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123화 (123/405)

123화

겨울 전쟁

벨렌체 왕 일행이 퓨리에 입성(入城) 했을 때 발견한 것은 반파되다시피 한 살풍경한 도시의 광경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흑의 설원에서도 가장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대도시는 이미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더 이상 도시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다 쓰러져가는 폐허 사이로 핀 들꽃들을 봤을 때는 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동장군을 쓰러뜨렸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직접 퓨리의 잔당들을 사로잡기도 했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기분이 전혀 달랐다.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그건 두려움일까, 아니면 감격일까? 혹은 감동?

그들로서도 이러하다 어떻다고 딱 잘라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와! 꽃이다, 꽃!]

[봄이야, 봄!]

[와아아!]

[이제 다른 친구들도 부를 수 있는 거야? 그런 거야?]

겨울꽃의 신들은 여전히 신난 얼굴로 뱅그르르 하늘을 떠돌아다니다가, 저만치 먼 곳에서 퓨리의 수인들을 포박하고 있던 엘릭을 발견하고 잽싸게 그리로 달려갔다.

엘릭도 그들을 발견하고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오셨습니까?”

[응!]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맞아! 어떻게 한 거야?]

겨울꽃의 신들은 엘릭의 무용담을 직접 듣고 싶어서 잔뜩 안달이 나 있었다.

드디어 잠든 다른 꽃의 신들도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기쁘게 만들었으니까.

“여러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우리 도움?]

[우리 도움이 왜?]

수선의 신을 비롯한 모든 꽃의 신들이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러분들이 주신 꽃향기가 있었잖습니까? 그걸로 겨울을 물리친 겁니다. 꽃향기만큼 계절을 부르는데 좋은 건 없으니까요.”

[음? 음…!]

[으으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냥 당신들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는 뜻이에요.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렇게 그냥 받아들이세요.]

동백의 신은 엘릭에게 굳이 뭘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려 하냐는 투로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꼬맹이들에게는 꼬맹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게 최고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잠깐 골똘히 고민에 잠겼던 겨울꽃의 신들은 하나 같이 밝은 표정이 되더니 똑같이 동백의 신에게서 엘릭 쪽으로 향했다.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돼?]

“예.”

[와!]

[우리가 겨울을 무찔렀다!]

[맞아! 우리가 엘릭을 도와서 겨울을 물리친 거야! 아자!]

[아자!]

겨울꽃의 신들은 다시 저들끼리 신나서는 뱅그르르 춤추기 바빴다. 그러면서 쏟아지는 꽃향기가 다른 때보다 향긋하고 짙었다.

그 때문일까?

“오, 오오! 신들께서 군무를 추신다!”

“신무(神舞)라니…!”

“다, 다, 다들 뭣하나! 어서 치성을 드리지 않고!”

수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면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건 퓨리의 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혈미왕과 바라센의 명령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꽃의 신전을 홀대하고, 심지어 불을 지르는 불경죄까지 저질렀다지만.

애당초 수인족은 하늘 숭배 사상을 비롯해 애니미즘 성향이 강한 종족. 그런 그들로서는 당연히 꽃의 신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 역시 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같이 예의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피아를 막론하고 수많은 수인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꽃의 신들을 숭배하는 모습은 어쩐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유일하게 동백의 신만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극진하게 대하니,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저리 다들 철없이 구는 것인데…. 하아! 정말이지 앞으로가 더 걱정이네요.]

동백의 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동장군도 물리쳤겠다, ‘봄’이 찾아와 다른 꽃들의 신전도 문이 활짝 열린다면 저 아이들이 얼마나 더 기고만장해질지 엄두가 나질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수인들은 더더욱 오냐오냐하면서 꽃의 신들을 떠받들어줄 테지.

저 시끄럽기만 한 꼬맹이들을 지휘해야 하는 자신만 더 골치가 아파질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화원을 꾸밀 적에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었어. 그때부터 저렇게 된 것 같은데…. 하지만 동백의 신이 가지는 고민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그녀는 엘릭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그보다 이제 동장군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추위, 찬바람, 눈… 겨울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전부 모았으니 이제 ‘겨울’을 완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릭은 빙정을 꺼내 가만히 살폈다.

처음 오토 한에게서 받았을 때만 해도 반대쪽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었던 것이 이제는 우유 빛깔로 꽉 차 있었다.

[‘겨울’을 완성할 방법은 알고 있나요?]

“듣질 못했는데 알 리가요.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안다고 하면 알고, 모른다고 하면 모른다고 해야겠죠?]

“그게 무슨 말씀…!”

엘릭은 묘한 미소를 띠는 동백의 신을 보면서 그녀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질문을 계속 던지려고 했지만.

쿠쿠쿠…!

갑자기 퓨리의 지반을 뒤흔드는 약동에 말을 멈추고 진원지 쪽으로 고개를 황급히 돌려야만 했다.

어디선가… 인외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 * *

퓨리 소속 수인족들의 잇따른 항복에 따라, 벨렌체 왕을 비롯한 안트로모프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퓨리를 접수하던 중이었다.

“…역시. 개판이로군!”

바드득!

앙드류, 아니, 앙드류의 육체에 여전히 빙의하고 있는 유다는 턱이 으스러져라 이를 갈아야만 했다.

동장군의 추위와 어둠을 겨우 물리치고, 쓰러진 수하들의 생명력을 억지로 빼앗으면서 육체를 겨우겨우 지탱해 다급히 이곳으로 왔건만.

그사이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고 만 것이다.

그로서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혈미왕을 꼬드겨 동장군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와 조직이 공들였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자그마치 10년이었다. 10년.

대마전쟁에서 마족이 패배하고, 그리고리가 다시 겨우 세를 규합하면서 손을 뻗쳤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혈미왕의 수인 통합도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면 드디어 ‘북풍’과 ‘한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메르빙거가 단 하루아침 만에 가로채다 못해 아예 뒤엎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분노가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 난장판을 해결하고자 그의 본체가 여기까지 오기엔 당장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었다.

북방 화전민촌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감찰국과 엮이게 되면서 지금도 한창 놈들을 따돌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그 감찰국과 부딪치게 된 것도 전부 저놈 때문이 아닌가!’

하나부터 열까지, 엘릭 메르빙거와 엮여서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해치웠을걸, 이라는 후회가 다시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전에는 마력을 쌓지도 못하는 절맥증이기도 하고, 가문도 다 망가져 가기에 당장 건드려서 제국의 이목을 살 필요가 없다 여겨서 내버려 뒀던 것인데.

애당초 그런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유다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혈미왕에게 심어둔 마(魔)를 깨우는 것.’

그나마 다행이라면, 혈미왕이 언제부턴가 도를 닦지 않고 인외를 쫓으면서 스스로 마성(魔性)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으니.

그 마성을 깨운다면 당장 북풍과 한설을 회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장 엘릭이 그 힘을 깨우치지는 못할 거란 계산이 섰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자, 유다는 서슴없이 행동에 돌입했다.

“마신이시여. 그리고 마왕이시여. 당신들의 신민인 저희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손날을 바짝 세워 손톱을 길게 빼고, 그것을 그대로 심장이 있는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그대로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푸화악!

가슴 위로 핏물이 튀었다. 입가로 짙은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뒤를 따라 검은 마기가 새어 나오면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끌어모았던 다른 수하들의 마기뿐만 아니라, 육체의 주인인 앙드류의 마기까지 송두리째 태워버리려는 것이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제사를 지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물이고, 그중에서도 생명이 가장 큰 값어치를 자랑한다.

그 생명과 더불어 인장까지, 이렇게나 많이 바쳤으니, 그분들께서 싫어하실 리가 있으랴!

「그대의 소망, 잘 받아두었도다.」

그런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유다의 의식이 뚝 끊어졌다. 앙드류에게서 튕겨나 저 멀리 있는 본체로 되돌아갔고, 공양한 제물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 바닥에 스며들었다.

츠츠츠-

땅바닥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들꽃이 피던 바닥과는 전혀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죽음의 색깔. 그것이 물웅덩이에 빠진 잉크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위로 분명히 꺼졌던 여우불이 확 하고 크게 일어났다. 들꽃을 태우고, 촉촉하게 젖었던 대지를 다시 메마르게 만들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균열 사이로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콰콰콰!

혈미왕이 부릴 때까지만 해도 붉은 빛깔만 띠던 화마는 이제 마기를 상징하는 검은 빛깔까지 띠면서 거칠게 퍼져나갔으니.

그 불길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면서 거대한 여우, 그것도 꼬리가 일곱 개나 달린 기괴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다의 소망에 따라 아자젤이 힘을 내려주고, 혈미왕의 영혼이 거기에 호응하면서 불가사의로 변질해버린 것이다.

크와아앙!

혈미왕, 아니, 혈미왕의 탈을 쓴 불가사의는 본능에 찬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아가리를 쩍 벌렸다.

검붉은 불길이 대지를 질타하면서 퓨리의 정중앙을 가로지르고 지나갔다.

“저, 저, 저건…!”

“뭐야? 혈미왕, 죽은 거 아녔어?”

“몰라! 피, 피해! 어서!”

수인들은 혹시 불길에 휩쓸리기라도 할까 싶어 황급히 불길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거 왜 저러는 거야!]

[악취 지독해!]

[시궁창 냄새 나!]

[메피스토 냄새 나!]

꽃의 신들이 아주 질색하면서 소리쳤다. 동장군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 다급해 보였다. 그만큼 불가사의가 풍기는 마기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저것들이…!』

메피스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들을 노려봤지만, 겨울꽃의 신들은 다급하게 엘릭에게 소리쳤다.

[저거 계속 내버려두면 안 돼!]

[흑의 설원이 다시 설원으로 돌아갈 거야!]

[‘봄’이 안 와!]

[그냥 가뭄만 가득 낄 거야!]

[동장군처럼 될 거야!]

엘릭은 그 말들이 혈미왕의 영혼이 동장군처럼 또 다른 불가사의가 되어 두고두고 흑의 설원을 다시 험한 환경으로 만들어 놓을 거란 말로 이해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더라니.’

엘릭은 벨렌체 왕을 따라왔던 헤이즈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누나! 수인들 전부 이끌고 여기서 빠져나가 줘!]

[너는!]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헤이즈는 다시 위험으로 뛰어들려는 엘릭을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그의 목소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서 벨렌체 왕을 비롯한 도시의 수장들에게 달아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그 사이.

파앗-

엘릭은 불가사의가 있는 쪽으로 튀어 나가면서 빙정을 꺼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진짜. 좀 전까지만 해도 폭설이더니 이제는 가뭄이냐? 좀 하나만 하라고!”

하지만 말투와 다르게 그의 눈빛은 다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장군이야 혈미왕과 공멸시켰다지만, 이제 그런 요행은 더 이상 안 된다.’

거기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불가사의는 생전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영혼을 연료 삼아 태우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완전한 인외가 되면서 어떤 변이를 일으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엘릭은 저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당장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연구를 하고 진행해보려 했지만… 바로 여기서 ‘겨울’을 완성한다.’

생각이 바로 끝난 순간.

엘릭은 지체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빙정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화아악-

동시에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도 같이 빛을 뿌리다 못해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오라, 겨울이여】.”

그의 몸을 중심으로, 냉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