루스 재상은 순간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그보다도 훨씬 위대한 마도(魔道)일지니!”

오거스틴은 자신이 별의 마도사보다도 훨씬 위대하다는 소리를 잘도 지껄여대면서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방으로 불어 닥치던 열풍이, 거기에 실려 마구잡이로 퍼져나가던 여우불이, 하얀 밤에 짓눌려서 갈가리 찢기고 있었으니까!

끼아아아!

마치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열풍과 불길이 만들어내던 거친 소리도 거기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수인들은 저마다 귀를 막으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본능을 자극하는 공포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촤촤촤촤!

그리고 거대한 태풍이 불면서 모든 것이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그대로 싹 사라졌다.

마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퓨리를 중심으로 금세 흑의 설원 전역으로 뻗쳐 나갈 것 같았던 불길과 열풍이 거짓말처럼 뚝 그쳐 사라졌다.

세상을 뒤덮던 하얀 밤도 어느새 같이 없어져 있었다. 수인들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하나둘씩 거둬 들여졌다.

하지만 노루스 재상을 비롯한 수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대체 무슨 광경을 본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만한 재해를 저렇게 쉽게 해치운 솜씨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특히 그동안 엘릭 일행과 적대시해왔던 퓨리의 수인들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만약 저 힘이 처음부터 자신들에게로 향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이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저벅. 저벅.

엘릭이 모든 싸움을 끝내고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서.

하지만 그런 제자를 보는 오거스틴의 입술에는 장하다는 듯 미소가 걸려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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