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125화 (125/405)

125화

겨울 전쟁

마족의 계급을 결정하는 인장은 총 5개의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일반.

고급.

진귀.

고유.

설화.

일반 등급은 흔히 ‘미스터리’라고 분류되는 기이한 현상들을 가리킨다.

자아도 의식도 갖추지 못해 그저 본능에만 취한 채로 돌아다니는 아귀 같은 하급 마족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고급 등급부터는 스스로가 마족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주체적인 활동이 가능해지고, 진귀 등급은 강자의 반열에 속하는 마족들이 거머쥐게 된다.

엘릭이 설인들을 무찔러서 얻은 냉혹의 인장이 바로 여기, 진귀 등급에 속했다.

그러나 정말 ‘대단하다’거나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등급은 이후부터였으니.

마족 중에도 ‘지배자’나 ‘군주’ 반열에 오르는 이들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고유 등급은 군장(軍長) 급이.

설화 등급은 마왕(魔王) 급이 여기에 해당했다.

‘설산왕은 원래 냉혹보다 상위 등급인 ‘냉혈(冷血)’이었지.’

하지만 무덤에 묻힌 뒤, 격이 하락하면서 고유 등급에서 진귀 등급으로 떨어진 경우였다.

엘릭은 바로 여기에 착안해 냉혹의 인장을 진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10성을 채우면서 진화를 목전에 두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진화란 생각보다 그리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었고, 깨달음이나 기연과 같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엘릭은 편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삭풍의 인장까지 끌어오기로.

그리고 여기에 동장군이 담긴 빙정까지 더할 수 있다면… 오히려 냉혈의 인장보다도 더 뛰어난 고유 급 인장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토 한이 누누이 말했던 ‘겨울’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장이 탄생했다.

파아아!

엘릭은 자신의 손등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동계의 인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겨울’이란 말이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놀랐던 것은 체내를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다니는 마력량이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까.

32%.

그의 마정석이 용왕과 마왕의 것을 합쳤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이 정도 용해율만 하더라도 현 대륙에서 거의 손꼽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동장군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마력량에 비하면 아주 적겠지만.

현재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가 지금의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 크게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동계 인장의 성취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남은 동장군의 힘을 전부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긍정적이었다.

『마법에 제대로 입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고유 급 인장을…!』

하지만 어쨌거나 진실을 아는 외부인이 봤을 때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특히 메피스토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턱을 부르르 떨었고.

동백의 신은 전생의 자신이 남겼던 허물을 소화 시킨 엘릭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토 한이 나섰다고는 해도, 이건…!]

아무리 메르빙거의 안배가 작동했다고 해도, 마력을 저렇게 통제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재능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했으니까.

파아앗-

하지만 엘릭은 메피스토와 동백의 신이 내뱉는 감탄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지금은 혈미왕의 거죽을 쓴 불가사의를 처치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불어닥쳐라】.”

콰콰콰!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거센 눈발이 돌풍을 그리면서 퍼져 나갔다.

엘릭을 잡기 위해서 달려오던 불길이 눈발에 강제로 찢겼고.

파아아!

하늘이 까맣게 내려앉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퍼진 삭풍이 고스란히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불길을 단박에 꺼뜨렸다.

그러면서 지면에 깔리는 빙판은 이곳에 어떤 계절이 찾아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겨울’이구나…. 정말 겨울을 훔쳐 가서 마음대로 다루고 있어.]

동백의 신은 어쩐지 겨울 궁전에서 머물던 자신의 모습이 언뜻 떠오르는 것 같아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솟아라】.”

엘릭이 손을 앞으로 가볍게 흔들자, 지반이 흔들리면서 얼음 가시가 마구잡이로 돋아나 불가사의를 꿰뚫었다.

크아아!

불가사의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다가, 몸을 크게 뒤틀어 꼬리로 지면을 쓸어냈다.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빙판이 깔렸던 땅거죽이 뒤집혔다.

하지만 엘릭은 마투술을 사용해 허공으로 가볍게 몸을 띄우면서 공세를 피했다.

동시에 허공에서 몸을 뒤틀면서 새로운 언령 마법을 구동했다.

“【묶어라】.”

촤르륵, 촤르륵!

허공에서 잔뜩 응결된 얼음으로부터 냉혹의 사슬이 튀어나와 녀석의 네 다리와 꼬리를 묶었다.

놓으라면서 광란을 부리자 사슬이 도중에 뚝뚝 끊어졌다. 여우불이 사슬을 타고 올라와 강제로 녹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엘릭은 그럴 때마다 부서진 것보다 훨씬 많은 냉혹의 사슬을 다시 꺼내 녀석의 몸뚱이를 빽빽하게 묶었다.

감기고, 또 감기고.

팽팽해지고, 또 팽팽해졌다.

그러다 모든 사슬이 당장 끊어질 듯이 빳빳해졌을 때.

엘릭은 불가사의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으면서 새하얗게 물든 ‘소수’로 녀석을 후려쳤다.

“【부수고】, 【또 부숴라】.”

빙열.

설산왕의 시그니처 스킬이 다시 작렬했다.

쩌거걱, 퍼어엉!

푸우우우-

부서진 부위에서 마기가 핏물처럼 치솟았다.

키아아아!

불가사의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떻게든 엘릭을 잡고자 여우불을 다른 어느 때보다 훨씬 크게 활활 불태웠다.

저대로 불길이 하늘까지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화력. 퓨리의 남은 부분들도 이미 거의 잿더미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크흡!”

엘릭은 그 속 갇힌 채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동계의 인장으로 끌어올린 추위로 열기를 막아보고는 있지만, 좀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엘릭은 더블 캐스팅에 주력했다.

왼손은 냉혹의 사슬로 이어지는 마력장을 꼭 붙잡아 녀석을 더더욱 거세게 구속해나가고.

오른손의 끝은 빙열을 잇달아 전개하면서 불가사의를 완전히 찢어놓고자 했다.

콰콰콰콰!

검붉은 불길과 시퍼런 한파가 서로 맞물리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둘의 팽팽한 힘겨루기는 한참 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 *

“빌어먹을 놈.”

오거스틴은 비교적 멀쩡한 퓨리의 성곽에 올라선 채로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의 두 눈은 저 멀리 퓨리를 이미 몇 번씩이나 뒤집고 있는 불길과 한파의 충돌에 향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로 인해 중첩되었다가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마력장의 진원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직접 나서지 그러슈?”

바로 옆에 있던 길리티는 그런 오거스틴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저놈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줘?”

“사제지간이라고 하지 않으셨수? 그냥 나서서 도와주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한담?”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안 이러지!”

“하여간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참 까탈스러운 영감탱이야.”

길리티는 버럭 성을 내는 오거스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신의 의형만큼 모순적인 사람도 없다 싶었다.

평소에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이런 일에는 저렇게 체면치레를 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도와주기가 부끄러운 겐가?’

이게 정답이겠군. 길리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실 오거스틴은 안트로모프에서부터 퓨리와의 전쟁까지, 엘릭이 도와달라는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릭이야 그동안 오거스틴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다면 실망할 거로 생각했지만.

정작 오거스틴으로서는 청연의 미궁에 빠뜨렸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제자 앞에서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내비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빽빽하게 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이만큼 대단하니, 너도 그만큼 부지런히 정진해서 자신을 쫓아오라는 식으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거스틴은 엘릭과 척을 이룬 적들이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언제 한 번은 자신이 나설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동장군을 잠재우거나, 아니면 혈미왕을 상대할 때나. 두 놈은 나도 상대하기가 조금 버겁다 싶은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길리티와는 다르게, 오거스틴은 이미 마왕 휼을 쓰러뜨린 전적이 있지 않던가. 그보다도 약체로 보이는 혈미왕을 처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엘릭은 여태 그에게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있다면 그저 벨렌체 왕 등을 보호해달라는 정도?

그런 것이야 돕는다는 축에도 못 끼었다. 거기서도 그가 할 건 크게 없었으니까.

오히려 엘릭은 제 갈 길을 너무 잘 개척하고 있었다. 이제는 처음 장벽을 넘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혈미왕과 팽팽하게 겨루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자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스승으로서 뿌듯함을 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씁쓸함만 남는 법이었다.

덕분에.

오거스틴은 이런 자신의 감정을 조금 낯설게 느끼는 중이었다.

언제나 인생을 제멋대로 살아왔던 그가 다른 사람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길리티는 그런 오거스틴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인간 같지 않은 양반도 좀 답답한 걸 느껴봐야 정신 차리지. 암, 그렇고말고. 흐흐흐!’

길리티는 어차피 엘릭에게 일이 생긴다면 즉각 도와주러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없어도 저놈들이 잘 알아서 처리해줄 것 같고.’

길리티의 시선이 성문 쪽으로 향했다.

헤르만과 푸른 매가 수인들을 바깥까지 무사히 탈출시켜주더니, 곧 엘릭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특히 선두에 있는 헤르만은 장벽을 넘은 이후로 몇 차례 실전을 겪으면서 빠른 속도로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저러다 원래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면 바일 가문은 확실히 메르빙거의 우방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테고…. 저들이 장난치는 것처럼 정말 사위라도 된다면 아주 든든해지겠군. 우리 제자님, 앞으로 계속 날아오를 일밖에 없겠구만, 그래.’

길리티는 거기서 자신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그게 오히려 걱정이었다.

오거스틴처럼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휘이익!

그래서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야수들을 불러와 헤르만 등에게 붙여주었다.

* * *

‘음?’

헤르만은 앞으로 달리다 말고, 갑자기 자신들 옆으로 따라붙는 다이어 울프들을 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 위로는 보라매 네 마리가 가까이 붙어서 날고 있었다.

하나같이 깊은 마력을 품고 있는 것들.

뒤쪽 성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길리티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였다.

엄호해 줄 테니 마음껏 활개를 치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피식-

헤르만은 자기도 모르게 실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국의 구(舊) 공적이자, 네레스타의 식객인 사람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기사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그로서는 범죄자 출신인 길리티를 아직도 의심에 찬 눈길로 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는 호의를 무시하거나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지금 몸 상태라면 놈의 발을 묶는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헤르만은 엘릭이 불가사의를 처치할 만한 비장의 패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도 마법의 한 종류일 테지.

다만, 그것을 준비할 만한 여유 시간이 없어서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을 뿐.

헤르만은 그것을 꺼낼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어줄 수 있다고 자부했다.

꽃의 신전에서 ‘매의 부리’를 완성하면서부터 육체 회복은 더 크게 탄력을 받고 있었다.

아마 그도 조금만 더 여유가 주어진다면, 혈미왕을 어렵지 않게 벨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마왕과도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받는 사자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멋진 광경은… 저 친구에게 맡기는 게 더 좋겠지.’

헤르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검 끝에 의념을 집중했다. 검신을 따라 오러가 맺혔다. 푸른 빛깔의 오러 블레이드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쩌어어엉!

맑은 울림소리와 함께.

콰콰콰-

촤아악!

푸른색 궤적이 허공에다 사선을 내그었다. 불가사의의 한쪽 다리가 뭉텅 쓸려나갔다.

쿵!

키에엑-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헤르만의 검격은 불가사의의 왼쪽 앞발뿐만 아니라 뒤쪽 몸뚱이까지 절반 이상을 도려내는 데 성공했고.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엘릭은 크게 눈을 반짝이면서 동계의 인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강체술.

후(後) 3식.

천호작렬(千虎炸裂).

콰아아앙!

그동안 안배에서 익히고 나서도 단 한 번도 꺼낼 틈이 없었던 강체술의 완성본이, 400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