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꽃샘추위
“…!”
“…!”
“…!”
동장군이 사라진 자리.
퓨리의 수인들, 엘릭과 함께 혈미왕을 잡았던 헤르만과 푸른 매, 어느 누구 상관없이 모두가 엘릭이 일으킨 기적에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동백의 신도, 메피스토도 기가 찬다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그들이라고 다를까.
그만큼 동장군이 사라진 광경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특히 수인들이 받은 충격이 가장 컸다.
수백 년에 걸쳐서 흑의 설원에 있어서 공포로 군림해왔던 재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로서는 ‘상식’이나 다름없던 존재가 없어진 셈이었으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왔던 고정관념이 깨어진다는 건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직 전부 끝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동장군이 일으켰던 추위와 어둠은 남아서 퓨리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통제를 잃은 그 힘들이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몰랐다. 오히려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 범주를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회성에 불과하리라.
그것마저 전부 사라지고 나면 흑의 설원에도 이제 따뜻한 햇살이 드리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예전처럼 언제 동장군이 나타날지 몰라 전전긍긍할 일은 더 이상 없을 테니.
그리고.
엘릭은 동장군을 앗아갔듯이, 통제되지 않은 힘이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저것들도 전부 동장군을 구성하던 요소들일진대,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퍼져라】.”
그래서 엘릭은 그동안 동장군과 추위를 가져가던 언령과는 정반대되는 시동어를 전개했다.
그러자 꽃의 신전에서 빙정 안에 흡수해뒀던 겨울꽃의 향기가 일제히 확 하고 풍겼다.
삭풍의 인장이 발동되면서 바람을 일으켜 꽃향기를 사방팔방으로 퍼뜨렸다.
파아아-
휘휘휘!
꽃향기는 혈미왕과 동장군이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았던 퓨리의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던 영역 바깥으로도 잔뜩 퍼져나갔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찬바람이 해체되어 산들바람이 되고, 세상을 뒤덮었던 어둠이 점차 엷어지면서 곳곳에 금이 갔다.
금 사이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대지를 두들겼다.
그러자 지면을 덮고 있던 적설이 빠른 속도로 녹았다. 그것들은 전부 물이 되어 여태껏 메말랐던 땅을 촉촉하게 적셨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가 곳곳에서 흐르면서 거미줄처럼 엉키다가 한데로 모여 자그마한 강줄기가 되었다.
여전히 공기는 쌀쌀했지만, 꽃향기가 섞이면서 이제 더 이상 따갑고 아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상쾌함이 담겨 있었다.
여태껏 갑갑했던 속을 확 풀어줄 수 있을 상쾌함.
꽃샘추위였다.
겨울이 가고, 곧 봄이 올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남아있던 어둠마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면서 흑의 설원에는 간만에 맑은 하늘이 떴으니.
[아아…!]
동백의 신은 한참 동안이나 홀린 듯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 궁전에서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늘이 아니던가. 거기다 사방에 퍼져나가는 꽃향기는 더더욱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해주었으니.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동백 신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것은.
[봄이… 왔어.]
자신의 손자가 겨울을 가져가고 봄을 가져올 것이라던 우스던 메르빙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설마 하면서도 무엇이든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했던 것인데.
그게 정말 성공할 줄이야.
또르르-
한줄기 얇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꽃이슬이었다.
엘릭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면서 그것을 못 본 척했다.
* * *
“구, 군주님, 하늘이…!”
네테르는 영호족을 비롯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수하들만 대동한 채 몰래 퓨리를 빠져나가다 말고, 갑자기 수하가 외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혈미왕이 쓰러졌을 때부터 그는 퓨리의 패배를 짐작하고 있었던바.
그래서 어떻게든 살길을 도모하고자 도주를 시도했던 것인데…!
“마, 말도 안 돼!”
네테르에게는 혈미왕이 쓰러졌다는 사실보다, 동장군이 그쳤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대대로 흑의 설원에서 살아왔던 일족답게 동장군은 절대 잡을 수 없는 재해로 인식되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퓨리는 더더욱 무너질 수밖에는 없나…!’
그렇기에 네테르는 이번 사건이 안트로모프의 부흥으로 저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메르빙거와 인간들이 안트로모프와 손을 잡고 있단 사실은 이미 그들도 파악하고 있던 정보.
그렇다면 어떻게든 더 서둘러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영호족장께서 많이 바쁘신 듯 보입니다.”
그래서 네테르는 수하들에게 서두르자며 채근하려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도저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차갑게 웃으면서 어느새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벨렌체 왕이 그를 보면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주변에는 네테르로서도 낯이 익은 작자들이 아주 많이 보였다.
하나 같이 퓨리에 적의를 보였거나, 세력권에 들어갔어도 뒤로는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던 도시의 수장들.
불온 세력이 이미 한데 뭉쳐 있었던 것이다!
‘벌써 규합했을 줄이야…!’
네테르로서는 절대 반갑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무리 안트로모프가 다른 도시들을 하나로 끌어모은다고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판단했던 그로서는 뼈아픈 계산 실책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호왕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퓨리의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네테르로서는 절대 반갑지 않을 상황이 분명했다.
“공사다망하신 분들께서 이렇게까지 직접 찾아오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요.”
네테르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서도, 재빨리 주변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이미 퇴로로 삼을 만한 곳들은 전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젠장! 이럴 때 동장군이라도 있었다면…!’
적들을 보고 있노라니 수하들도 적잖게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진땀을 빼면서 네테르를 돌아봤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해결해달란 뜻이었다.
하지만 네테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까.
힘으로 몰아붙이려 해도… 저쪽의 쪽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순간 어린 호왕을 인질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옆에 딱 붙어 있는 노루스 재상을 보고 있노라니 그러기도 힘들 것 같았다.
“호왕 전하. 이러시지 마시고, 우리 대화로 풀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
네테르는 재빠른 상황 판단하에 대세가 저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어떻게든 투항 의사를 밝히려 했지만.
“그 대화는 저 말고 다른 분들께서 더 필요로 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벨렌체 왕은 네테르의 말을 도중에 툭 잘랐다.
안트로모프는 차치하더라도, 퓨리에 울분과 원한을 가지고 있는 도시들은 아주 많았다.
그리고 벨렌체 왕은 그들의 심기를 얼러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냉정하게 희생양을 던져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21명의 수장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로 한발 물러섰고.
스륵!
수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를 전개하면서 네테르 등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아, 안…!”
네테르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가려진 뒤였다.
으아아악!
아아악! 살려줘!
고통에 찬 비명이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마음을 독하게 먹으십시오, 전하.”
노루스 재상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네테르 등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벨렌체 왕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벨렌체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된다는 게… 좀처럼 쉽지가 않네요.”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아주 잘 해오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노루스 재상의 이런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21명이나 되는 도시의 수장들과 협상을 나눌 때부터. 벨렌체 왕은 더 이상 어리숙하고 어리기만 한 왕이 아니었다.
호왕(虎王).
산중제왕이라는 범의 기질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퓨리와의 분쟁에서 뒤로 빠지려는 도시들에게는 차후 있을 새로운 질서에서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쪽이 갖고 있던 이권을 양보해주면서까지 저들의 마음을 사려 노력했으니.
그 모습이 마치.
‘엘릭 메르빙거 님을 보는 것 같았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노루스 재상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물론, 왕이 누군가를 흠모하고 숭배하는 모습은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엘릭만큼은 예외라고 노루스 재상은 생각했다.
‘타고난 왕재(王才, 왕의 재목)니까. 그 사람은.’
또라이 같은 면모에서 번뜩이는 판단력과 예리한 통찰력은 오랫동안 수상으로 지내왔던 노루스 재상으로서도 놀라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렇기에.
노루스 재상은 앞으로 시작될 안트로모프의 부흥에 힘입어 메르빙거와 깊은 관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향후 5년 안에 대륙과 제국의 판세는 메르빙거 가의 행보에 따라 좌지우지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반드시 그 위에 편승해야만 해.’
아무리 안트로모프가 다시 수인 연합을 구성한다고 해도, 통합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소요로 할 게 틀림없었다. 벨렌체 왕도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했고.
‘아니. 설사 시간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수인 연합만으로 현대의 제국에 대적한다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
노루스 재상이 봤을 때는 이미 엘릭만 하더라도 당장 수인족 사회에서 손에 꼽히는 투사가 될 만큼 뛰어난 실력자였지만.
-제 수준이요? 에이, 아직 멀었어요. 마법 학계만 뒤져도 수두룩하게 나올 텐데. 거기다 사자공가며 감찰국까지 뒤지고, 제국 밖까지 나서면… 으!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엘릭이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관해서 물었을 때, 노루스 재상이 들었던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허풍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말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제 스승님만 해도, 옛날 조부님이 돌아오셔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드실 걸요?
더구나 오거스틴을 가리키면서 그런 말을 꺼냈을 때는 얼마나 까무러쳤던지.
그동안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않았던 오거스틴을 엘릭 일행의 들러리로만 여겼던 노루스 재상으로서는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오거스틴조차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국 내에서도 ‘일인자’라고 자처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 하였으니.
옛날 율호왕 시절의 향수만 그리다가 장벽을 넘봤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는 수가 있었다.
‘옛날에는 분명 이만큼 격차가 크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고립되고, 좁은 우물 속에서 서로 으르렁대기만 바빴던 동안 세상은 그만큼 크게 발전한 것이니… 아니, 우리가 그만큼 퇴보한 것이니. 그 격차를 단박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일어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는 엘릭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반대로 엘릭에게도 그들이 필요해야만 했다.
그래야 윈-윈(Win-win)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꽃향기다! 우리 향기가 마구 퍼지고 있어!]
[와! 동장군이 사라졌어!]
[엘릭이 해냈어!]
[봄이다! 봄이 온다아!]
[따뜻해, 엄청!]
그렇게 노루스 재상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기는 사이, 머리 위로 겨울꽃의 신들이 ‘와아아!’ 소리를 내면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꽃들을 잠재우던 동장군이 사라졌으니, 신전의 문을 열고 나와 흑의 설원에 축복을 내려주려는 것이다.
옅어지던 꽃향기가 더 은은하게 퍼지고, 꽃샘추위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메마르던 땅 위로 하나둘씩 야생화가 피고, 잡초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안트로모프와 수인족에게도 이제 곧 이처럼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