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꽃샘추위
언제부터였을까?
혈미왕은 자신이 대체 언제부터 도를 닦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저 부모를 잃고 마냥 고아로 떠돌던 자신을 거둬준 것이 기인이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이 길을 밟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힘이 쌓이는 만큼 혈미왕의 마음 한쪽 구석에는 속세에 대한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힘만 있다면 어디서 ‘왕’으로 군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
한평생을 산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있어 호의호식은 언제나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도 저렇게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싶다.’
‘나도 저렇게 많은 하인을 거느리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나도 저렇게 막대한 권력을 휘둘러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일어났다. 자신의 힘을 흠모하는 세력들을 끌어모아 제국을 집어삼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머지않아 자신이 너무 세상을 안일하게 여겼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한창 기승을 부리던 중에 한 사내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너구나, 요즘 흑의 설원을 시끄럽게 만든다던 놈이?
그는 인간 중에서도 찾기 힘든 타오를 듯한 금발과 차디찬 녹안을 지니고 있었다.
메르빙거.
인간 사내는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미안하지만, 왔던 길로 돌아가 줘야겠다. 장벽은 우리가 만든 일종의 마지노선이라서. 이 아래는 최대한 조용히 내버려 두고 싶거든.
메르빙거가 무슨 말을 지껄여댔지만, 혈미왕은 전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시건방진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잔뜩 분개할 뿐.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즐겨 사용한다던 ‘마법’이라는 분야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동안 쌓은 도술로 시원하게 꺾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패배했다.
아주 처참하게.
혈미왕은 수백 년에 걸쳐 자신이 쌓은 도술이 헛되었다는 사실에 좌절해야만 했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 따위에게 지는 힘이라면 필요 없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혈미왕을 더 충격으로 빠뜨린 사건은 따로 있었다.
율호왕.
흑의 설원을 일통했던 위대한 수인족의 왕이 나타나 그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난, 난 왜 안 된단 말이냐! 어째서…! 어째서 저딴 필멸자들 따위에게 이리 무참하게 꺾여야 한단 말이냐! 좋다. 그렇다면 힘을 가질 것이다. 누구도 가지지 못할 힘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혈미왕이 여태 익힌 도술을 갖다버리고, 흑마술에 집요하게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
도술은 요술(妖術)이 되었고, 도력은 요력(妖力)이 되었다. 호선은 언제부턴가 그렇게 경계하고자 했던 요괴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외(人外).
즉, 마(魔)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힘이기 때문에 자신을 숨기고자 했다. 율호왕의 그림자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던 게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퓨리의 왕이 되어 천천히 계획을 진행했다.
그리고 4백 년이 흘렀다.
혈미왕은 이제야말로 아무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지금은 과거처럼 율호왕이나 메르빙거 같은 뛰어난 천재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미안하지만, 돌아가주게.
이번에도 혈미왕은 똑같이 막혔다.
4백 년 전에 자신을 무릎 꿇렸던 작자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자 역시 스스로를 메르빙거라고 했다.
혈미왕은 퓨리에 다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번에는 시기를 잘못 정했을 뿐이다. 그러니 좀 더 만반의 준비를 갖추자. 나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수하들의 힘도 키우자. 필요하다면 동장군까지도 내 발아래에 두면 될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패를 동원한다면 될 것이다. 이참에 저번에 거절했던 마족들과 손을 잡는 것도 고려해보자.
그래서 장벽 아래에서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던 그리고리와 손을 잡았고, 다시 기회를 엿보며 40년이 흘렀다. 동장군의 봉인이 풀릴 시기에 맞춰서 몸집을 일으켰다.
혈미왕으로서는 사력을 다한 세 번째 봉기였지만….
-거참, 되게 못생겼네.
그 세 번째 봉기도 가로막혔다.
금발과 녹안을 가진 메르빙거 때문에.
메르빙거, 메르빙거, 메르빙거…!
그 망할 작자들 때문에 혈미왕은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대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따윈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억울하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봉기에서는 어떻게든 배운 힘을 써먹기라도 했다지만, 지금은 동장군과 공멸한 게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꼬리가 잘린 채로 머리까지 부서져야만 했으니.
그 사실이.
못내 원통하고 원통할 뿐이었다.
「억울한가?」
그러던 그때. 희미하게 꺼져가는 혈미왕의 의식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누가 던지는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내면이 뱉은 목소리인 것 같기도, 혹은 악마 같은 무언가가 그의 귓가에다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그에게는 낯이 익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앙드류와 그리고리의 마족들이 동맹을 맺자면서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때 우연찮게 들었던 목소리. 그들이 모시는 ‘신’의 목소리라며 들려주었던 음험한 그 목소리였다.
「억울하다면 쌓고 쌓아라.」
「변질시키고 또 변질시켜라.」
「그리하여 더 큰 마(魔)가 되어라.」
「그런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일지니. 어쩌겠느냐? 어차피 이대로 죽을 목숨. 더 큰 마가 되어보겠느냐?」
그 목소리는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시시덕대기 바빴지만.
혈미왕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서 어떤 대답을 내릴 것인지를.
퍼억!
그리고 그렇게 의식이 뚝 그쳤다.
* * *
[숨바꼭질? 그게 무슨 소리죠?]
동백의 신은 엘릭이 동장군에게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
하지만.
엘릭은 말없이 웃으면서 동장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뿐이었다.
키에에엑!
화아아-
그럴수록 동장군은 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엘릭의 접근을 가로막고자 거친 눈보라와 한파를 일으킬 뿐이었다.
전부 빙정이나 삭풍의 인장 쪽으로 흡수되어 별다른 방해는 되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본 거로군?』
메피스토는 엘릭이 미친놈처럼 왜 이러나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이유를 짐작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었기 때문이었다.
엘릭이 처음 설산왕이 있는 안배를 겪었을 때 이러지 않았었던가.
메피스토가 보지 못하는 안배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면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나중에 듣기로 설산왕을 ‘이해’하면서 그녀가 가진 업적들을 엿보았다던가?
그래서 메피스토는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삭풍의 인장을 얻었던 안배에서 동백의 신과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동장군과 관련된 업도 본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엘릭은 겨울 궁전에서 마지막을 맞았던 동백의 신 이후에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해서도 드문드문 보았었다.
-겨울은 겨울로만 남아야 하지 않겠나?
마신이 동백의 신이 남겼던 거죽에다 숨결을 불어넣은 이후. 사념(邪念)이 뭉친 불가사의가 된 동장군은 1천으로 내려가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동장군이 산 사람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갓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녀석에게 있어 오히려 세상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문제는 그런 호기심이 오래 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동장군에게 있어 세계는 온통 악의로만 점철된 곳이었으니까.
-저, 저, 괴물은 뭐야…?
-추워! 너무 춥다고. 털까지 얼어붙어 버렸어.
-꺼져! 여기로 오지 마!
동장군은 그저 놀고 싶었을 뿐이었다.
흑의 설원을 뛰어놀던 수인족 아이들 속에 섞이고 싶었다. 저들처럼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싶었다.
마물들과는 같이 사냥을 하고 싶었고, 때로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물속에서 멱을 감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동장군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수인족은 동장군이 다가오면 농작물이 냉해를 입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쫓으려 했고, 마물은 동장군을 두려워하여 달아나기 바빴다. 나무는 어둠에 잠식되고, 물은 얼어붙었다.
동장군이 끌고 다니던 괴물들은 그녀가 고의로 그렇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들을 잔뜩 얼려버렸을 뿐이었다.
부모도, 동료도 없던 동장군으로서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친구를 만들 수 있는지도 몰랐다. 모든 게 서툴렀기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동장군은 세상이 자신에게 하나 같이 악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만 대한다면, 자신 역시 그렇게 대해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동장군이 겨울을 몰고 다니는 재해가 되어버린 건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미련을 두고 있단 말이지.’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동장군이 바라는 건 절대 큰 게 아니었다.
숨바꼭질.
1천으로 내려와 가장 먼저 마주쳤던 수인족 마을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놀이를 직접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어 보였으니까.
그래서.
엘릭은 동장군을 풀어주고, 퓨리로 데려오면서 벌어졌던 모든 것들을 ‘숨바꼭질’이라고 포장했다.
“너는 술래. 나는 숨은 사람. 하지만 어쩌나. 시간이 오버되고 말았는데.”
키에엑?
동장군은 한순간 엘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쭈뼛거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태껏 자신을 약 올리기만 했던 인간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헝겊 인형처럼 생긴 머리가 움직이는 꼴이 조금 기괴하게 보였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술래야. 어때?”
키에엑!
동장군은 화들짝 놀라면서 갸웃거렸던 머리를 다시 크게 높이 세웠다.
파앗-
엘릭이 정말 그를 잡기 위해 달려왔다.
동장군은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키에에엑!
* * *
흑의 설원을 무대로, 엘릭과 동장군의 숨바꼭질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서로 술래를 번갈아 가면서 상대를 쫓았다.
이 과정에서 한파와 어둠이 수도 없이 휘몰아쳤지만, 엘릭은 일부러 도시가 없는 지역이나 퓨리와 관련된 도시 쪽으로 동장군을 유도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동장군은 계속 깎여 나갔다.
빙정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한파를 흡수해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장군은 전혀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방해 없이 숨바꼭질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즐거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숨바꼭질이라니.]
동백의 신은 그런 엘릭과 동장군의 놀이를 보면서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려야만 했다.
오랫동안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던 텃밭, 꽃의 신전을 보호할 수 있는 해결책이 이리도 단순할 것이라고 어디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하지만.
동백의 신은 어쩌면 이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외로웠던 건 똑같았으니까.’
동백의 신은 백성과 신하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 홀로 겨울 궁전을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키웠던 것이 동백나무였으니.
‘하지만 내게는 텃밭이라도 남은 데에 반해, 내게서 강제로 뜯겨나간 동장군에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지.’
자신이 남긴 허물은 자신의 생전에 했던 사념(思念)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즉, 외로움을 타던 동백의 신을 닮아 동장군도 외로움을 탔단 뜻이었다.
겨울처럼 지독하게 쓸쓸한 외로움을.
그리고 지금.
엘릭이 ‘친구’가 되어 직접 동장군이 가슴 한편에 쌓아두고 있던 외로움을 덜어주고자 했으니.
츠츠츠-
언제나 ‘일(一)’자로 꾹 다물려 있던 동장군의 입술이 ‘브이(V)’자로 조금씩 꺾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외로움이 사라진 만큼, 동장군의 추위도 서서히 가라앉았으니.
마지막에 이르러서 엘릭은 이제 더 이상 쓸쓸한 추위를 내뿜지 않고, 봄처럼 따스함을 품게 된 동장군의 본체에 다다를 수 있었다.
툭!
술래의 손끝이 아무렇지 않게 동장군의 어깨를 두들겼다.
“잡았다.”
그리고.
츠츠츠-
이제 완전히 웃고 있는 동장군의 형체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빙정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왔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