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꽃샘추위
영호족의 족장, 네테르는 갑자기 빗발치는 비상 통신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밤의 구획으로 나갔던 포위망 궤멸!”
“볼프강, 동장군 엄습!”
“에도라도에 동장군이 출현하여 피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타이칸에서도 동장군의 ‘어둠’이 몰려왔다고 연락이…!”
쾅!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네테르가 신경질적으로 탁상을 내리치면서 외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바보 천치였다면 애당초 혈미왕이 그를 이런 자리에 앉혀 놓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그로서는 도저히 믿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동장군의 봉인이 풀렸다니!’
동장군은 퓨리에 있어 통치를 위해 필요한 도구이면서도, 반드시 숨겨야 할 비밀이기도 했다.
그것이 버젓이 돌아다녀서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동장군은 이미 그의 바람 따윈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흑의 설원을 활보하는 중이었으니.
동장군은 40년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짙은 어둠과 추운 한파를 잔뜩 몰고 오면서 많은 것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성벽이 어둠에 잠식되고, 수인들이 얼어붙은 채로 눈밭에 묻혔다는 피해 보고가 곳곳에서 속출했다.
거기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동장군의 이동 경로는 퓨리와 친(親)퓨리 도시에만 걸쳐져 있었다.
즉, 누군가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단 뜻이었다.
“군주님! 동장군이 어째서 퓨리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인지를 묻는 항의가 곳곳에서 빗발치고 있습니다!”
“어서 해답을 바라는 곳이 많아서…!”
“왜 그딴 것을 나한테 묻는단 말이냐! 다들 닥치고, 동장군을 막게 빨리 동원령이라도 내리라고 해! 지금 이 상황을 틈타서 딴생각을 품으면 가장 먼저 모가지를 쳐버릴 거라고 경고도 하고!”
“아, 알겠습니다!”
보고를 가져오던 수하들은 네테르의 분노에 하나 같이 자라목이 된 채로 물러나야만 했다.
‘일단은… 도시들이 전부 딴마음 먹지 못하게 단단히 틀어놔야겠어. 동장군을 잡는 방향으로 주도권을 계속 잡아나간다면 어떻게든 이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네테르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퓨리의 지배 체제가 흔들리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퓨리가 무너지면 자신의 권력도 끝장이었으니까.
‘메르빙거…! 또 그놈 때문이겠지! 안트로모프에서 한창 훼방을 놓았다던 바로 그놈!’
2군주였던 바라센도 녀석을 암살하러 갔다가 도리어 당했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퓨리로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죽여야만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메르빙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라! 이번 일도 분명히 그놈과 관련이 있을 게 분명해!”
수하들이 서둘러서 보고들을 빠르게 되짚어보던 중이었다.
“메르빙거로 추측되는 자, 발견!”
“어디냐? 거기가?”
네테르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필요하다면 자신이라도 직접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보고를 올린 수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퓨, 퓨리의 정문 앞이라고 합니다…!”
“뭐?”
네테르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소리치려는 그 순간.
콰콰쾅!
갑자기 대지가 들썩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도시를 뒤덮었다.
도시를 보호하고 있던 결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
그리고.
휘이이이!
창밖으로 하늘을 따라 짙은 어둠이 몰려오면서 매서운 한파가 건물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메르빙거가 동장군을 퓨리로 데려온 것이다!
“이 미친 놈이이이이!”
네테르의 절규가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꿰뚫고】, 또 【꿰뚫어서】, 【부서뜨려라】.”
콰쾅!
콰콰쾅, 우르르-
엘릭은 연거푸 쏟아낸 마법이 결국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하던 비석을 부서뜨린 것에 쾌재를 외쳤다.
끼에에엑!
하지만 다시 저 멀리서 울리는 동장군의 울음소리에 다시 혀를 차야만 했다.
“이거 도무지 쉴 겨를이 없네요.”
저 멀리, 동장군이 다시 이쪽으로 쫓아오는 게 보였다.
『정말이지 매번 느끼던 거지만.』
“…?”
『너를 상대하던 놈들을 보면 참 불쌍하다 싶구나.』
동장군을 바라보는 메피스토의 시선에는 이제 안타까움마저 어려 있었다.
동장군은 그동안 얼마나 화가 잔뜩 났던지, 몸뚱이에서 어둠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릭은 동장군을 너무 집요하게 괴롭혀댔다.
마법으로 꼬집고, 할퀴고, 눈에다 모래를 뿌리고… 보는 사람도 질릴 정도였으니까.
차라리 시원하게 전면전이라도 치렀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동장군으로서는 두 눈이 완전히 뒤집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의가 얼마나 강렬한지 이따금 피부가 따끔거리기도 했다.
[….]
동백의 신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태껏 메피스토의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동장군에게는 애증만 태웠던 그녀조차도. 지금만큼은 메피스토에게는 긍정을, 동장군에게는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그래요? 읏차!”
엘릭은 피식 웃으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부유 마법을 써서 가볍게 퓨리의 성벽에 착지했다.
발아래, 어둠과 한파가 갑자기 몰려오면서 난장판이 되어버린 퓨리가 보였다.
그들을 여태껏 지켜주던 꼬리의 가호도 동장군이 봉인에 풀린 순간부터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르빙거가 저기 있다!”
“저놈! 저놈부터 잡아라!”
퓨리의 투사들은 엘릭을 발견하고는 삿대질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몇몇은 아예 성곽 쪽으로 몸을 날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수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구나.』
“그러게요. 이러다가 흑의 설원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엘릭은 자신의 팬(?)들을 위해 몸소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도시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가 보더라도 적진 한가운데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미친 짓이었지만.
“어? 어어어!”
“저 미친놈이!”
“또 마법을 쓰려고 한다! 피해라!”
도리어 겁을 지레 먹고 물러나는 이들은 수인들이었다.
“【내리꽂혀라】.”
엘릭은 눈보라를 일으키고, 얼음 화살을 만드는 족족 수인들의 머리 위에다 내리꽂았다.
가뜩이나 마법은 수인족에게 있어 멸시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대상이었으니.
그 마법들이 머리를 노린다는 생각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동장군과 같은 계열의 마법이지 않은가. 얼음 화살이 얼마나 단단한지, 눈보라가 얼마나 추운지는 전혀 알 겨를이 없었다.
결국 담이 약하고 말고 상관없이, 수인들은 마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러서려다가 도리어 전열이 잔뜩 엉키고 말았다.
그러다 엘릭이 지면 곳곳에다 덫처럼 설치해둔 냉혹의 사슬 때문에 저마다 발목이 걸려서는 그대로 넘어지면서…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아악!”
“내 발! 내 바아알!”
“비켜! 비키라고오!”
엘릭은 그런 놈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착지하고, 그대로 통과하면서 눈보라와 얼음 화살을 있는 대로 뿌려댔다.
학살극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정말이지 꼴불견이로군.』
[…용감하기로는 수인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족이 바로 퓨리였는데 말이죠. 이런 식으로 망가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항상 기세등등한 마왕군만 이끌던 메피스토로서는 수인들이 오합지졸로만 여겨질 뿐이었고.
동백의 신은 이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퓨리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퓨리의 피해는 스노우볼처럼 계속 켜졌고, 동장군의 접근도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메르빙거! 네놈들이 또…!”
그때, 엘릭은 투사들 사이로 자신만 집요하게 노리고 달려드는 수인과 맞부딪치면서 생각했다.
이놈이 여기의 최고위 간부 중 하나일 거라고.
실제로 그의 정체는 네테르였다.
그는 이렇게까지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은 이상, 더 이상 자신이 혈미왕으로부터 살아날 방법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엘릭의 머리통을 들고 혈미왕을 찾아가는 것뿐이었으니.
그런다면 자신은 몰라도, 가족들은 선처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수화를 전개하고, 광증을 부리면서 엘릭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방해꾼만 없었더라면.
채애앵!
엘릭 앞으로 헤르만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네테르의 공격을 튕겨냈다.
“미안하지만 저 친구에게는 해코지할 수 없다네. 내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라.”
“비켜!”
“못 비킨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뒈져라!”
채채채챙!
퍼퍼퍼펑-
네테르와 헤르만은 순식간에 여러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헤르만의 등장에 맞춰 푸른 매도 곳곳에서 나타나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촤촤촤촤-
그들 모두 엘릭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비석들을 제거하고 도시로 입장한 상태.
덕분에 결계는 이제 거의 다 사라져 동장군의 접근도 더 빠르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키에에엑!
퀴퀴퀴퀴-
저 멀리, 동장군이 어느새 결계를 통과하면서 성벽을 넘는 것이 보였다.
성벽이 얼어붙었다. 어둠이 마치 무대를 가리는 장막처럼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 안 돼…!”
“동장군이 넘어온다아아!”
투사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던 그때.
[감히- 누가 나의 잠을 방해하는가-!]
쿠쿠쿠…!
퓨리의 중심부에서부터 지면이 크게 들썩이더니, 땅거죽이 뒤집히고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여우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섯 개의 꼬리를 가진 그것은 하늘을 향해 길게 울음을 내뱉으면서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저게 혈미왕이란 말이지?’
엘릭은 녀석을 보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녀석에게서는 마력이나 마기와는 다른 종류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퓨리를 뒤덮으려던 어둠도 다시 하늘로 밀려나고, 한파도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혀, 혈미왕이시여!”
수인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로 바닥에 넙죽 엎드리고 말았다.
[멍청한 것들-! 저런 인간 따위 하나를 막지 못해- 이딴 사달을 일으켜-?]
혈미왕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아무리 안트로모프와 메르빙거가 발버둥 친다고 해도, 날파리처럼 귀찮기만 할 뿐 자신을 위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더군다나 최근 들어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기에 되도록 외부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었는데.
잠시 신경을 껐다고 상황이 개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으니!
도움을 운운하던 그리고리의 마족들도 실패한 것이 분명해진 이상, 더 이상 내버려 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 저, 저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부디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닥쳐라-! 이 일은 반드시- 추후 너희 모두에게 죄를 따져 물을 것이다-!]
퓨리의 수인들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혈미왕의 선언에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혈미왕은 머저리나 다름없는 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수양을 방해하고 만 대상을 잔뜩 노려봤다.
[마족 놈들도 결국 입만 번지르르하던 천치였고-! 제대로 된 놈들이- 어디에도 없구나-!]
크르르…!
혈미왕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동장군에게 일갈을 내질렀다.
[자아도 가지지 못한- 괴물 따위가-! 나의 영역에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키에에엑!
동장군은 엘릭을 찾던 것을 멈추고, 혈미왕을 향해 괴성을 질러댔다. 과거 봉인을 풀고 나서려던 것을, 혈미왕이 한 차례 꼬리로 막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콰콰콰콰!
한파가 다시 한번 폭풍처럼 퓨리를 덮어나갔다.
[허튼 짓-!]
혈미왕은 여섯 개의 꼬리를 바짝 세우면서 도력(道力)… 아니, 요력(妖力)에 가까운 사이한 힘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동장군과 혈미왕의 충돌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콰쾅! 콰콰콰-
쿠쿠쿠쿠…!
단 한 번의 충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크기의 폭발과 후폭풍이 도시 퓨리의 절반이나 되는 영역을 휩쓸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서.
엘릭은 익살맞게 웃으면서 빙정을 꺼내고 있었다.
“【흡수되어라】.”
혈미왕이 동장군의 힘을 부수는 족족 부서진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빙정으로 흡수되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