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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24화 (124/405)

124화

겨울 전쟁

『제정신이냐! 어서 뱉어!』

[당신, 대체 지금 무슨 짓을…!]

메피스토와 동백의 신은 갑작스러운 엘릭의 반응에 기겁하고 말았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을 시도하고 있었으니까.

빙정은 그 자체로 극한(極寒)의 성질을 품고 있는 기물(奇物). 당연히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물건인데, 잘못 다루기라도 했다간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빙정에는 동장군이 담겼다.

아주 오랫동안 흑의 설원에 겨울을 가져왔던 그 동장군이!

이미 흉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삼킨다?

그것도 아무 준비도 없이?

두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단순히 영약 정도로 생각하고 저딴 짓을 저지른 것이라면 어떻게든 뜯어말려야 했다.

자칫 동장군이 품고 있던 마성에 휘둘려 최악의 경우 인외로 변질될 수도 있었고, 아무리 운이 좋아도 마력 폭주로 인해 인사불성이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콰콰콰!

쩌저적-

달리는 내내 엘릭을 따라 막강한 한파가 휘몰아쳤다. 발로 땅을 내디딜 때마다 빙판이 깔렸다. 피부 위로 성에가 잔뜩 끼고, 그 위로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릭은 웃고 있었다.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파아아아!

냉혹의 인장이 빛났다. 삭풍의 인장이 변했다. 빙정이 체내에 흡수되면서 폭발적으로 새어 나온 동장군의 마력이 막대한 속도로 두 인장 속에 빨려 들어갔다.

이미 안배를 거치면서 10성, 완성형을 갖추었던 냉혹의 인장은 동장군의 추운 성질을 맘껏 머금으면서 기존의 틀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화(進化).

한 단계 상위 등급으로 변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마족의 인장이 진화한다는 것은 고작 ‘등급의 상승’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 인장의 진명이 가진 가능성을 뿌리째 바꾼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진화는 그리 손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냉혹의 인장이 가진 한계를 삭풍의 인장이 뒷받침해주었다.

삭풍의 인장이 동장군의 한파를 맹렬한 속도로 흡수하면서 계속 획을 더해나간 것이다.

6성, 7성, 8성….

원래대로라면 상당한 시일과 깨달음을 필요로 했을 테지만, 동장군이 주는 기연 덕분에 빠르게 완성 형태까지 다다를 수 있었으니.

쩌어어엉!

덕분에 삭풍의 인장이 완전한 형상을 갖췄을 때, 두 인장은 동시에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꽁꽁 언 얼음 조각이 떨어졌을 때 날 것 같은 맑은 울림.

하지만 인장과 다르게 폭주하는 마력은 마나 로드를 마구잡이로 헤집다 못해 이리저리 뜯어내고 망가뜨리기까지 했으니.

과부하가 걸린 육체는 금방이라도 꽁꽁 얼어붙을 것처럼 피부가 새하얗게 변하고, 핏줄이 시퍼렇게 훤히 드러났다.

성에는 얼굴 표면까지 덮어오면서 끝내 망막까지 뒤덮었으니.

시야가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심상 세계가 나타났다.

화아악!

그곳에서.

동장군은 웃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가 있는 곳은 새하얀 설원이었고, 한파가 몰아치는 쓸쓸한 곳이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서 오토 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갈 테냐?”

동장군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헝겊 인형처럼 보이던 그녀는 이제 표정이 많이 다채로워져 있었다.

오토 한을 보는 시선은 마치 부모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선망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동장군을 보면서 오토 한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너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냐.”

동장군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정말 그럴 거냐는 의미.

그녀의 순수함이 보이는 것 같아, 한숨은 더 커지고 말았다.

“이렇게 착한 아이가 왜 그동안 그런 모진 고초를 겪은 건지. 오히려 내가 미안해질 정도구나.”

동백의 신이 전생에서 눈을 감으며 남긴 화원을 꽃의 신전으로 직접 탈바꿈해준 사람이 바로 오토 한이었다.

동장군을 막을 방법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꽃밖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토 한은 몇 번이나 동장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지만, 소멸시키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동장군은 흑의 설원이 가진 기후에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불가사의였으니. 그런 것을 물리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꽃의 신전이라면 동장군을 물리칠 수는 없어도 억제할 수는 있었다. 꽃에는 ‘봄’의 생명력이 듬뿍 담겨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바닥이 나고, 꽃의 신들도 하나둘씩 잠들어 버리면서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후손인 우스던 메르빙거가 직접 흑의 설원을 찾아와 동장군을 막은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더 이상 꽃의 신전만으로는 동장군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동장군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메르빙거가 계속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때부터 그들은 생각을 바꿨다.

물리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아예 훔쳐버리자고.

오토 한이 지금과 같은 안배들을 남긴 이유였다.

추위를 다른 곳에서 배워와, 동장군으로부터 찬바람을 뺏어올 수 있다면. 그런다면 눈에다 동장군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엘릭은 오토 한과 우스던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일을 잘 처리해주었다.

애당초 그들이 예상했던 그림은 엘릭이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으로 동장군을 낱낱이 해체시켜 동장군의 본체를 빙정에다 봉인시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동장군을 ‘이해’한 엘릭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마음을 달래주어 아무 어려움도 없이 그녀를 빙정에 담아내는 데 성공해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혈미왕을 이용하는 등 여러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지만.

그런 것이야 드는 시간이 준 만큼 피해도 줄었으니 오히려 칭찬해 줄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동장군을 적으로만 간주해왔던 오토 한으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신도 처음부터 엘릭처럼 그녀를 이해하면서 다가갔더라면. 동장군이 받을 상처가 이렇게까지 크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잘 챙겨줘야겠다. 오토 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저쪽으로 가면 더 이상 심심할 일은 없을 게다.”

동장군은 정말 기쁜 듯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오토 한은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동장군이 엘릭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듯.

그리고 고맙다는 듯.

저쪽에 간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오토 한은 그런 동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추위, 찬바람, 눈…. 참 착실하게도 잘 모았구나. 특히 마지막은 일부러 말을 해주지 않아 깨닫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해버렸고.”

“그럼 이제 주시죠?”

“뭘?”

“뭐긴 뭡니까, ‘겨울’이지.”

오토 한이 짓궂게 웃었다.

“아직 자격이 갖춰졌다고는 말 안했다만? 계절을 얻기가 어디 그리 쉬운 줄 아느냐? 더욱더 정진하고, 참오하고, 공부해서 하나하나를 깨달아나가야지.”

“이렇게까지 굴러댔는데도, 못 준다는 겁니까?”

“어허! 못 준다니. 아직 모자라다는 거지. 때가 되면 내려줄 터이니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뺑이 열심히 쳤는데 입 싹 닦으려고 하시네.”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더냐.”

“하고도 남으시니 문제죠. 장군아, 그 아저씨 못된 사람이니까 이리로 올래?”

엘릭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동장군을 보면서 새삼 좋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순간, 동장군은 오토 한의 손을 잡다 말고, 홱 하고 뿌리치더니 엘릭 쪽으로 ‘도도도!’하고 달려가 옆에 섰다.

허!

오토 한은 허탈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 아이를 데려가서 뭐 하려고?”

“같이 쎄쎄쎄 하고 놀죠, 뭐. 너도 좋지?”

끄덕끄덕!

“얠 데리고 가서 뭘 하시려는 것 같은데, 제 허락 없이는 안 됩니다.”

엘릭은 동장군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당당하게 나섰다.

그의 말마따나 동장군을 데리고 가려 했던 오토 한으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존경은 못 할망정 선조의 머리 위로 올라가려 하는구나. 오호통재로다. 어쩌다 본 가가 이렇게 되었는고.”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아껴주지는 못할망정 후손을 괴롭힐 생각만 하시는 선조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만.”

엘릭은 에누리 따윈 없다면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외로 비딱하게 꼬았다.

“그래서 주실 겁니까, 마실 겁니까?”

“이미 받아 들여주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놓고, 받아들이라고? 공갈도 참 이런 공갈이 없구나.”

사실 엘릭은 지금 이 시간에도 육체가 빠른 속도로 변화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동장군의 방대한 마력과 극한의 성질이 육체를 시시각각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엘릭은 여기서 배수진을 친 셈.

만약 여기서 ‘겨울’을 완성할 방법을 얻지 못하고 현실로 되돌아간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야 여태껏 엘릭을 키우기 위해 여태껏 들인 노력이 전부 허사로 돌아갈 판국이라, 오토 한으로서는 억지로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입술 사이로 쓴웃음이 삐져나왔다.

“반쯤 장난조로 말하긴 했다만, 그래도 당장 ‘겨울’을 얻어가서야 좋을 건 없다. 더 단단하게 기반을 쌓아두고 가져가는 걸 추천한다만. 그걸 위한 준비들도 어느 정도 되어 있고 말이다.”

“저도 되도록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바깥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아서 어쩔 수가 없네요.”

“뻔뻔한지고. 애당초 핑계에 불과할 것이면서.”

엘릭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토 한은 혀를 끌끌 찼다.

“대체 그동안 본 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망나니 같은 놈이 나왔누.”

엘릭은 굳이 ‘선조님 같은 분들 말이죠?’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오토 한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가거라. 일단 기회를 줄 테니. 단, 밖에 나가서 일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내 사가(私家)에 찾아가 다오. 거기에 원래 겨울을 완성하기 위해 모아둔 다른 재료들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더냐? 그럼.”

“…?”

“그런 감사한 분께 까분 죄는 받아야지.”

엘릭은 한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재빨리 심상 세계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퍽!

이번에도 오토 한의 주먹이 더 빨랐다.

* * *

「마를 먹으라.」

「마를 삼키라.」

「마를 마시라.」

「그리하여 모든 마를 네게 담고 또 담아라. 그리하여 새로운 마를 올려라!」

언젠가 안배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목에 걸고 있던 마도경식의 4개 보석 중 다이아몬드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확연한 빛을 발했다.

시리도록 차갑고, 쌀쌀맞으면서도 찬란한 빛을.

「또한, 그렇게 올라온 마는 너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니.」

「‘겨울’은 그런 너에게 무섭고 냉혹한 모습으로 찾아갈 것이니라.」

「그러니 부디」

「그 마에 잠식되지 말지어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마정석이 꿈틀거렸다. 마치 심장처럼 크게 요동을 치면서 빙정이 쏟아냈던 방대한 마력을 급속도로 흡수했다.

애당초 엘릭이 품고 있던 마정석은 용왕과 마왕의 것을 합친 것. 그렇다 보니 동장군의 마력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거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에 동장군의 마력은 전부 마정석을 거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치환되고, 오히려 더 많은 양의 마력량을 끌어냈으니.

마력량이 20%가 넘는 순간, 과부하 되었던 육체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망가졌던 마나 로드가 빠른 속도 복구되었다.

새하얗게 질렸던 피부는 다시 혈색을 되찾았고, 표면을 덮고 있던 서리와 성에는 증발하더니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그리고.

츠츠츠-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은 서로 하나로 맞물리면서 전혀 다른 형태를 띠었으니.

합치 과정을 통해 상위 등급으로 진화를 이룬 것이다.

동계(冬季).

새롭게 완성된 인장의 이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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