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꽃샘추위
퓨리의 영역에서 빚어진 사건에 대한 소문은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동장군으로 인해 도시 간의 연결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었지만, 퓨리에 대한 소문에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설사 놓치고 있다 하여도, 안트로모프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슬쩍 언질을 주었으니.
결국 퓨리에 어쩔 수 없이 줄을 대고 있던 도시들로서는 엉덩이가 들썩일 수밖에 없었고.
안트로모프는 그들에게 ‘협의’를 해보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결국.
각 도시는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안트로모프에서 회동을 가지기로.
“후웁, 하아…!”
벨은 거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래도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심장은 도저히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노루스 재상이 푸근하게 웃으면서 옆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왕이십니다. 그것도 산중제왕이라는 범이지요. 범의 자식으로서 당당한 모습만 보이십시오. 그러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좀처럼 쉽지가 않네요.”
벨은 이번 회동에서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큰 결과를 낳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작게 봤을 때는 호왕가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일 테지만.
크게 봤을 때는 향후 흑의 설원에 있을 정세를 가늠 짓는 협상장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벨은 엘릭이 고생해서 만들어준 이 기회를 절대 그냥 날리고 싶지 않았다.
‘엘릭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그래서 벨은 지금 이 시각 한창 퓨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엘릭을 떠올렸다.
그에게 있어 엘릭은 이제 마음속에 자리 잡은 영웅이자, 우상이었다.
그를 닮고 싶었다.
‘엘릭이라면…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휘어잡았겠지. 딴죽 거는 놈들이 있으면 죄다 엎어버렸을 거고. 전부 자기한테 유리하게 만들었을 거야.’
벨은 스스로에게 몇 번씩이나 되뇌었다.
‘그러니까 엘릭이 되자. 엘릭의 시점에서… 난 지금부터 엘릭이다, 엘릭이다.’
그렇게 자기 주문을 몇 번 걸고 나니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노루스 재상도 그런 벨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가볍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동하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요.”
벨이 걷기 시작하자, 뒤편으로 헤이즈와 션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벨이 어리다고 협상장에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이다.
“호왕께서 입장하십니다.”
친위대가 문을 활짝 열자,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모두 21쌍의 시선들.
한때, 안트로모프를 지지하고 가신을 자처했던 곳들이었으나, 지금은 이탈해버린 부족과 도시들의 수장들.
어린 호왕을 주시하는 그들의 눈은 하나 같이 날카로웠다.
협상장에서 그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과연 퓨리를 무찌르고 안트로모프가 일어날 수 있을지, 호왕의 그릇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부족과 도시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만큼,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벨은 한순간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걱정마세요. 저희가 있잖아요.]
헤이즈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흠!’
‘마냥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호왕은 호왕이라는 건가?’
‘인간들을 부리면서 퓨리를 크게 골탕 먹였다더니. 확실히 만만치 않군. 어리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겠어.’
21인의 수장들도 그런 눈빛을 읽고 속으로 벨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뚜벅!
벨은 협상장 안쪽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엘릭처럼.
위풍당당한 걸음이었다.
* * *
『이만하면 그냥 인성이 아니라, 혐성 수준이로군.』
메피스토는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엘릭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장판을 만들다 못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쏙 골라 먹는 것도 참 대단한 능력이다 싶었으니까.
휘휘휘휘!
동장군은 아직 봉인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강한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혈미왕이 갖가지 이능(異能)을 부릴 때마다 동장군의 한파는 꺾이고, 어둠은 부서지기 일쑤였다.
특히 혈미왕이 여섯 개의 꼬리를 쭈뼛 세우면서 일으키는 ‘여우불’은 당장이라도 동장군을 녹일 것처럼 활활 불타올랐으니.
도시 퓨리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면서 치솟는 화마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콰콰콰콰-
“혀, 혈미왕께서 화가 나셨다!”
“도, 도망쳐!”
“도시를 빠져나가! 어서!”
이미 이전의 폭발로 도시의 절반이 날아간 이상, 퓨리의 수인족 중 누구도 도시가 무사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혈미왕이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얼마나 무서운 참사가 벌어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네테르의 주도 아래, 수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부리나케 도시를 이탈해야만 했다.
문제는 어디로 간다고 한들, 동장군이 몰고 온 한파를 피할 방법은 없다는 점이었지만.
“텡그리시여, 왜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그렇게 퓨리의 수인들이 하나같이 절망에 휩싸이는 동안.
키에에엑!
동장군은 동장군 나름대로 혈미왕을 어쩌지 못해 답답한 나머지 괴성만 잔뜩 질러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도시 전체를 휘감은 여우불의 화력이 너무 거셌던 것이다.
그리고 충돌로 인해 부서져 내린 얼음 조각 따위는 혈미왕에게로 귀속되지 않고, 엘릭이 허공에 띄운 빙정으로 모조리 흡수되고 있었으니.
동장군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기만 했다.
반면에. 엘릭은 혈미왕의 손을 빌어 착실하게 동장군을 ‘회수’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메피스토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혐성 운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자신의 손을 직접 쓰지 않고, 적을 부수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병략이긴 하다지만. 쯧!’
그러다 메피스토는 동백의 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뭐 딱히 할 말 없나?』
동백의 신은 그저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절레절레.
이미 전부 다 포기한 듯한 얼굴.
하지만 상황을 주시하는 눈빛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는 중이었다.
‘동네북처럼 혈미왕에게 두들겨 맞고, 엘릭에게 신력을 뜯기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해지는 건 아니란 말이죠.’
동장군이 당장 혈미왕에게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에만 그럴 뿐. 시간이 지날수록 동장군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것에서 조금씩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조금씩 힘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학습 능력을 통해 혈미왕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하고 있었으니.
여우불의 화력이 가라앉도록 퓨리 전역에 걸쳐 눈송이를 고루고루 뿌릴 뿐만 아니라, 그가 요력을 낭비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애당초 율호왕까지 어떻게 하지 못했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동장군이었다.
혈미왕 따위에게 당해서야 어찌 동장군이라 할 수 있을까.
혈미왕도 그런 사실을 자각하고 있던지, 더 거세게 동장군을 몰아붙였지만… 동백의 신은 그게 얼마 가지 못할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만약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승세를 잡은 게 확실하다면, 대놓고 옆에서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엘릭을 내버려 두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메르빙거! 메르빙거어어어!]
결국 혈미왕은 하늘에다 대고 분노를 내뱉었다. 어느새 동장군의 한파가 조금씩 여우불을 밀어내는 게 보였다.
드디어 마력량이 반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네놈들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아!]
혈미왕은 꼬리를 더 빳빳하게 세우면서 요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육체 주변에다 둘렀다. 화력으로 안 된다면 직접 육탄돌격이라도 하려는 속셈이었다.
동장군은 보유하고 있던 마력량이 방대한 것이었지, 육체가 단단한 건 아니었으니까.
콰아앙!
아니나 다를까. 웬만한 성채보다도 더 큰 혈미왕의 거구가 충돌하자, 동장군이 단박에 부서지면서 파편 따위가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여태 흡수했던 것보다 훨씬 큰 얼음 파편이 차례로 빙정으로 흡수되는 동안.
허공에서는 다시 응결이 이뤄지면서 동장군이 나타나 혈미왕의 꼬리를 차례로 얼리고자 했다. 여우불이 가라앉고, 발이 동상에 걸려 꼼짝하지 못했다.
혈미왕이 내뱉는 구슬픈 울음소리와 동장군이 지르는 괴성이 뒤섞이면서 가뜩이나 다 망가져 가던 도시를 더 크게 뭉개놓았다.
콰콰콰콰!
콰르릉, 콰르릉-
그리고.
엘릭은 빙정을 통해 정화했던 마기를 모조리 삭풍의 인장에다 차곡차곡 쌓으면서 녀석들 사이로 움직였다.
파아앗-
‘뭘 하시려고?’
동백의 신이 의아함을 던지는 동안, 엘릭은 철저하게 제3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도와주었다.
“【몰아치고】, 또 【몰아쳐라】.”
혈미왕이 밀린다, 싶으면 혈미왕을, 동장군이 조금 약해진다, 싶으면 동장군을 도와주면서… 차례로 둘의 전력을 차츰차츰 깎아나갔다.
마정석이 있는 한, 엘릭도 마나 로드가 과열되지 않는 선에서만 마법을 전개한다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런 레이드도 재밌는데?”
“요괴가 되려다 만 수인이라. 언제 이런 걸 또 잡아보겠어.”
헤르만을 비롯한 푸른 매들까지 나서서 공세를 퍼부어대니, 전황은 엘릭 쪽에게로 아주 유리하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끝내 혈미왕이 체력이 가장 먼저 바닥나면서 맨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대지가 크게 들썩였다.
[안… 돼…!]
녀석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어뜨리던 그 순간, 엘릭은 곧장 마법을 전개했다.
“【잘라라】.”
‘시리도록 아픈 칼바람’. 삭풍의 인장을 한계치 이상으로 쥐어짜 바람을 압축시키고, 여기다 냉기를 뒤섞으면서 만들어낸 7써클의 빙계 마법이었다.
촤촤촤!
부메랑처럼 굽이친 칼바람은 단숨에 혈미왕의 꼬리들을 잇달아 잘라버렸다.
진즉에 심안을 통해 녀석의 꼬리가 모든 요력의 진원지인 것을 파악해두고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결국 두 개나 되는 꼬리가 잘린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꼬리들도 당장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덜렁거렸다.
크오오오!
[메르빙거, 메르빙거어…!]
혈미왕은 이딴 식으로 일을 꾸민 원흉인 엘릭에게 분노를 잔뜩 쏟아냈지만, 주적인 동장군은 그런 혈미왕의 사정을 이해 해주지 않았다.
사념만 남은 녀석에게 있어서는 여태껏 자신을 몇 번이나 불태웠던 혈미왕에 대한 분노만이 가장 컸으니까.
쩌저저적-
결국 남은 꼬리를 포함한 몸뚱이의 절반 이상이 동상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머리도 4할이나 성에로 덮이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잔뜩 쏟아졌다.
[네놈들… 만큼은… 어떻게… 든…! 이… 게 끝이 아닐…!]
혈미왕이 잔뜩 분노를 토해냈지만, 목소리는 느릿해지다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뚝 그쳤다.
엘릭은 바로 그런 녀석의 머리통 위로 내려앉으면서 손바닥으로 정수리를 세게 내리쳤다.
빙열.
설산왕의 시그니처 스킬이 발동한 순간, 얼어붙었던 녀석의 머리통 위로 균열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쿠쿠쿠쿠…!
얼음 가루를 잔뜩 뱉으면서 조각조각 난 채로 바닥에 쏟아졌다. 그리고 엘릭의 그림자가 넓게 퍼지면서 혈미왕의 머리통을 모조리 씹어 먹어댔다.
와그작!
와그작!
‘끝이 아닐 거라고?’
엘릭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는 동안 혈미왕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에 내심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별 것 아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꾸라지는 혈미왕의 사체에서 뛰어내려 동장군 앞에 착지했다.
탁!
키에엑!
동장군은 여전히 엘릭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적의를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엘릭의 바로 옆에서 빙정이 돌아가고 있는 까닭에 함부로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어땠냐, 숨바꼭질은? 하고 싶어 했었잖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