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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13화 (113/405)

113화

꽃샘추위

“【흡수되어라】.”

엘릭의 언령이 구동되면서 마력장이 온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겨울꽃의 씨앗들이 들썩거리고.

빙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 순간.

휘휘휘!

겨울꽃들의 씨앗을 따라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동안 씨앗들을 꽁꽁 얼리고 있던 얼음 조각들이 그대로 빙정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쩌저저적!

씨앗들이 잇달아 부서지면서 그 속에 잠들어있던 꽃의 신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재 온실에 잠들어있던 겨울꽃은 모두 27개.

그들이 모두 저마다 기지개를 켜면서 풍긴 꽃향기가, 기존에 일어나 있던 이들의 꽃향기까지 섞이면서 온실은 금세 향긋한 향기로 가득 찼다.

[어? 개쑥갓이다!]

[팔레놉시스도 있어!]

[와! 와!]

[친구들이다!]

[반가워!]

기존 수선의 신을 포함한 모두가 반갑다면서 허공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날개가 흔들릴 때마다 꽃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 일어난 거야?]

[어떻게 일어난 거지?]

[동장군, 이겼어?]

[이긴 거야? 그런 거야?]

뒤늦게 일어난 겨울꽃의 신들은 처음 동백의 신이 일어났을 때처럼 얼떨떨해하면서도 두 눈은 혹여나 하는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아직 동장군은 여전하고, ‘겨울’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때, 겨울꽃 신들의 머리 위로 동백의 신이 말을 꺼냈다.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몇몇은 동백의 신이 자신들보다 먼저 깨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아직 동장군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시무룩 해했다.

[하지만 곧 잡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을 깨울 수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다시 뒤이은 말은 그들의 고개를 다시 위로 들게 했으니.

[정말?]

[동장군 잡을 수 있어?]

[더 이상 씽씽이 안 맞아도 돼?]

[안 떨어도 돼?]

두서없이 저마다 질문을 쏟아내기 바빴지만.

동백의 신은 평소와 다르게 그렇노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니 더 이상 다들 울상을 짓지 말도록 하세요. 본 녀의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겠죠?]

[응응!]

[동백이가 말하면 다 맞는 거야!]

[우리 이제 안 자도 된다! 만세!]

[다른 친구들도 만날 수 있어! 와아!]

온실을 가득 메우던 꽃향기가 더 짙어지면서 이제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동백의 말에 좋아했다가 실망했다가 하는 모습이 꼭 제 주인이 반갑게 놀아주기를 바라는 똥강아지들 같군.』

메피스토는 그런 겨울꽃의 신들을 보면서 핀잔을 던지기 바빴지만.

그래도 기분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이 영 싫지는 않은지,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를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새 제 기능을 마치고, 손바닥 위에 떨어진 빙정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처음 엘릭이 얻었을 때까지만 해도 새하얗게 빛나던 빙정은 어느새 연분홍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아름다운 물감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웅, 우우웅-

엘릭은 거기서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와 미약하게나마 뒤섞여 있는 신력(神力)을 느끼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흑의 설원에서 ‘겨울’을 완전히 물리쳐 줄 거라고.

* * *

화아아!

겨울꽃의 신들이 모두 일어나자, 변화가 일어난 건 중앙 신전과 비단 온실만이 아니었다.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풀과 들꽃조차도 모조리 타버렸던 그곳에… 따스한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탄 가루가 날리고, 탄내가 싹 사라졌다.

대신에 그 자리 위로 들풀이 나고, 들꽃들이 하나둘씩 조금씩 피어나며 언덕을 삽시간에 다양한 색으로 물들였다.

“오! 예쁜데?”

“이건…?”

“아무래도 우리 조카사위님이 큰일을 해내신 모양인데.”

헤르만과 푸른 매는 외부인은 함부로 중앙 신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조경사의 설명에 밖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장벽 아래에서는 전혀 보기 드문 광경을 보고 말았으니.

젊은 시절에 세상이 좁다 하며 쏘아 다녔던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경관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해낸 일이 이만큼 큰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적잖게 뿌듯해하면서도.

이런 일들을 주도한 엘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대에 이만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초신성이라 하여 3명의 천재가 있다지만, 순수한 능력 면만 따진다면 엘릭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엘릭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경험이 있던 이사벨이 가만히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러다.

‘…어?’

이사벨은 뒤늦게 조경사가 몸을 돌린 채로 조용히 눈가를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태껏 대화를 나누는 내내 딱딱하게만 보이던 그녀였지만.

오랫동안 이 신전을 지켜온 지킴이답게 이 순간이 그만큼 기쁜 것일 테지.

그래서 이사벨은 손수건을 건네 조경사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조경사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재빨리 눈가를 매만지려 했지만, 이사벨은 재빨리 조경사의 손을 잡아 손수건을 꼭 쥐여주었다.

“그러지 말고, 받아요.”

“…고맙습니다.”

조경사는 가만히 고개를 푹 숙였다.

콧잔등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럴수록.

이사벨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마치 저 들판에 흔들리는 야생화처럼.

* * *

엘릭이 신전 밖으로 나온 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였다.

33명이나 되는 겨울꽃의 신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와!]

[꽃밭이다, 꽃밭!]

[사람 엄청 많아!]

[신전이 막막! 커 보여!]

[벨렌체도 있다!]

[안녕?]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겨울꽃의 신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벨을 알아본 신들은 그와 재미나게 어울렸다.

헤이즈는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한편.

엘릭은 이제 볼일도 끝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냐는 션과 카를의 질문에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말했다.

“뭘 어떡해? 말했잖아. 동장군 잡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 동장군인지 뭔지를 잡기 위해서 어떻게 할 거냐고.”

션은 미간을 단단히 좁힌 채로 신신당부했다.

“동장군을 잡지 말자는 게 아니야. 아무 정보도 없이 움직이지는 말자는 것뿐이지.”

“아, 그건 걱정마.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아니까.”

순간, 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두 눈이 전부 빛났다.

“어딘데?”

“퓨리의 영역 내.”

“아.”

션은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안배에서 보았던 대로 벨에게 위치를 물어봤고, 그곳이 현재 퓨리가 구성한 수인 연합 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둔 상태였다.

퓨리가 동장군을 몰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검증이 된 것이다.

션은 팔짱을 끼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바로 깽판 치러 가겠네?”

“당연한 소리를.”

“…그놈들이 불쌍해지는 건 이번이 처음 같은데. 마음대로 해라.”

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뒷말을 작게 붙였다.

“뭘 해도 도와줄 테니까.”

엘릭은 히죽 웃었다.

언제나 툴툴거려도 역시 자신을 끝까지 믿고 따라주는 건 션밖에 없었다. 카를은 여전히 집에 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거스틴과 길리티도 엘릭과 눈이 마주치자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움직일 차례였다.

* * *

[멍청한 놈. 죽었군.]

크르르-

커다란 동굴을 따라 짐승의 울음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영 탐탁지 않다는 듯, 혈미왕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눈을 떴다.

“하시려던 일이 잘 안 풀리신 듯합니다.”

그런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맞은편에 있던 마족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수록 혈미왕의 눈살에 패인 주름은 더 깊어졌다.

[꼬리가 돌아왔다.]

“저런. 신전을 불태운다던 계획이 잘 안 된 모양입니다.”

[이래서 멍청한 맹수에게는 일을 맡기면 안 되었던 것인데.]

혈미왕은 ‘쯧’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동안 자신에게 충성하고, 퓨리의 전성기를 구축하기 위해 목숨마저 바쳤던 수하에게 내리는 것이라고는 박한 평가였다.

하지만 원래 혈미왕은 성정이 그러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일족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꽃의 신전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곳. 어차피 몰락한 지 오래인 곳이니 별반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곳에 메르빙거가 있다는 사실이실 테죠.”

혈미왕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마족을 노려봤다.

메르빙거는 그에게 있어 한평생의 멍에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희도 다를 바가 없어서요. 메르빙거… 아주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만 다가왔던 이름이니.”

혈미왕은 메르빙거와 마족 간에 천 년 넘게 벌어진 대립을 잘 알기 때문에 굳이 거기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놈들은 다시 군세를 일으켜서 제거하면 그만. 우린 우선 우리의 협상부터 마무리하도록 하지. 그대가 몸담은 세력은 동장군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흑의 설원을 하나로 합칠…!]

혈미왕이 무슨 말을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말을 뚝 그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얼마나 덩치가 크던지, 수백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공동이 우르르 떨릴 정도였다.

거기다 대기를 떨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마저 잔뜩 어려 있었으니.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곳곳에 나눠 심었던 ‘꼬리’들이 갑자기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그때, 마족이 히죽 웃었다.

“저희 도움이 좀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 * *

퓨리 산하.

도시 ‘돌프강’.

와르르르!

“서, 성채가 무너진다!”

“으, 으아아아! 동장군이 몰려온다!”

“꼬리의 가호는 어딜 갔…! 아악!”

엘릭은 난장판에 빠진 도시를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살살 잘 녹네.”

『확실히 깽판을 쳐도 확실히 치는군.』

“꽃의 신전에다 불을 지르러 왔을 때는 자신들도 똑같이 당할 각오 정도는 했어야죠. 안 그래요?”

[호호호! 간만에 본 녀의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군요. 그렇죠. 이래야 재미가 좀 있죠. 백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엘릭은 꽃의 신전을 떠나기 전에 퓨리가 보유했거나, 혹은 퓨리의 세력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는 도시들의 위치에 관해 물었다.

각각의 도시들과 일일이 전쟁을 벌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들에게 낭패를 줄 수는 있겠다는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엘릭은 션, 카를, 헤이즈 등과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도시들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 비석만 일일이 골라 때렸다.

이렇게 험한 동장군을 가로지른 채로 안트로모프가 쳐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저들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동장군이 부서진 결계를 뚫고 엄습하는 순간, 도시는 혼란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삐이이익!

그때, 엘릭의 머리 위로 매가 한 마리 크게 원을 그리면서 울음소리를 냈다.

비석을 복구할 수 없도록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다는 길리티의 신호.

이곳에서 필요한 작업은 다 끝난 셈이니, 다음 도시로 이동할 차례였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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