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꽃샘추위
[아무리 메르빙거라고 해도 그렇지…! 당신, 정말 미쳤어요?]
『푸하핫! 그래! 이래야 메르빙거지! 본 왕이 너와 계약을 맺은 이래로 가장 마음에 드는 광경이로구나!』
동백의 신은 동장군이 구속에서 풀려나는 것을 본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반대로 메피스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으니.
가뜩이나 봉인진의 효력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서 동장군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마당에, 그걸 완전히 풀어줘 버렸으니!
동백의 신이 머리 아파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40년 만에 봉인에서 풀려난 동장군은 막강한 한파를 휘몰아치면서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빙정 속에 가둘 것이라고 했으면서 저렇게 풀어놓으시면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가요?]
동백의 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엘릭을 돌아봤고.
엘릭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산뜻하게 웃었다.
“제가 왜 강한지 아십니까?”
[…?]
『…?』
“탈주 마법사기 때문이죠.”
[….]
『…미친놈.』
엘릭은 그 말을 던지자마자 바로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동백의 신은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 * *
앙드류는 자신의 수하들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하는 엘릭을 보면서 악을 질렀다.
“쫓아! 쫓으란 말이다아!”
여기서 메르빙거를 놓쳐서는 더 큰 화가 빚어질지 모른다. 앙드류… 아니, 앙드류에 빙의한 마족은 그렇게 판단했다.
엘릭은 조직이 여태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동안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는 뜻.
여기서 이대로 놓쳤다간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져서 그들의 걸림돌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역시 기회가 됐을 때 메르빙거의 싹을 전부 끊어놨어야만 했어!’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일찍 해도 늦는 법.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잡아야만 했다.
팟! 파밧!
엘릭을 잡아야 하나, 아니면 동장군을 묶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수하들은 일제히 고민을 멈추고 엘릭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앙드류도 곧장 한파를 헤집으면서 달리려 했지만.
털썩!
그는 달리다 말고 하체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울컥. 입가를 따라 핏물이 줄줄 쏟아졌다.
빙의가 한계까지 다다랐다는 뜻.
육체의 생명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길! 하필이면, 이럴 때…!’
이제 막 동장군이 미쳐 날뛰려 할 때 이런단 말인가! 아니, 최소한 엘릭이라도 잡고 난 뒤라면 화라도 덜 날 텐데!
앙드류의 두 눈에 핏대가 잔뜩 섰다.
“유다 님!”
“괜찮으십니까?”
수하들이 달리다 말고 다급하게 앙드류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뭐해! 어서 잡으러 안 가고! 난 신경 쓰지 말고 놈부터 잡아!”
그 말에 수하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휘휘휘!
설상가상으로, 이미 너무 커져 버린 동장군의 한파는 수하들의 발목까지 붙잡고 있었다.
* * *
“【빨라지고】, 또 【빨라져라】.”
엘릭은 스스로에게 몇 번씩이나 헤이스트 마법을 걸어대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거기다 각력에 마력까지 쏟아부으니, 속도는 웬만한 무도가들보다 훨씬 빠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키에에엑!
동장군이 괴성을 지르면서 쫓아왔다.
헝겊 인형처럼 생겨 표정 따윈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어쩐지 그에게 화가 잔뜩 난 것 같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저놈, 왜 자꾸 너를 쫓아오는 거지?』
메피스토는 동장군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백의 신은 팔짱을 낀 채로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비웃음을 던졌다.
[그야 메르빙거의 마력향이 너무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겠죠. 동장군을 봉인했던 게 우스던 메르빙거였다던 제 말을 금세 잊으시기라도 한 건가요?]
메피스토는 짜증 섞인 얼굴로 동백의 신을 노려봤다.
『본 왕이 그런 판단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면 왜 마족 놈들한테는 지랄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건 매한가지였던 다른 수인족에게는 왜 방향을 틀지 않는 거고?』
[그건…!]
동백의 신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자 입을 꾹 다물고 말았고, 메피스토는 한껏 기세등등해진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순히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놈에게만 장난 아니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동백의 신은 동장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동장군은 너무 미친 듯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분노도 너무 노골적으로 엘릭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
‘동장군이 원래 저렇게 누군가에게 특정해서 화를 낸 적이 있었나?’
아주 오랫동안 동장군을 지켜봤던 동백의 신도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장군의 분노는 보통 자신이 태생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들, 즉 생명체에게 무작위로 향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엘릭에게 쏟아내는 분노는 그것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약이 바짝 올라있는 것 같은…!’
동백의 신은 생각하다가 말고, 도중에 눈을 번쩍 뜨며 엘릭을 돌아보았다.
[다, 당신! 또 동장군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엘릭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별 거 안 했습니다.”
[뭘 했기에 저놈이 저런 반응을…!]
“그냥 봉인진에서 풀려났을 시점에 딱밤을 놔줬을 뿐입니다만.”
[딱… 밤?]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음 화살 뭉쳐다가 이마 때리니까 저렇게 쫓아오던데요?”
[….]
동백의 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것 말고도 삭풍의 인장으로 팔뚝 꼬집고, 흉성의 인장으로 찝쩍거리고… 뭐, 하여간 그러니까 알아서 열이 받았나 보네요.”
동백의 신은 그제야 엘릭의 인장들이 순서대로 빛나면서 동장군의 주변에다 마력장을 몇 번씩이나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장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분산된다 싶으면, 곧바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서 약이 바짝 오르게 한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래야 제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잖습니까?”
[아…!]
“겸사겸사 저 귀찮은 파리 떼들도 같이 치워 버리고 말이죠.”
엘릭의 시선이 닿은 자리에는 어느새 포위망을 다 갖춘 수인족들이 있었다.
“인간이다!”
“침입자다! 놈을 막아!”
“잡아라!”
수인족들은 엘릭을 발견하자마자 잔뜩 화를 내면서 저마다 수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꿰뚫어라】.”
엘릭은 얼음 화살을 잔뜩 응결시켰다가 한쪽 지점에만 집중사격해서 강제로 길을 열었다.
“크아악!”
“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얼음 화살이 가진 위력만 따져도 워낙에 강한 데다가, 화살 끄트머리에다 빙독까지 잔뜩 심어두니 곧 화살에 노출된 지점은 수인족의 비명과 절규로 가득 찼다.
얼어붙은 살점이 위로 튀고, 얼음 조각이 바닥에 질펀하게 깔렸다.
“어딜!”
“못 간다!”
엘릭이 그 사이로 무사히 통과할 듯 보이자, 투사들이 절대 그 꼴만은 보지 못하겠다는 듯 허겁지겁 달려들었지만.
“【휘몰아쳐라】.”
휘휘휘!
거센 눈보라가 돌개바람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접근을 막아서니 어떻게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뒤에 발생하고 말았으니!
키에에엑!
“동장군이 왜 여기에…!”
“피, 피해라!”
뒤늦게 동장군의 본체가 나타난 것을 확인한 수인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퓨리 소속의 투사라 하여도, 고위 간부가 아니고서야 이곳에 동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수인은 거의 없었던바.
당연히 동장군의 등장은 그들에게 있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콰콰콰콰!
순식간에 십여 명의 수인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뒤로도 한파가 더 크게 휘몰아치면서 가뜩이나 수화를 시도했던 수인족들의 털을 더 무겁게 만들었으니.
동장군을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재해쯤으로 여기고 있던 수인들의 포위망이 흔들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으, 으아아아!”
“우리 아버지도, 형도 동장군에게 죽었다고! 나까지 죽을 수 없어!”
“비켜! 비키라고!”
제자리를 이탈하고, 도망치고… 간부들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수인들은 모두 동장군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자 애썼다.
덕분에 엘릭을 잡으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제자리를 지켜라! 동장군에 겁먹지 말란 말이… 컥!”
몇몇은 어떻게든 혼란을 잠재우려 했지만, 곧 흉성의 인장이 움직인 그림자 칼날이 기습적으로 목젖을 베어버리는 통에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
메피스토는 결국 이 모두가 엘릭의 노림수였단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엘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듯, 익살맞게 웃고 있던 웃음을 더 크게 비틀었다.
“저쪽이 판을 쥐고 있으면 아예 흔들어놔야죠. 그리고 이왕에 시작했으니 더 크게 흔들어 놓을 겁니다.”
『어떻게?』
“아예 개판으로 만들어버려야죠.”
『설마?』
“저놈들, 그리고리랑 손잡았다면서요? 메피로서도 나쁘지 않을걸요?”
『푸하하핫! 그건 그렇지.』
메피스토는 엘릭이 하려는 계획을 읽고 하늘이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광기에 젖은 눈을 하고서 엘릭을 보았다.
잔뜩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그것 아냐, 애송아?』
“뭡니까?”
『너와 본 왕이 함께한 이래, 처음으로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
“그야 목표가 똑같으니까 그렇겠죠?”
엘릭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퓨리의 포위망을 더 크게 휘저었다.
콰콰콰콰-
그리고.
[이봐, 조카사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한파가 더 거세진 것 같은데! 다친 데는 없나?]
통신구를 통해 푸른 매의 걱정에 찬 목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그들은 엘릭의 지시대로 밤의 구획에서 널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태.
밤의 구획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한데,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으니 바짝 긴장했던 것이다.
혹시나 엘릭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고.
가뜩이나 수인들이 포위망을 갖추던 게 보여서 자신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갑론을박을 하던 중이기도 했다.
[그 소란, 제가 일으킨 거니까 걱정마십시오.]
그래서 엘릭은 재빨리 통신구를 입에다 가져다 댔다. 우선은 이들의 걱정부터 불식시켜야 했다.
[후우!]
[다행이군.]
[그러니까… 이봐, 조카사위. 몸조심하라고. 자네가 다치면 우리가 조카님한테 크게 혼난다니까?]
엘릭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상시 언행은 경박한 편이어도, 저들이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쳤기에 저놈들이 저 난리인 거야?]
[별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닌데 이런 난리가…!]
[그냥 동장군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
[….]
[….]
한순간, 소란스럽던 통신구가 거짓말처럼 적막에 잠겼다. 조금씩 잡히는 노이즈가 통신 마법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 상상 초월이야.]
[거봐. 내가 말했지? 조카사위님은 이미 우리의 상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니까? 하핫!]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나?]
그때, 푸른 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헤르만이 진지한 투로 물었다. 물론, 그 역시 웃음기를 억지로 참는 티가 다분했다.
엘릭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저를 엄호해주십시오.]
[어디론가 갈 생각이로군?]
[그야 당연하잖습니까.]
엘릭의 두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대로 곧장 퓨리로 돌진합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