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꽃샘추위
엘릭이 움직이는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도시 외곽에서 심안으로 결이 흐르는 방향을 체크하고, 비석이 있는 위치를 파악해 푸른 매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면 푸른 매는 아주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비석을 부수고 다니는 방식이었다.
[으흐흐흐!]
[여기 맞지?]
[이거 하면 할수록 너무 재미있는데?]
[더 할 거 없나? 이봐. 조카사위, 무엇이든 시키기만 하라고! 으히힛!]
엘릭은 자신이 나눠준 통신구를 통해 전달되는 푸른 매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혀를 찼다.
『하나 같이 변태들뿐이로군.』
[그 변태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뭐. 하여간 여기도 이제 다 끝났네요.]
엘릭은 동장군이 불어 닥치자 금세 혼란에 젖은 도시를 보면서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항이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이 뒤부터는 거의 불가능하겠군.』
“저놈들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학습 능력이 있다면 계속 당하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어차피 저도 계속 비석만 부수고 다닐 생각은 없었습니다.”
『원하던 건 어디까지나 흔들기였으니까?』
“빙고.”
『하여간 음험하기로는 마족보다도 더한 게 딱 메르빙거로군.』
지금까지 엘릭이 사고 친 도시는 모두 다섯 개.
하나 같이 퓨리의 세력권에서도 가장 크게 퓨리와 혈미왕을 지지하는 곳들이었다.
이런 작전을 짜게 된 건, 이전에 들었던 현 세력 구도 덕분이었다.
-지금 혈미왕의 지배하에 있는 수인 연합은 사실 사상누각이에요.
-사상누각?
-예. 모래 위에 지은 성이요. 혈미왕이 워낙에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도시들이 묶여있는 거지, 사실 퓨리를 지지하는 곳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럼 저들의 지배 체제에 균열만 일으킬 수 있다면, 이탈자들도 적잖게 생기겠군요.
-예. 이리나가 알아낸 소식으로는 안트로모프가 한 번 저들의 공세를 막아낸 이후로, 그런 준동을 보이는 곳들이 있었다고 해요. 봉기는…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엘릭은 혈미왕의 지배 체재를 아주 간단하게 해석했다.
‘억압이네.’
덕분에 작전을 짜기가 아주 수월했다.
‘자발적이지 못한 충성은 언제고 지지기반이 흔들리면 똑같이 흔들리는 법이니까.’
엘릭이 자극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지지기반이었다.
혈미왕과 퓨리가 견고해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보유한 무력이 강하다는 것과 동장군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였으니.
그중 하나만 건드려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동장군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으니.
‘다른 하나도 천천히 공략해나간다면 이탈은 더 가속화될 거야.’
그렇게 엘릭이 음흉하게(?) 웃는 동안.
콰콰쾅-
휘휘휘!
도시를 뒤덮고 있던 결계가 흩어지면서 동장군이 엄습하는 것이 보였다.
다섯 번째 도시의 붕괴였다.
엘릭은 곧 혼란에 잠기면서 분노에 찬 투사들이 대거 성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통신구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모두 후퇴하시죠.]
[옛썰!]
[금방 나갑죠!]
[조카사위님의 명령이신데 나가야쥬. 으흐흐!]
엘릭은 푸른 매가 무사히 빠져나오는 걸 관찰하다가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판단이 들자 같이 몸을 내빼고자 했다.
그러던 그때, 돔 형태의 결계가 무너진 자리로 붉은 아지랑이가 크게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거 또 보이네.”
엘릭의 혼잣말에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동백의 신이 대답했다.
[혈미왕의 꼬리는 퓨리의 지배에 있어서 상징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들의 결계를 부술 때마다 나타나던 혈미왕의 꼬리는 결계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자, 시시각각 명령을 하달할 수 있도록 퓨리의 통신망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니.
처음 저것이 혈미왕이 가진 힘의 근간이라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걸 걷어치운 것이다. 퓨리도 지금쯤 이곳의 상황을 눈치챘다고 봐야겠지.
[혈미왕의 약이 아주 바짝 오르겠어요.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이었는데. 호호호호!]
엘릭은 동백 신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투사들이 덮치기 전에 푸른 매를 쫓아 자신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슬슬 반응을 봐가면서 두 번째 작전으로 돌입할 때였다.
* *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침입자를 제거할 것.]
퓨리의 왕족인 영호족(令狐族)의 부족장이자, 부시장을 맡고 있는 네테르는 자신 앞에 하달된 명령장을 보고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럴수록 그의 엉덩이에서 길게 이어진 4개의 꼬리는 털이 바짝 서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주군이자 왕으로 모시는 분의 분노가 크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으니까.
‘바라센 놈처럼 실패했다간, 나도 똑같이 목이 내걸리고 말겠는데.’
네테르는 서늘한 목을 손으로 몇 번이나 쓰다듬어야만 했다.
혈미왕은 군림하고 지배는 할지언정, 절대 직접 통치는 하지 않는다. 호선 출신으로서 못다 채운 수양을 마저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통치는 밑에 있는 수하들에게 일임하는 편이었다.
주로 그걸 담당하는 게 바로 네테르였고.
일반 수인들이 봤을 때는 2인자의 자리쯤 되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테르는 알고 있었다.
자신 따위야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혈미왕이 마음만 먹으면 꼬리를 내어줘야만 하는 사미호(四尾狐)로서는 어떻게든 그가 내린 명령을 달성해야만 했다.
“일단 안트로모프 놈들이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뭘 노리는 거지?”
하지만 네테르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었다.
바로 노림수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단순히 겉보기에는 퓨리의 세력권을 크게 휘저어 지배권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테르는 그래봤자 안트로모프의 부름에 호응할 수 있는 도시는 몇 개 안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아무리 반발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호왕가가 혈미왕 님을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굳이 위험하게 저쪽으로 설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안트로모프로서는 아주 큰 ‘한 방’을 노리려 들 게 분명했다.
네테르의 미간에 팬 골이 더 깊어졌다.
‘다른 뭔가가 있어. 다른 뭔가가.’
네테르는 고민을 하다 말고, 갑자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밖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다급하게 불렀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예!”
“흑의 설원의 지도를 가져와라! 당장! 서둘러!”
수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둘러서 지도를 가져와 네테르 앞에 활짝 펼쳤다.
네테르는 펜을 들어 결계가 망가진 도시들을 각각 점으로 찍고, 그것을 선으로 연결해보았다.
그리고 펜을 신경질적으로 펜을 땅에다 내려놓으면서 인상을 더 크게 찡그려야만 했으니.
“이것들이 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서로 연결된 도시들은 크게 봤을 때 한 지역을 보호하는 경계선에 해당했다.
동장군의 본체가 위치한 구역.
퓨리에서는 ‘밤의 구획’이라 부르는 장소였다.
“…여길 들켜서는 안 된다.”
퓨리가 동장군의 본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내에서도 최고위 간부들만 알고 있는 사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져서는 기존에 퓨리에 충성을 바치던 도시들마저도 반발하거나 이탈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수인족에게 동장군이란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동장군 때문에 도시의 외연을 확장하지도, 흑의 설원을 영역으로 삼지도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퓨리는 그동안 이런 공포 심리를 이용해서 지배를 더욱 견고하게 해왔다.
그런데 안트로모프에서 이걸 눈치채고 건드리려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이미 저들이 밤의 구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군을 움직여야겠군.”
네트로는 당장 수하에게 1군주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오라고 명령 내렸다.
* * *
“오, 움직인다.”
엘릭 등이 내뺀 곳은 사실 퓨리의 세력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돌산이었다.
흑의 설원이 만들어주는 천혜의 환경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퓨리의 투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릭은 투사들이 움직이는 방향이 북쪽, 즉 2천으로 향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동장군이 있을 구역을 보호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저놈들이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나.』
여태껏 엘릭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어대던 메피스토도 이번만큼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엘릭은 안배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동장군이 있던 ‘밤의 구획’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이 퓨리의 세력권 내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정작 동장군의 본체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벨이나 이리나는 동장군이 저쪽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까.
결국.
여기서 엘릭은 한 가지 잔꾀를 써야만 했다.
-동장군의 위치를 알 수 없다면, 저쪽에 섞여서 아주 깊숙하게 들어가 버린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퓨리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신들 틈에 섞여 있다면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엘릭은 우선 자신이 섞여도 저들이 눈치를 챌 수 없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수모어.
물이 탁해지면 물고기가 저절로 꼬이는 법이니.
하물며 그것이 밤의 구획 주변이라면, 혼란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퓨리는 제풀에 놀라 밤의 구획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들 것이다.
엘릭은 바로 그 틈을 노려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니.
엘릭은 지금이 바로 나설 타이밍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혼자서 잘 갈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내가 도와줌세.]
그때, 통신구를 통해서 헤르만이 지원 의사를 밝혀왔다.
그만큼 엘릭이 혼자 움직이는 것을 걱정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통신구에 입을 갖다 댔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저 혼자서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합니다. 청사자 님은 부탁드렸던 대로 의형제 분들과 같이 ‘거기서’ 기다려주십시오. 며칠 안에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자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일단 따르겠네. 하지만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지.]
[걱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곳에서 잘못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헤르만의 통신이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헤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누나, 나 올해로 몇 살이게?]
[까불기는.]
헤이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통신을 껐다.
마지막에 어디론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걸 봐서는 엘릭이 부탁했던 대로 안트로모프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신나게 퓨리를 흔들어대고 있는 동안, 호왕가는 뒤에서 다른 지지 세력들을 끌어모아야만 해. 누이와 션이 옆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잘 해주겠지.’
헤이즈는 엘릭이 이만큼 자립할 수 있게끔 교육을 해준 적이 있었고, 션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직계로서 제왕학을 익혔었으니.
두 사람이 벨을 잘 보좌하고 인도해준다면, 벨도 금세 제왕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각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역시 율호왕의 후예였으니까.
“【변해라】.”
엘릭은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면서 언령을 발동시켰다. 마력장이 얼굴 전체에 고스란히 내려앉으면서 골격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두둑, 두두둑!
이전에 시도했던 변용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광대를 내려앉게 하고, 눈가를 쭉 찢어지게 만드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씩이어도 외형 전체가 바뀌고 있었으니까.
폴리모프(Polymorph).
전설 속 용종만이 해냈다는 근본의 변화는 아닐지라도, 겉모습만 본다면 인간보다 수인에 가까웠다.
새하얀 피부와 갈기처럼 헝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표독한 눈.
죽은 바라센을 닮은 사사족의 특징이 잔뜩 묻어났다.
안배를 무사히 마치고, 경지를 개척하면서 터득한 7써클의 마법이었다.
엘릭과 비슷하면서도, 언뜻 보기에는 전혀 동일 인물인지 알 수 없는 변화.
심지어 은연중에 퍼지는 기질까지도 달랐다.
“【날아올라라】.”
파앗!
엘릭은 바쁘게 움직이는 퓨리의 군단 속으로 몸을 날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