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꽃샘추위
“…음?”
마족 앙드류는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등장하면, 보통 인간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띠기 마련이었다.
그가 보유한 마기 자체도 대단한 편이었지만, 소유한 인장이 인간들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광풍(狂風).
문명이 탄생한 이래,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사납게 부는 바람은 인간들이 머무는 집을 무너뜨리고 농작물을 망가뜨리곤 했다.
범람하는 강은 대규모 공사를 통해 치수가 가능하지만, 사나운 바람은 도저히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미지와 공포의 대명사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장군에 가까이 접근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인간도 당연히 자신에게 주눅이 들 거라고 생각했건만.
눈앞에 있는 인간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품평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게 아닌가.
‘메르빙거라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처음 이곳에 파견될 때까지만 해도, 앙드류는 현재 퓨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던 인간이 메르빙거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었다.
현재 그가 파악하고 있기로, 메르빙거의 당대 전승자는 대륙에서도 제법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상태.
가문을 일으키겠답시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바쁜 판국에 굳이 이런 척박한 변방까지 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혈미왕이 처음 메르빙거 운운을 할 때는 핑계라고 여겼다.
그동안 무시하기만 했던 안트로모프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럴듯한 변명을 둘러댄 것이라고.
실제로 혈미왕이 40년 전에 동장군을 등에 업고 크게 일어나려다가 우스던 메르빙거에게 꺾이지 않았던가.
퓨리에게 우스던 메르빙거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란 말이지?’
태양처럼 타오를 듯한 금발에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녹안.
확실히 메르빙거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거기다 풍기는 마력향도 상당했으니.
‘생각지도 못했던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로군.’
앙드류는 현재 조직의 명령에 따라 빙정을 입수하기 위해서 흑의 설원으로 들어온 상태.
혈미왕과 거래를 해서 그의 세력이 흑의 설원을 일통하게 만들어 든든한 우방으로 남게 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은 쓸모가 없어질 동장군을 가져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메르빙거의 당대 전승자가 나타났다?
여전히 조직 내에 메르빙거에 대한 원한이 깊은 간부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높은 점수를 따기에 아주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릭을 무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대는 모든 인외의 천적.
어떤 패를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높이 평가한 것도 아니었다.
‘현재 조직에서 파악한 놈의 수준은 끽해야 마도사, 혹은 거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앙드류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하얀 밤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실력 상승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 테니… 새로운 마법을 배웠다고 해도 많은 변화는 없을 테고.’
휘이잉!
앙드류는 재빨리 동장군이 일으키는 한파에 다른 이질적인 마력향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경계했던 하얀 밤이나 청사자도 여기에 오지 않은 것 같았으니…!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겠군.’
앙드류는 이참에 메르빙거의 싹을 완전히 끊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릭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뭐야, 이거? 보자마자 선빵이냐?”
엘릭은 앙드류가 별다른 말도 없이 공격을 감행해오자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듣기로, 메르빙거는 지난 공을 인정받아 제국에서도 공작 위로 분류된다고 들었는데…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잘 보이지 않는군.’
애당초 앙드류가 몸담은 그리고리는 마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집단이었고, 그는 거기서도 엘리트 혹은 귀족으로 분류되는 ‘광(狂)’의 진명을 타고난 자.
당연히 엘릭의 저런 언행이 마음에 들 리가 만무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처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의 우측 어깨에 박힌 광풍의 인장이 요요히 빛나면서, 돌풍이 매섭게 불어 닥쳤다.
그것은 끝내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엘릭을 찢어발기고자 했으니…!
여기에 동장군의 한파까지 더해질 테니 그는 이걸로도 얼마든지 엘릭을 찢어발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랑 비슷한 놈이라구요? 헛소리하지 마십쇼. 【찢겨라】.”
엘릭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무슨 말을 떠들어대더니,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무언가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더니, 앙드류가 일으키던 회오리바람이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게 무슨…!’
앙드류는 광풍을 몰면서 엘릭에게 다가갔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엘릭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갈라라】.”
촤아악!
그러다 앙드류는 찢겨나간 자신의 바람 중 일부가 방향을 꺾으면서 날아오는 듯한 느낌에 재빨리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눈보라가 갈라지고, 바닥에 깔린 설원 위로 마치 맹수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흔적이 남았다.
앙드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만약 저기에 고스란히 당했더라면, 허리가 동강 났을지도 모르니까.
“오, 이걸 피했네? 그럼 이것도 막아보시지. 【휘몰아쳐라】.”
엘릭은 익살맞게 웃더니 앞으로 내뻗은 손바닥을 뒤집어 마력장의 방향을 크게 틀었다.
휘휘휘휘!
이번엔 엘릭을 따라 ‘눈보라’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냉혹의 인장이 주는 한파와 흉성의 인장이 심은 포악한 성질, 그리고 삭풍의 인장이 낳은 칼바람까지 한데 뒤섞이자 위력은 이미 이전과는 비할 바가 절대 아니었다.
앙드류는 본능적으로 광풍의 인장보다 저쪽이 더 우위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재빨리 뒤로 내뺐다.
동시에 마기를 있는 힘껏 쥐어짜서 ‘광풍의 벽’을 잇달아 세워 올렸다.
콰콰콰콰-
쾅!
쾅!
콰아앙!
하지만 허겁지겁 바람을 끌어모아 만든 방어막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잇달아 부서지더니, 결국 마지막 남은 벽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 인간이 대체 어떻게 도, 동장군의 힘을…!’
앙드류는 기겁해야만 했다.
조직에서 그토록 갖고 싶어 애썼지만 끝내 갖지 못한 ‘북풍’과 ‘한설’을, 정작 엘릭은 아무렇지 않게 부리고 있었으니까!
북풍한설(北風寒雪).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갈가리 찢는 바람과.
문명을 전부 새하얀 백색으로 뒤덮으며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린다는 폭설.
이 두 가지는 마신이 후대의 마족들을 위해 손수 남기셨다는 위대한 4대 힘 중 하나일지니…!
아자젤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대마전쟁을 일으켜 제국을 몰락시키고자 하는 그리고리로서는 반드시 얻어야만 할 힘이기도 했다.
동장군은 바로 그런 북풍한설을 손에 넣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하지만 워낙에 대단하다고 여겨졌기에 조직에서도 도저히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국에.
그것을 인간이 부린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원수인 메르빙거에서…?
하지만.
엘릭은 앙드류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맹렬한 속도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말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고 매서운 일격.
강체술.
맹호출현 – 경(勁).
‘강체술까지!’
퍼어어엉!
엘릭의 주먹 끝에서 마력이 한껏 응축되었다가 터져 나오면서 앙드류의 전신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커헉!”
앙드류는 육체의 3분의 1이 날아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한껏 뒤로 튕겨나야만 했다.
엘릭이 바로 그 뒤를 쫓아왔다.
강체술.
아호심양 – 난(亂).
퍼퍼퍼펑!
연환 공세가 잇달아 쏟아지니, 앙드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판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판단, 앙드류는 재빨리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면서 땅바닥을 손으로 세게 두들겼다.
앙드류의 손끝에서 광풍이 불면서 땅거죽이 뒤집혔다. 새하얀 토벽이 세워지면서 엘릭의 전진을 가로막고, 그사이 앙드류는 재빨리 몸을 최대한으로 내빼면서 부서진 육체를 수복하고자 했다.
죽은 피를 한껏 토해냈다. 부서진 팔다리가 복구되면서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앙드류는 자신과 조직이 내린 판단이 너무 안일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빙거의 당대 전승자는 그들이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최소 7써클!’
거기다 분명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호왕가의 강체술까지 자유자재로 부리는 걸 봐서는 무도가로 분류해도 될 정도였으니.
저 나이대를 고려해본다면, 이미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재라 불린다는 3신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는 내가 진다.’
앙드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타고난 수완과 대전략을 구상하는 두뇌에 있지, 이런 무력 다툼에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앙드류는 자신 혼자서는 엘릭을 잡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 재빨리 이 상황을 타개할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내 재빨리 찢었다. 지정된 좌표로 곧장 이동하게 해주는 워프 마법이 새겨져 있었지만.
‘왜…?’
이펙트만 찬란하게 부서져 떨어질 뿐이지, 정작 마법은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
그 순간, 엘릭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앙드류가 허리를 쭈뼛 세웠지만.
이미 그 전에 엘릭이 먼저 앙드류의 뒤통수를 잡아서는 지면에다 처박고 있었다.
콰아아앙!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앙드류의 안면 골격이 그대로 부서졌다.
* * *
[별거 없네, 이 새끼. 좀 센 줄 알았더니 그냥 잡몹인 모양이네요?]
엘릭은 머리통이 반쯤 부서진 채로도 여전히 꿈틀대고 있는 앙드류의 몸 위에 올라타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에야 반 장난식으로 메피스토에게 녀석을 잡아주니 마니 했었다지만.
그래도 풍기는 기세만 봐서는 이전에 북방으로 오기 전에 상대했던 카야보다 강해 보였기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정작 부딪쳐 보니 느낀 감상은 아주 간단했다.
‘너무 쉬운데?’
엘릭은 그것이 단순히 녀석이 생각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강해져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배에서 얻은 성과가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모양이었다.
『흥! 아자젤 놈의 추종자이니 겉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지.』
메피스토는 엘릭이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두 눈을 보니 적잖게 놀란 게 분명했다.
엘릭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메피스토를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꿈틀대기 바쁜 녀석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리가 여기에도 손을 뻗치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생각보다 혈미왕과 유착 관계가 심한 것 같은데… 이거 좀 더 자세히 파헤쳐봐야겠는데.’
엘릭은 자신의 손에 굴러들어온 이놈을 순순히 죽일 생각이 없었다. 흉성의 인장이 어서 이놈을 맛보고 싶다면서 꿈틀대는 게 느껴졌지만, 엘릭은 가만히 있으라면서 녀석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고는 냉혹의 사슬을 줄기차게 뽑아 앙드류를 묶으려 했는데.
갑자기 녀석이 간질 환자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야,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엘릭은 혹시 녀석이 죽었나 싶어 기겁하면서 손을 대려다 말고, 갑자기 우측 어깨에 박힌 인장이 불길한 색을 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키키킥!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휼의 사념이 경고를 해주기도 전에 이미 앙드류의 허리가 반쯤 뒤로 접히더니 그대로 손날을 휘둘렀다.
여태껏 녀석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기세와는 전혀 달라 재빨리 그림자를 손날 위로 끌어올리면서 ‘소수’를 터뜨려야만 했다.
쩌저저정!
마기와 한파가 허공에서 격돌하면서 얼어붙은 마기 조각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엘릭은 널찍이 떨어져서 세 개의 인장을 동시에 발동시키면서 강체술의 기수식을 갖췄다.
츠츠츠-
그사이.
망석중이처럼 축 늘어졌던 앙드류의 몸뚱이가 마기를 줄줄 흘리면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누가 보더라도 앙드류의 자의가 아닌, 제3자가 나타나 개입하고 있는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풍기는 마기가 여태껏 앙드류가 보이던 광풍의 인장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단 점이었으니!
그러던 그때, 광풍의 인장이 뒤틀리면서 엷게나마 새로운 형태의 인장으로 변하면서.
앙드류의 머리통이 위로 번쩍 들렸다.
두 눈이 안광을 매섭게 뿜어내면서 엘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왕…?’
엘릭은 앙드류의 몸을 빌린 작자가 휼의 본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 것 같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허리가 쭈뼛 섰다.
등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름 모를 마왕이, 앙드류의 입을 빌려 말했다.
“너. 로. 구. 나. 카. 야. 를. 죽. 였. 던. 놈. 이.”
엘릭이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아자젤? 설마 벌써 눈을 뜬 건가?』
바로 옆에 있던 메피스토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