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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15화 (115/405)

115화

꽃샘추위

서둘러 ‘밤의 구획’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막으라는 명령에 전 병력이 바쁘게 움직이던 중이었다.

4조장 템프는 자신을 따라오는 투사 중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겉보기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건장한 체구나 새하얀 피부, 그리고 갈기처럼 헝클어진 곱슬머리 같은 사사족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사사족은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템프도 이름은 모를지언정 대부분 면식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자 템프의 의심을 받은 수인이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크게 소리쳤다.

“리, 릭엘이라고 합니다! 바, 방금 이쪽으로 가라 명령을 받았었는데… 혹시 잘못되었을까요?”

“신병인가?”

“그렇습니다!”

“음? 따로 신입명령서를 받진 못했는데… 하여간 다들 바빠서 그런가, 일 한 번 더럽게 못 하는군.”

영 말투나 태도가 투사답지 않게 빳빳하고 어수룩한 모습이었지만.

템프는 그것을 군기 교육을 마치자마자 실전에 곧바로 배치되면서 생긴 신병의 긴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맘때는 이랬었지, 아마?’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타깝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아직 부대의 운용 방식이나 투사의 규율에 대해서 잘 몰라 모든 게 혼란스러울 텐데, 다들 정신이 없으니 아무도 도와주질 못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챙겨주자니, 괜히 뒷말이라도 나올까 저어되어 그래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하여간 힘내게. 지금은 모든 게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곧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걸세.”

“가, 감사합니다!”

템프는 ‘릭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족의 어린 신병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들겨 준 뒤, 다시 병력을 이끌고 지정 장소로 이동했다.

어린 신병은 그런 템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템프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신병을 챙기는 상급자에 대한 열의라 여기고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이런 허접한 연기로도 속다니. 수인족, 이래도 되는 건가?』

[설마 여기까지 잠입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어린 신병의 주변을 맴돌던 마왕과 신은 하나 같이 어이없다는 투로 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션 등이 항상 지적하는 것처럼 엘릭은 정말 연기를 못했다. 방금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밖에 여길 수 없을 어색한 말투인데도 불구하고, 템프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지 않았나.

동백의 신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몇 마디를 덧붙였다.

[거기다 사사족은 퓨리에서도 손꼽히는 일족이기도 하구요. 체취도 더할 나위 없이 사사족에 가까우니 절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 하는 것일 테지요.]

수인족은 원래 대상에 대한 판단을 눈보다는 코와 귀 같은 다른 감각기관으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편이었다.

엘릭이 폴리모프를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면서 사사족의 체취를 그대로 모방할 수 있었으니.

템프를 비롯한 수인들 중 어느 누구도 엘릭을 ‘인간’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다들 바쁘게 임지로 이동하다 보니 섞인 다른 부대의 투사라고만 여길 뿐이지.

[이게 다 저의 큰 그림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메피, 하여간 쓸데없이 옆에서 딴죽이나 걸 거면 그냥 옆에 찌그러져 계십쇼.]

덕분에 엘릭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인들 사이에 섞일 수 있었고.

차근차근히 밤의 구획으로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심안을 활짝 열어젖힌 상태로.

* * *

밤의 구획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하늘에 낀 짙은 먹구름을 따라 수십 갈래의 결이 실타래처럼 계속 뭉쳤다가 다시 퍼지는 것이 보였다.

일대에 걸쳐서 대규모 마법, 혹은 마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

엘릭은 그것이 동장군의 위치를 가리키는 이정표라고 생각했다.

사박!

사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보라가 만들어낸 설원에 발이 깊게 빠졌지만, 마법을 적절하게 이용하다 보니 그리 많은 체력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엘릭은 이동하다가 도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손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인장은 그 뒤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는데, 흠!’

손목에서부터 팔뚝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크기로 박혀있는 원죄의 인장.

늑대 형상을 띠고 있는 이 인장은 저번에 노루스 재상에게서 마족을 잡아먹은 뒤로 아무 변화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안배 속에서 삭풍의 인장을 새롭게 획득하고, 그렇게 많은 마기를 흡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원죄의 인장은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으니.

‘역시 트리거를 만들려면 당장 악마수에 접근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1천에서도 이렇게 고생 중인데, 더 한 마물들이 우글댄다는 2천 이상으로는 대체 어떻게 접근을 하라는 것인지.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보이면, 그걸 가지고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엘릭은 처음 원죄의 인장과 ‘연결’ 되었을 때의 감각을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영혼이 붕 떠오르는 듯했던 고양감.

특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짚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끝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걸렸던 결이 너무나도 많았던 나머지, 마나 스트림이라도 손에 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만약 당시에 그가 당황하지 않고, 다른 뭔가를 시도했더라면 거의 전능(全能)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원죄의 인장이 갖고 있던 힘은 아주 대단했으니.

그래서 엘릭이 더더욱 원죄의 인장을 탐내고 있었다.

그 힘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더 빠르게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음? 뭐냐?』

문제는 정작 그런 힘을 소지한 작자는 어리버리하게 보인다는 점이지만.

[에휴!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메피스토는 엘릭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엘릭의 생각을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어림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진짜 대마왕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그동안 메피스토가 보인 모습들이 워낙에 카리스마와 거리가 멀다 보니 잠깐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짜증 나는군. 하여간 너희 메르빙거는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그렇게 투덜대는 메피스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사이.

[근처까지 도착한 것 같군요.]

동백의 신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인상을 찡그리면서 하늘을 응시했다.

가뜩이나 거친 눈보라나 우거진 숲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하늘이 점차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엘릭도 안배에서 본 적이 있던 동장군의 영역, 밤의 구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결도 잔뜩 엉킨 채로 저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니. 한파며 눈보라도 저쪽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저곳이다.’

때마침 템프도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곳을 지키도록 한다. 쥐새끼 한 마리 이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단단히 방비해라! 단, 이 안으로의 출입은 불허한다!”

침입자들이 동장군을 찾는 것을 막으려는 모양이었다.

엘릭은 투사들이 바쁘게 군열을 맞추면서 자신에게 모든 시선과 관심이 떨어질 무렵에 재빨리 언령 마법을 가동했다.

“【가려져라】. 그리고 【은밀해져라】.”

화아아!

때마침 불어오던 한파가 커튼처럼 그의 신형을 가리고.

동시에 기척마저 완전히 지워지면서 이동이 시작되었다.

“【떠올라라】.”

거기다 엘릭은 발자국까지 남기지 않기 위해 설원 위로 마력장을 넓게 퍼뜨리면서 그 위를 빠르게 밟고 지나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결을 일일이 잡아당겨 엉키게 하고, 마력장 형태로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과 노고를 필요로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걸 어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간 아무리 메르빙거라고 해도 미친 재능이란 말이죠.]

동백의 신은 그것이 얼마나 고되고 많은 심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지를 잘 알기에 질린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렇게 엘릭이 빠르게 움직여 도착한 곳에는.

파아아아!

거칠게 불어 닥치는 눈보라와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떨어질 것처럼 차가운 한파. 그리고.

철그럭!

철그럭!

설원 한가운데에서 웬 형틀에 단단히 결박되어있는 검은 동장군이 있었다.

‘이게 무슨?’

형틀에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아주 길게 땅바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장군이 어떻게든 결박을 떨쳐내기 위해서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그럴 때마다 쇠사슬은 떨어질 기미는커녕, 오히려 서로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기 바빴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붙들려있었던 걸까.

쇠사슬이 상당히 낡은 걸 봐서는 꽤 오랜 세월 동안 묶여있었던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엘릭은 적잖게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끼에에엑!

그러던 그때, 동장군이 엘릭을 발견했는지 이쪽을 보면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안배 속에서는 율호왕과 그렇게 거칠게 부딪쳐도 울음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았었건만.

지금 여기 있는 동장군은 오로지 악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놀란 눈이로군요.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어요.]

하지만 엘릭과 다르게, 동백의 신은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동장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입가에는 차가운 냉소마저 머금고 있었으니.

그건 한때 자신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떨어져 나가 재해와 횡액만 일으키면서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기만 하는 존재에 대한 분노였다.

『푸하하하! 마신께서 남기셨다던 저주를 저런 식으로 꽁꽁 묶어놓다니. 저건 저것 나름대로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겠군!』

메피스토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한쪽 입꼬리를 말면서 동백의 신을 돌아봤다.

『네년이 40년 전에 갑자기 잠든 이유가 바로 저것과 관련이 있겠군?』

[맞아요.]

『어쩐지. 저 사슬들, 이상하게 꽃향기가 너무 많이 풍기더라니. 신력을 뭉쳐서 만든 거였어.』

엘릭은 메피스토와 동백의 신이 나눈 대화를 통해 동장군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부님이 40년 전에 오셨을 때… 저렇게 만들어놓으신 거로군요.”

[맞아요.]

동백의 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동장군이 다시 기승을 부릴 때라, 우스던이 저렇게 묶어뒀었답니다. 다만, 당시에 워낙에 크기가 큰 나머지 없애지는 못하고 이렇게 임시 봉인을 해두는 게 고작이었는데….]

동백의 신은 여전히 이쪽을 보면서 아등바등하는 동장군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봉인이 더 잘 되었었던 모양이에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여기다 덧칠을 했던가.]

엘릭은 ‘덧칠’이라는 말에서 혈미왕이 개입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쇠사슬에서 퓨리의 도시를 차례로 격파할 때마다 느꼈던 꼬리의 가호를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자기편의 때문에 여기다 계속 묶어둔 모양인데… 덕분에 좀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겠는데.’

엘릭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묶여있다면 빙정에 가두기가 훨씬 쉬울 테니까.

사실 소싯적에 율호왕도 꺾지 못했던 존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 우려가 가장 컸었으니.

아무리 40년 전에 조부님이 상대하시면서 힘이 많이 빠졌다고 해도, 재해급의 상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혈미왕이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줬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정작 본인이 그 사실을 안다면 단단히 화를 낼 테지만.

엘릭은 재빨리 품에서 빙정을 꺼냈다.

키에엑? 키에에엑!

동장군은 처음에 그게 무엇인가 싶어 인상을 팍 찡그리다가, 뒤늦게 불길함을 느꼈던지 더 크게 괴성을 질러댔다.

휘휘휘!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파도 그만큼 더 거세졌다.

“【흡수되어】…!”

엘릭이 거기다 대고 마력장을 넓게 깔면서 언령 마법을 구동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콰쾅!

“쳇! 그럼 그렇지. 어쩐지 너무 쉽더라니…!”

엘릭은 갑자기 동장군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면서 대량으로 그려지는 마법진을 보고, 혀를 차면서 재빨리 몸을 뒤로 내뺐다.

소환진. 다른 누군가가 동장군을 지키기 위해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거기다 엘릭의 목에 걸려 있던 마도경식이 갑자기 뭔가를 감지한 것처럼 미친 듯이 떨렸으니.

엘릭은 소환진에서 풀풀 휘날리는 것이 ‘마기’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도 상당한 급수를 가진 게 분명한 마족이었다!

하지만.

엘릭이 놀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일반인들이라면 마족이 나타나려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경기를 일으킬 테지만, 그가 주목한 분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마기가 품고 있는 기질.

낯이 익었다.

『설마?』

메피스토도 그걸 눈치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엘릭은 피식 웃으면서 그런 메피스토를 돌아봤다.

“이거 아무래도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낚은 것 같은데요, 메피?”

『저놈들이 이런 곳에도 손길을 뻗치고 있었나…!』

“저거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토템이 아니라 마족, 그 자체인데. 급수도 상등품인 거 같고. 날로 잡아서 드릴게요. 거래 콜?”

메피스토의 인상이 무참히 구겨지는 가운데.

소환진이 잘게 부서지면서 마족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츠츠츠!

흩날리는 마기 속에는 짙은 광기가 담겨있었으니.

광기의 아자젤. 그리고리 소속의 마족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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